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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 신일숙 작가

인터뷰 

<카야> 신일숙 작가 
“내가 가장 행복한 방식대로 산다” 


허이모
사진 최민호

 



많은 이 근황을 궁금해한다.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신작 <카야> 이전에, 레진코믹스에서 <불꽃의 메디아>를 연재했었다. 

신일숙 오랫동안 내 작품을 읽어온 독자 중에는 레진코믹스를 모르는 독자가 많아서 <불꽃의 메디아>연재 자체를 잘 몰랐다. 내 신작을 종이책으로 접하지 못한 게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카야>는 2009년에 한 번 시도했던 작품이다. 편의점용 만화책 브랜드인 <2030코믹스>에서 연재했는데, 잡지가 잘 안 되어서 작품도 중단했다.

거기에 어깨 인대까지 크게 다쳐서 팔을 거의 못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활 치료로 1년 반 정도를 보냈다.

그 시기를 지나니 작품을 연재할 매체가 별로 없었다. 웹툰 플랫폼도 네이버와 다음 외에는 별로 없었고.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휴식기를 가졌다. 

그러다가 ‘카툰컵’이라는 새 웹툰 플랫폼에서 <불꽃의 메디아>를 시작하게 됐다. ‘카툰컵’은 여자 작가들을 웹툰 플랫폼에 진출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카툰컵’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 ‘레진’에서 같이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불꽃의 메디아>를 레진에 연재하게 된 거다. 



 

<불꽃의 메디아>




신일숙 만화 세계의 원형 


대부분 작품 신화, 동화, 모험담의 구조를 따른다. 

신일숙 내가 그런 이야기를 재밌어해서 그렇다. 일단은 남이 재밌어하는 것은 뭔지 모르고, 아는 데도 한계가 있다. 내가 재밌어하는 걸 표현한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 사막 국가가 여러 작품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사막을 배경으로 선호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신일숙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거의 모든 작품을 꿈을 꾸고 시작한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부분은 그대로 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어떤 부족의 꿈을 꾼 후 거기에 설정을 덧붙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이다. <파라오의 연인>은 새로운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어서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그대로 발견되는 꿈을 꾸고 만들었다.

꿈 이야기의 기본 포맷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꿈에서 본 기본적인 것을 가져가면서, 새 이야기를 덧붙이는 형태인 셈이다. <리니지>는 <데포로쥬 왕자>라는 만화를 보는 꿈을 꾼 후 그린 것이다. 

<프쉬케>, <오리온과 다프네>, <불꽃의 메디아> 등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이 많다. 이 역시 꿈을 꾸고 그린 것인가?  

신일숙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 작품들은 내가 온전한(?) 정신에서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나에게 특별한 이야기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남동생에게만 책을 읽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언니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한 기억이 없다. 물론 책 읽는 것을 막진 않으셨지만. 하지만 내가 읽을 만한 책이 집에 별로 없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 권장도서를 절반 값에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신청했다.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였지만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했다.

책을 읽어나가는데, 뇌의 한 부분이 열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수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세계로 가 본 느낌은 충격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해서 더 공부하게 됐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읽으면서 깨어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에 놀랐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이 정도로 깨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어떻게 이런 정신적인 발전을 이루고 또 사라진 거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갑자기 생겨난 것은 없으니까 그리스 문명 전에도 ‘뭔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문명이 사라지는데 ‘뭔가’ 다른 요인이 있는 게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카야>를 구상하게 됐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해석할 때, 작가로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가? 

신일숙 그리스의 신은 무척 인간적이다. 그러나 여러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신들의 성격은 일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신들에게 성격을 부여한다. 신일숙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이 아닌, 인간의 성격을 가진 신이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재미있다. ‘이유’ 있는 신들을 만드는 거다. 

신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면? 

