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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철, 글로벌 시대에 동네 화가를 꿈꾼다

최호철, 글로벌 시대에 동네 화가를 꿈꾼다

크로키북 하나 달랑 메고 동네 골목을 기웃거리는 화가. 사람 냄새 풀풀 나는 한 장의 그림으로 수백 가지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작가. 만화가이자 타고난 그림쟁이인 최호철을 MANAGA 발행인 강인선이 만났다. 만나면 좋은 친구.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바로 최호철이다.

글 강인선  |   사진 최민호


내가 사는 곳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겨울방학을 맞은 캠퍼스는 적막했다.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하얀 눈을 포근하게 이고 있을 뿐. 운치 있는 붉은 벽돌이 하 얀 눈과 조화를 이룬 풍경이 아름답다. 만화가 최호철은 이곳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과 교수로 있다. 만화창작과 교수 연구실이 연이어 있는 복도에 들어서니 그 제야 사람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홍윤표, 한혜연, 모해 규, 최호철, 박인하…. 교수 연구실 출입문에 붙은 만화인들의 이름표가 정겹다. 공동체처럼 즐거운 팀워크를 자랑하는 교수들의 방은 만화처 럼 재밌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만화책은 물론 만화를 그리는 도 구와 컬렉션 아트상품으로 빼곡한 공간들이 저마다의 창작 열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와! 저 크로키북들!”

최호철 교수 연구실에 들어서서 높은 선반에 일련번호를 붙인 채 빼곡히 꽂힌 크로키북을 보니 반갑다. 쉰이 넘은 나이지만 대학원생처럼 보이는 최호철은 물론 더 반갑다. 우리 회사 거북이북스의 스테디셀러 <을지로 순환선>의 인 기 작가님이시니. 몰래 일기장을 보듯 책상 위 153번째 크로 키북을 훑어봤다. 크로키라고 하지만 그 섬세한 묘사는 완성 된 작품에 못지않고, 담담하게 기록한 삶의 이야기들이 여전 히 감동적이다. 그는 20년째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 지나가면서 보거나 멈춰 서서 본 것들, 느낀 것들이 크로키 북 속에서 오롯이 숨 쉬고 있다.

“모두 글로벌을 꿈꿔도 전 여전히 동네 화가가 좋습니다.”

동네 화가. 최호철은 스스로 이 칭호를 즐긴다. 어깨끈이 달린 크로키북 하나를 달랑 메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본 걸 그린 다. 시각적으로 신기하고 공간적으로 재밌으면 크로키북을 펼 친다. 동네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을 자신만의 그림으로 기록한 다. 이 기록의 조각들은 순수 회화로 혹은 만화로 재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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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변두리의 어수선한 모습이 재밌습니다. 하지만 요즘, 내 그림이 사라져 가는 ‘이사 떡’처럼 밀려난 느낌이 들곤 해요. ‘뒤끝’을 잡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뒤끝’을 잡고 있다는 넋두리에도 공감이 간다. 새로운 디지 털 기법이 빠르게 확산되는 세상이지만 최호철은 여전히 손 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본’을 뜨는 작가다. 그의 그림이 만화 와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듯 그의 작업 또한 수작업과 디지 털을 넘나들지만 첨단 프로그램보다는 손의 직관을 믿는다. 

우리 이웃의 고단한 삶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시선 얼마 전 다녀온 최호철의 하남 자택 작업실과 청강대 교수 연 구실은 그 분위기가 비슷하다. 일단, 언제 완성할지 모르는 초 대형 캔버스가 화실과 교수 연구실 두 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 하남 작업실엔 작가가 미술학도로 청춘을 보냈던 북아현동 풍 경이 펼쳐져 있고, 교수 연구실의 캔버스에는 광주시청 언저리 의 풍경이 꼬물꼬물 피어있다. 엄청난 디테일의 힘과 광각의 서 사를 보여준 <을지로 순환선>, <와우산>, 혹은 <노동자 대회 날> 같은 대작의 탄생이 멀지 않은 느낌이다. 작가의 그림처럼 조물조물한 아트상품나 캐릭터 조형물들도 화실과 교수실에 함께 있다. 컬렉터로서의 취미를 짐작게 한 다. 손으로 뚝딱뚝딱 만든 듯한 책상, 책꽂이, 선반 등 낡은 가 구와 소품은 작가의 목공 솜씨를 가늠케 한다. 이 재주 많은 작가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걸까? 최호철은 만화가 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투시도법, 공간 드로잉, 장면 설계와 공간 연출 등을 강의하는 교수다.

“그저 눈에 보이는 걸 그릴 줄 알아야 하고, 상상하는 걸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화가라면 눈에 보였던 경 험을 가지고 상상하는 걸 설계해야 하니까요.”

