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스크랩]
박건웅, 투쟁하는 휴머니스트

박건웅, 투쟁하는 휴머니스트

<짐승의 시간>으로 2014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가, 박건웅. 이 책은 작가주의 만화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면서 인권에 대한 의식을 일깨운다. 작품의 배경이 된 남영동을 작가와 MANAGA 에디터 양민재가 찾았다. 가슴 시린 그 공간에서 작가는 작품 <짐승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했다. 

글 양민재  |  사진 최민호 


현장미술가에서 만화가로
 만화가 박건웅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층의 작가실에 입주 해 있다. 4층의 MANAGA 편집부와는 지척이다. 취재를 빌미 로 내려가 보니 작가는 커다란 원고를 펼쳐 놓은 채, 작업에 여념이 없다. 손끝은 검은 잉크와 하얀 수정액으로 물들어 있 다. 신작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풀풀 느 껴진다. 

“작가님,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은 무엇인지요?”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만 화입니다.” “작업 중인 원고를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데요, 어떻게 구 성하셨나요?” “이 만화는 물푸레나무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과정을 물푸레나무가 냉소적으 로 서술합니다. 만화의 마지막에 이 물푸레나무는 한 어머니 가 아들의 참혹한 시체를 찾는 모습을 봅니다. 그 어머니는 형 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가지요.” “사건의 묘사를 넘어 가족애와 인간애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기대가 큽니다.” 

작가는 작품에 대한 기대에 쑥스러워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평소에 존경하던 만화가 박건웅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에 대해 듣고 싶었다. 인터뷰는 작가의 화실과 <짐승의시간> 배경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두 곳에서 이루 어졌다.   

화가가 되고 싶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 회화를 전공 한 박건웅은 1991년, 충격적인 한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학 내 비리에 맞서 학원 자주화 투쟁을 하던 명지대 학생이 백골 단이라 불리는 서울 경찰청 특수기동대의 쇠파이프에 맞아서 사망한 사건이다. 신입생이었던 박건웅은 이 충격적인 죽음 에 항의하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평범했던 학생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깨어나기 시작 한 것. 그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민중미술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하고요, 현장미술이었어요. 시위 현장의 걸개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비전향장기수의 이야기를 천백오십 쪽의 만화로  
첫 만화를 그리는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1991년 지리 산 산행 중 발을 헛디뎌 가파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다행히 나무뿌리를 잡아서 살았다. 그런데, 떨어지던 그 찰나에 태어 나서 그때까지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신기한 경험 을 하게 된다. 박건웅은 누군가의 죽음의 순간, 그 인생을 회 상하는 이야기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작 품 구상은 한참 후에 역사의 격랑을 타고 감옥에서 죽음을 맞 는 비전향장기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멕시코 벽화의 연작 그림처럼 그려 볼까도 했지만 하나의 압 축된 그림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다 <쥐>를 비롯 한 많은 만화를 보게 되었죠. 아, 이야기를 이런 방식으로 전 달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만화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벽화를 그리는 일과 취미 미술을 가르치는 일로 어렵사리 돈을 벌면서 만화를 그려나 가기 시작했다. 이 작업의 도중에 입대를 했지만 그곳에서도 틈틈히 만화를 그렸다. 이 만화에 <꽃>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500여 쪽으로 완성했다. <꽃>은 목판화적인 기법이 돋보이는 예술만화다. 박건웅은 어둠 속에 가려졌던 것들을 파내는 느낌으로 작품을 완성했 다. 이 만화는 그 작품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제작지원작에 선정되었고 박건웅은 원래의 계획대로 600쪽을 더 그려 무려 1,150쪽에 달하는 4부작 <꽃>(2004 년)을 완성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장씩 그려 낸 치열함이 이런 성과를 이루어냈다. 타고난 예술적 감각에 성실함까지 더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묻혀있던 아픈 역사를 세상으로
 박건웅은 <꽃> 이후 자신의 이름을 알린 대작 <노근리 이야기> 1부(2006년)를 발표했다. 정은용이 쓴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만화화한 작품이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미군이 충북 영동 노 근리의 쌍굴다리에서 양민 3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노근리 피해자인 정은용의 소설을 통해 1994년 세상 에 알려진다. 박건웅은 이 소설을 620쪽의 만화로 완성했다. 그에게 노근리 사건은 삼베옷에 피가 얼룩진 느낌이었고, 이 를 표현하기 위해 한지와 붓으로 만화를 그렸다. 만화 <노근리 이야기> 1부는 학살 장면에 무려 300여 쪽을 할애한다. 참혹한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작가는 도대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3a94949deda6f2357ba89274824cf88b.jpg
116dfacbd615e02e8e09743c0c435e75.jpg
1d062dbac04d471289e148aaf237e3cd.JPG


소설보다 <노근리 다리>라는 다큐멘터리와 AP기자가 썼던 증언 기록들을 자료로 살펴볼 때 더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작품할 때보다 부모가 된 후에 읽어보니 더 못 보겠더라고요. 아이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이 마음 아파서요.”