신일숙 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을 아주 깊이 사귀는 것을 썩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을 지켜보는 건 아주 재밌다. 사람마다 성격이나 가치관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이상해 보이지만 그 사람으로선 일리 있는 행동, 옳은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일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이렇게 내가 아는, 혹은 관찰하는 인간의 세계는 좁다.

하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세계는 넓다. 책의 세계는 나의 좁은 세상을 넓혀준다. 내가 아는 세계를 통해 내가 모르는 세계를 채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독특한 인물들이 탄생할 수 있겠다. <라이언의 왕녀>가 그런 인물의 원형인 것 같다.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여성들을 그려왔다.  

신일숙 여자는 여자로 길러지는 것이지, 여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갖는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자란 세상은 남자들이 살기엔 좋지만, 여자들이 살기엔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여자들은 무조건 우리 속에 갇혀 있어야 보호받고, 밖에 나가면 무슨 일을 당하든지 책임져주지 않았다.  

또 남자 만화가가 만화를 그리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이고, 여자 만화가는 용돈 벌이라는 인식도 있다. 여자가 능력이 있든 없든, 남자와 같은 출발 선상에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여자들도 여자 중심으로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던 것 같다.  

그래서 만화를 시작했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작품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었다. 여자도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바람은 내 모든 작품에 깔려 있다. 


 

<라이언의 왕녀>



데뷔 그리고 <라이언의 왕녀> 

1984년에 <라이언의 왕녀> 데뷔했다. 어떻게 만화가가 되었는지. 

신일숙 5살 때부터 만화를 봤다. 계속 보고, 따라 그려봤다. 그 뒤로는 따라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런 것들이 만화 수업이었다. 

주로 누구의 만화를 봤나? 

신일숙 나 어릴 때는 엄희자 씨, 민애니 씨가 순정만화가로 활동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기억한다. 순정만화라는 것 자체가 없어졌던 게.

그후엔 아주 만족할만한 건 아니었지만 활극 만화를 많이 읽었다. <캔디캔디>를 시작으로 일본 만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활극 만화를 볼 때도 한 종류만 파지 않고, 잡다한 만화 혹은 다양한 만화를 봤다. 거의 모든 만화를 섭렵했는데, 지금도 썩 좋아하지 않는 건 학원물 정도다. 


 



데뷔를 했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만화계의 분위기는 어땠나? 

신일숙 내가 데뷔할 때는 순정만화가가 황미나 작가밖에 없었다. 이현세 작가, 박봉성 작가의 인기가 높았고 나도 박봉성 작가가 활동하던 출판사에서 데뷔했다. 순정만화는 잘 팔리는 남자 만화에 끼워서 팔다시피 했다. 그래도 그 당시엔 순정만화를 그릴 기회를 준 게 그저 고마울 정도였다. 

그렇게 순정만화가 조금씩 연재되면서 업계에서도 순정만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활극 만화처럼 빨리 나오고, 잘 팔기 어렵지만 대신 꾸준한 인기가 꾸준히 오래 간다는 걸 알기 시작한 거다. 그때부터 순정만화도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순정만화 작가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일본처럼 순정만화 전문 만화잡지를 펴내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작가층이 있었고, 잡지로 인해 순정만화가들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989년도에 순정만화 전문 만화잡지<르네상스>가 창간됐다. <르네상스>는 황미나 작가가 활동하던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그 출판사의 작가들만으로는 잡지 유지가 힘들었다. 결국, 나나 강경옥 작가 등 다른 출판사에서 활동하던 순정만화 작가들도 합류했다.

이 잡지가 잘 되면 또 다른 잡지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르네상스> 연재를 시작했다. <르네상스>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에 여자 작가가 그렇게 많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천재의 행보 


데뷔작인 <라이언의 왕녀>를 그리고 금방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 나왔다. 