학생들에게는 매주 20여 장의 그림 그리는 숙제를 내준다. 그 래서일까? 최호철처럼 크로키북을 메고 다니는 학생들이 종 종 눈에 띈다. 이렇게 기본기를 다지게 하면서 그 자신도 그림 그리는 손을 멈춘 적이 없다. 그런 모습은 수많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면서 본 것과 상상한 것을 중첩시켜 풀어놓으면 한 장의 그림에도 거대한 서사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과 ‘이동 시점(한 장면에 여러 소실점이 존재)’이라는 장면 연출도 완성했다. 노동자, 농민, 소시민의 소소한 삶을 꾸준히 기록하는 그의 성장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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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모든 면에서 우월한 형보다 잘하는 게 그림밖에 없었지요. 결국 미대(홍대 회화과)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할 머니의 초상화를 부탁하는 거예요. 서양인들을 본뜬 석고상 만 그려왔던 내게 밋밋한 할머니의 동양적인 얼굴은 바라보는 것조차 이상했어요. 그림의 대상이 되기엔 형태가 옳지 않다 는 느낌이랄까? 가깝고 친숙한 이의 모습을 어색해 하는 미학 을 가지고 있다니! 그런 저 자신이 충격이었죠. 그 뒤론 주변 사람을 주인공으로 그려낼 수 있는 그림쟁이를 목표로 삼았 어요. 크로키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했고요.”

그렇게 그려 본 늙은 할머니의 초상. 이 ‘이상한 일’은 청계천 야학 선생을 하고 민중미술을 그리게 되면서, 최호철이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작품에 천착하는 근간이 됐다. 우리 이웃의 고 단한 삶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전태일 열사를 그린 장편 만화 <태일이>나 화집 <을지로 순환선>, 곧 나올 <외곽순환 로>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많은 것은 잡념, 없는 것은 집념? 눈 덮인 하얀 캠퍼스에는 어둠이 일찍 내린다. 청강대 근 처 보리밥집에서 따듯한 저녁을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MANAGA 1호 인터뷰 작가의 공통 질문이었던 ‘내게 많거나 없는 것’을 물었다.

“글쎄요. 내게 많은 것은 잡념? 항상 생각이 많지요. 하지만 내 게 없는 것은… 없는데요. 마누라도 있고,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양가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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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양이가 있는 것까지 자랑한다. 최호철의 ‘마누라’인 만 화가 유승하는 부부 전시회를 하는 그림 동료이자 민주적인 가정을 함께 가꾼 삶의 동반자다. 정감 넘치는 책을 내는 틈틈 이 여성운동으로 사회 참여까지 하는 멋진 작가다. 뭔가를 그 리거나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들 희람이와 딸 홍이까지 네 식 구는 항상 꼬물꼬물 그림을 그리며 산다. 네 식구의 그림은 늘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참 예쁜 가족의 모습이다.
“다시 얘기할게요. 내게 많은 건 잡념! 없는 건 집념! 맞아요. 집념, 불굴의 의지 같은 게 없어요.”

 이 만화가를 MANAGA에!
이경석(전원교양곡, 을식이). 요즘 사회적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연출을 하는, 기괴한 재미가 있는 작가다.


지난해, 최호철은 간단한 수술을 하러 갔다가 의료 실수로 조금 위험한 순간을 경험했다. 가수 신해철의 안타까운 상황이 오버랩된다. 상태가 악화되어 장기간 입원으로 이어졌는데, 최호철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됐다고.

“아,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가는 거구나 싶었 죠. 그때 이후로 거의 없던 ‘불굴의 의지’가 아예 없어지게 됐 어요. 큰 욕심 없이 ‘동네 화가’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지 금이 참 감사하네요.”

그림을 집념이나 의지가 아닌, ‘그저 좋아서’ 그리는 동네 화 가.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꼭 닮았다.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밋밋한’ 모습 그대로. 

통일 한국을 그리다
 KBS 1TV에서는 최근 ‘통일 한국을 그리다’라는 통일 다큐멘 터리를 방영하면서 최호철을 섭외했다. 압축된 광각의 서사 로 통일을 묘사할 최고의 작가를 찾은 것. 남북이 연결된 지형 에 대한 상상도가 TV 화면에 펼쳐졌다. 진달래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서울, 개성, 평양, 원산이 한 장의 그림에 엮여 있었다. 함께 어울린 우리 한민족은 즐겁다. 저 멀리 백두산을 향해 철마는 달리고 있다. 화룡점정을 찍는 엔딩. 최호철의 그림이 다큐멘터리의 감동을 더 크게 증폭시 켰다.

구수한 숭늉이 나왔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큰 욕심은 없어 도 꿈은 있겠지. 최호철의 꿈은 무엇일까?

“그림이 더 잘 되고, 더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더 잘 되는 것은 작가가 지향하는 어떤 완성도를 뜻하 리라. 그림이 더 깊어지기를 바라는 참 소박한 꿈. 최호철은 그 야말로 천생 그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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