박건웅은 사명감으로 힘든 창작의 과정을 버텼었다. “고교시절, 학교 옆의 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군인의 시신을 처 리하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일을 하는 게 무섭지 않냐고 여쭈니, 불쌍한 젊은이들을 잘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 내주는데 뭐가 무섭냐며 이들이 나에게 고맙다 할 거라고 무 심히 말하더군요.” 박건웅은 <노근리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 할아버지 말을 되 뇌였다. 누군가는 죽음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고. 그렇게 박건 웅은 작품을 통해 억울한 죽음들을 보듬어 안았고 아픈 역사 를 상기시켰다. 

기억 속 이야기를 투쟁으로
 박건웅의 현대사만화 기록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제주 4·3사 건을 그린 <홍이 이야기>(2008년)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의 이야기 <나는 공산주의자다>(2010년) 그리고 노근리 사 건 피해자들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근리 이야기>2부(2011년)를 연이어 발표했다. <노근리 이야기> 1, 2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판권 수출이 되었고, 해외 독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건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조리한 사회의 모습을 그린 정치시사풍자만화 <삽질의 시 대>(2012년)를 발표하며 또다른 스타일의 변화를 꾀했다. 우 화 같은 이 만화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을 유머러스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52285bc2e695d788424cf6466c889311.jpg
da17ec66c37f04a2e25764e5e123ae3b.jpg
07618a0352dbf4622beb1b3fe2d33992.jpg


“만화는 이제 저널리즘으로 확대되어 담론을 형성하는 매체 로 성장했습니다. 인권과 평화에 대한 작품은 세계의 독자들 이 자신들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읽어볼 수 있지요. 우리에겐 아직도 바꿔야 할 의식과 구조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들 이 꾸준히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건웅은 역사나 정치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 대해 다양 한 의견이 많은 세상이 건강한 사회라고 말한다.  그가 유독 한국 근·현대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권력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써 왔어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과의 싸움, 저는 이것을 ‘기억 투쟁’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학살 사건을 조명하는 이유도 그 사건들이 ‘보통 사람’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잊어버리면 언젠가 똑같은 일이 다 시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고 작가는 힘주어 말한다.

‘짐승의 시간’이 없는 세상으로 
박건웅의 <짐승의 시간>(2014년)은 우리 만화계의 기념비적 인 작품이다. 1985년 9월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근태가 남영 동 대공분실에 갇혀 22일 동안 지독한 고문을 당한 사건을 그 렸다. 박건웅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예술적인 만화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 “짐승의 시간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미 안함과 희망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된 현장을 작가와 함께 둘러보니, 이 폐쇄적인 공간이 고문을 위해 의도적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 가 떠오른다. 박건웅은 이 건물을 샅샅이 살펴 <짐승의 시간> 을 완성, 독자의 의식을 깨우고 인권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 다. 거기에 완벽한 연출로 만화의 예술성까지 높였다. 대공분 실 안과 밖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면서 ‘안’의 인물 김근태 의 고통이 평범한 시민으로 대변되는 ‘밖’의 인물 ‘이기영’과 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짐승의 시간>은 그 처절한 내용만큼이나 강렬한 흑백 대비의 화풍이 인상적인 작품 이다. 박건웅은 작품마다 새로운 재료와 도구로 변화를 추구하는 데, 그 속에 담긴 뜨거운 메시지와 따듯한 휴머니즘은 한결같 다. 
그는 만화를 그리지 않을 땐 아내와 네 살배기 딸과 많은 시간 을 보낸다. 그리고 시장이나 집회, 시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 을 만나 ‘사람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생각과 행동, 그의 만화 는 사람에 대한 애정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박건웅은 이 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다.

2f24adc08f6d16d2eca16cce0a7097d0.jpg

 이 만화가를 MANAGA에!

간판스타(이희재) 1998년 만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우연히 본 이 작품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작가에겐 용기와 나아가야할 길이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준 소중한 작품이다.

d7cd94adb8cb8e71a1a9968e4222561b.jpg
31a908b5a2a697ded09901e956e8a66d.jpg
12804b63f395321bd92b488e251f4021.jpg
4d12098cc47895fff36cf083049397a1.jpg
4aec75ce8d2a4eb8cbea6774f867aeea.jpg
23375e699ed210cda2c4abb5bfdc2196.jpg
54894079a3dc7da7fc29226ba7a88e11.jpg
a0dc45d0327c5ddb09a45c028068dc00.jpg
4c81a04b561df8403bfd1cdbc7231bb9.jpg
52698382bf5a1be7567205b1abad82f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