신일숙 <라이언의 왕녀>는 1983년에 완성했고, 1984년 1월에 책을 냈다. <라이언의 왕녀>는 많은 분이 아는 작품은 아니었다.
1985년까지는 <사랑의 아테네>를 연재했다. 그 후 작업을 시작해서 1985년에 첫 책을 낸 작품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다.
단행본 한 권을 그리는데 참 오래 걸렸다. 순정만화는 빨리 그릴 수가 없다. 죽어라 그리는데도 3개월에 한 권을 내기가 벅찼다. 

데뷔 초부터 대작인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그렸다. 어떻게 그런 대작을 커리어도 없는 초창기에 시도했나? 

신일숙 힘들긴 했지만, 단행본이라는 게 이점이 됐다. 순정만화가가 긴 호흡의 대작을 잡지나 웹툰에서 기획하는 건 쉽지 않다. 황미나 작가, 김혜린 작가, 강경옥 작가의 작품들이 그 시대 즉 단행본 시대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작품을 나무로 비유하자면, 대작을 그리기 위해선 열매가 열리지 않는 시기를 참고 견뎌야 한다. 작가나 독자나 작품 흐름상 조금 재미없는 부분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 나무가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잡지나 웹툰은 사전 제작을 하지 않는 한 구상하는 시간이 촉박할 뿐만 아니라 매회 승부를 봐야 한다. 이제 대작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림 작가와 글 작가가 따로 붙어야 가능한 상황이다. 1인 창작자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만화 매체가 웹툰 플랫폼으로 전환됐기 때문인가? 

신일숙 잡지 때부터 그랬다고 본다. 잡지도 긴 호흡의 큰 작품보다는 한 회 한 회가 인기 있기를 바란다.

독자들에게 이 작가의 작품은 기다리면 터뜨려준다는 신뢰가 형성되면 좋은 장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신뢰를 쌓아가면서 독자와 작가가 작품을 같이 만들어간다고나 할까? 그런 대작이 좀 더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아르미안의 네 딸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처음부터 초장편으로 기획한 것인가? 

신일숙 처음에는 15권이면 끝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당시의 만화 단행본으로 30권 넘게 진행이 됐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면 1, 2권은 엄청 빡빡하다. 한 페이지에 컷을 4단, 5단으로 욱여넣었다. 단 한 페이지도 그냥 흘려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품을 지속하면서 그림체가 잡히고, 연출 방식도 자유로워졌다.

처음과 달리 양면을 쫙 펼쳐 쓰는 장쾌한 연출법을 쓰기도 했다. 작가로서 성장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그리다 보니 10권을 넘겼을 때, ‘아직 이야기의 절반도 안 지났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 

내 이야기는 처음 구상했던 주 줄거리보다 항상 더 커진다. 이야기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이 인물이 자기 혼자서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인물을 어느 정도까지 풀어줘야 한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고.

또 전체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잘라야 할 때는 잘라줘야 한다. 이런 식의 가지치기가 대작을 그릴 때는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인물을 살릴지, 죽일지, 어디까지 활용할지를 판단하고 가지를 쳐야 한다.

예를 들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미카엘이나 에일레스는 구상이 정해져 있었다. 글라우커스는 처음 구상을 넘어서 스스로 살아서 움직였고, 한동안은 딸려 가기도 했다. 처음 구상과 달라진 인물과 그 인물이 움직이면서 불어난 이야기를 모아 힘을 잃지 않게 끝을 내는 게 정말 힘들다.  

반대로, <리니지>를 연재할 당시에는 작가로서 작품을 억누르는 스타일이었다. <리니지>에서는 인물이 자기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가의 힘,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신일숙 인내, 끈기 그리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욕심을 버린다니 의외다. 오히려 욕심을 내야 하지 않나? 

신일숙 작가라면 누구나 끝을 멋있게 장식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끝보다는 중간이 좀 더 멋있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독자는 중간이 멋있었으니까 끝에는 더 멋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다 보니, 독자와 작가의 욕심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을 시켜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욕심을 쳐내는 것이 중요하다. 가지치기는 여기서도 필요한 능력이다. 

가치치기는 매우 감각적인 부분으로 들린다.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봐야 할까? 

신일숙 계산으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계산이 없어도 안 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운명과 <리니지>의 혈통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는 운명(미래,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는 경구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런데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일숙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도, 원래 정해진 운명과 비교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사형수라 해도 그냥 죽는 날만 기다리느냐, 죽기 전에 뭔가를 해보려고 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길을 갈 때 남이 시켜서 가느냐, 내가 원해서 가느냐,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느냐는 다르다.  

어떤 결과가 나오는 데 있어서,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둘 중 하나는 선택할 수 있다. 이 상황을 즐길 것이냐, 아니면 힘들다고만 생각할 것이냐. 이런 식으로 순간마다 선택지가 나온다.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해보지 않는 사람과 매번 자기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은 그 삶이 굉장히 다르다.

원해서 하는 것이 원래 정해진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매번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은 굉장히 다른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운명을 변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딸들은 자기 운명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신일숙 아스파샤는 반은 휩쓸려갔고 반은 선택했다. 결국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디로 가야겠다고 결정한다. 스와르다는 마지막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마누아는 계속해서 운명을 거역했다. 샤르휘나도 자기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는 운명을 쥐고 태어난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선택한다.

네 딸들이 운명에 휩쓸려 간 게 아니라 모두 운명을 선택해나갔다는 점에서는 같다. 

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사랑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는데. 

신일숙 네 딸들은 모두 ‘운명의 사람’을 느낀다. 예지력이 있든, 고집으로 선택하든. 아스파샤나 마누아는 예지력이 있지만 스와르다에겐 예지력이 없다. 스와르다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녀의 고집이다. ‘운명에는 순응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결국, 고집이 중요한 것인가. 

신일숙
인생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다. 굉장히 중요하다. 줏대 없이 사는 것과 줏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자기 고집을 어떻게 관철하느냐가 중요하다. 상대를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변하는 방식으로 고집을 관철해야 한다. 

 

<리니지>



<리니지>에서는 운명 대신 혈통이 중요한 주제가 된다.
 
신일숙 <리니지>에서 ‘혈통’은 굉장히 중요하다. 내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가,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려주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생은 생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생은 선조와 후대에 걸쳐 몇 세대에 걸쳐 완성된다. 그것이 <리니지>의 의미다. 부모의 악업을 자식이 받기도 한다. 부모의 삶에 대해 자식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지게 돼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데포로쥬가 폭포라면 반왕은 리니지를 거스르는 분수이다. 데포로쥬는 정통한 왕의 혈통이니까. 



<1999년생>, <파라오의 연인>
<불꽃의 메디아>
 



초능력이나 마법과 같은 소재는 이전에도 자주 그렸지만, 근미래를 묘사했던 것은 <1999년생>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다. 

신일숙 그렇다. <카야> 이전에 장편 SF는 아니어도 종종 SF를 그려왔는데, <1999년생>이 그 시작이었다. 

근미래 SF를 묘사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신일숙 어려움이 많았다. 한 작가가 시대를 뛰어넘는 건 힘들다. 세계를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엄청 집중해서 머릿속의 세계를 거기에 맞춰야 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그릴 때는 머리가 이미 ‘아르미안’ 이라는 세계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1999년생>은 내 작품 중에선 짧은 편인데도 그걸 그리기 위해 SF와 현실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다. <1999년생>을 그릴 땐 <아르미안>을 놓게 됐다. 


 

"① 벼락처럼 기억에 남는 만남" - <1999년생> 




<파라오의 연인>의 악역인 토타메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페닉시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페닉시오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면서 토타메스를 부정한다. 

신일숙 결국 파라오의 사랑과 집착에 대한 이야기다. 페닉시오는 능력은 없지만 아름다움 때문에 계속 이용당하고 휘둘린다. 그런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다고나 할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좋아하는 것 자체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이성애든 동성애든 집착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느냐, 내 욕심에 충실하냐는 다르다. 그것이 페닉시오와 토타메스의 차이일 것이다. 

<불꽃의 메디아>를 그릴 때, 마녀 메디아의 이야기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신일숙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도 <일리아드>를 좋아하는데, 그걸 다 그리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 긴 이야기와 짧은 이야기의 문제다.

짧은 이야기는 틈틈이 그릴 수 있지만 긴 이야기는 몰아서 그려야 한다. <일리아드>를 시작하기 위해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일리아드>는 원래 있는 작품이니 언젠가는 해 보자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과연 체력이 받쳐 줄 것이냐는 문제가 있지만. 


 

<카야>




새로운 대작, <카야> 

<카야>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면서 <아르미안>과 <리니지>를 잇는 신일숙의 3대 대작이라는 광고가 보인다. 

신일숙 그건 매니지먼트 회사의 표현이다. 굳이 따지자면 <카야>는 <파라오의 연인>까지 더해 내 인생 4대 작품 중 하나라고는 생각한다.  

<카야>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카야>도 꿈이 모티브가 된 작품인가?
 
신일숙 <카야>는 애초에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기획할 무렵에 이미 구상을 끝낸 작품이었다. <카야>도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은 같다.

그런데 그 꿈이 몇 번 이어졌다는 데서 다른 작품과 조금 달랐다. 첫 꿈은 어린 여자애 둘을 포함한 그룹이 외계인 여자를 만나는 거였다. 그렇게 끝났다가 이 꿈과 연결되는 꿈을 다시 꿨다. 

<카야>의 무대륙 이야기는 ‘그리스 문명이 이미 존재했던 선진 문명이 전수된 걸 수도 있다’ 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또 그런 문명이 이어지지 않은 건 그 문명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을 거라고.

예컨대 ‘아틀란티스’의 동양판 이야기라고나 할까? 비록 끊긴 문명이라 잘 모르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왕국이나 통일된 문화가 같은 게 있었다는 상상을 한 거다. 

<카야> 2009년 연재 중단 후 웹툰으로 다시 살아났다. 초반부에 해당하겠지만, 예전 원고가 얼마나 수정됐는지 궁금하다. 

신일숙 거의 새로 작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웹툰 형식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카야>는 도입부만 봐도 대작이라는 느낌이다. 웹툰 독자들이 점점 가벼운 이야기를 선호하는 시대인데, 대서사 SF 판타지를 그리는 부담감은 없는가? 

신일숙 일단 나이가 있어서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다. 또 이미 손에 익은 그림체가 있다. 그래도 연재하면서 모든 것을 점차 맞춰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작품 자체는 미래적인 이미지를 다루기보다는 내가 묘사할 수 있는 SF를 그릴 것이다. 이야기가 범 우주적인 차원이다. SF 판타지라 과학병기를 동원한 전투신 정도는 등장하겠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물론, 나보다 많이 알고, 더 깊이 생각한 사람들은 더 괜찮은 걸 생각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세계를 만들어 나갈 참이다. 

<카야> 이야기의 규모는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갈수록 재밌어질 거고. 그렇다고 뒷이야기를 먼저 끌어오면 전체적인 이야기는 망가진다. 앞의 얘기가 조금 덜 재밌어도 천천히 한 단계씩 끌어올릴 생각이다. 반드시 갈수록 재밌어할 거라고 확신한다. 

<카야> 매니지먼트 회사인 거북이북스가 후회해봐야 이미 늦었다. 계약이 끝나서(웃음). 하지만 <카야>가 끝날 무렵에는 이 작가와 계약해서 잘했다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카야>는 구상한 지 오래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건가? 

신일숙 나는 항상 그때그때 하는 작품에 제일 많이 집중하고 애정을 갖는다. 작품에 푹 빠져들어 가야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중 어떤 작품이 제일 애정하는 작품인지 골라달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난 아직 내가 생각한 모든 이야기를 다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 고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죽기 직전에 고르면 모를까. 


요즘 만화계 

지금은 웹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독자와의 소통에 대한 생각은?   

신일숙 예전에도 작가와 독자의 소통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독자 편지를 받아도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고 일일이 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홈페이지를 개설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독자와 바로 얘기할 수는 있었는데, 그게 또 일이었다. 신경을 안 쓰면 안 쓴다고 욕먹고, 신경을 쓰다 보면 일을 하는 데 지장이 된다. 

매니지먼트사에서 <카야> 연재를 시작하니 페이스북이라도 해보자고 하는데, 아직 못하고 있다. 난 나를 밝히기보다는, 내가 찾아다니면서 작품 피드백을 보는 게 좋다. 그렇게 독자들의 얘기를 많이 참고하고 듣겠지만, 다이렉트로 소통하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거 같다. 

집단 채팅이나 단발성 만남이라면. 한 번씩은 괜찮지 않을까.  

신일숙 내 독자들은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열성적일 거 같진 않다(웃음). 독자 만남에 집착하게 되면 작가 생활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래도 오랫동안 내 작품을 좋아했던 독자들하고는 팬 사인회라든가, 인원을 정해두는 소규모 만남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남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떻게 할지는 지금 워낙 바빠서 잘 알 수 없지만 매니지먼트사가 고민해줬으면 한다(웃음). 


 


웹툰이 대세인 시대, 아쉬운 점이나 좋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신일숙 잡지만화가 사라지고 매체가 웹툰으로 바뀌면서 요즘엔 ‘순정만화’라는 개념이 좀 사라졌다. 그래도 쉽게 데뷔가 되는 건 좋은 것 같다.

지금 같은 환경이었으면, 나는 아마 고등학교 때 데뷔를 했을 것 같다. 예전엔 재능이 있어도 여러 가지 미묘한 이유로 데뷔를 못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경우는 없지 않나? 

그렇지만 작업량이 너무 많아진 거 같다. 

신일숙 작업량에 대해선… 작가들이 미칠 수도 있다고 본다. 나 같은 경우 작업량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잘 나갈 땐 격주간과 월간을 병행한 적도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작업량은 작가의 수명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

많은 작품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작가 생활을 오래 하긴 어렵다. 작가들은 머릿속에 황금을 가지고 있다. 조금씩 쓰면 옹달샘처럼 다시 고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퍼 쓰면 다시 고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얼마큼 큰 샘을 갖고 태어나느냐는 기본 재능일 수 있다. 하지만 얼마큼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아끼고 잘 보호하면서, 적기에 잘 쓰느냐도 중요하다.  작가들이 자기 자신을 아낄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 

웹툰 작가도 명절 등 휴무일엔 쉴 수 있어야 한다는 비판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신일숙 업체에서는 비축된 분량을 내보내자고 하는데, 그것은 작가의 재산이다. 그걸 마음대로 건드리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적정선이 필요하다.

업체도 작가와 같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작가의 건강 관리 등에 신경을 쓰고, 어느 정도의 작품을 했으면 쉬는 기간도 줘야 한다. 

만화라는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만화와 만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만화가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면, 그 거위를 건강하게 관리해야 한다. 

작가들도 자기가 바뀌어야지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기 몸을 먼저 챙겨야 한다. 웹툰 작가들이 전부 다 명절에 쉬겠다고 하면 업계 전체가 어쩔 수 없이 쉬게 된다. 안 쉬는 사람이 있으니까 쉬고 싶은 사람도 못 쉬는 것 아닌가.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전에 나한테 피해가 올까 봐 내 주장을 못 하기보단, 손해가 좀 있더라도 주장을 해서 다 같이 쉴 때 좀 당당하게 쉴 수 있는 문화가 이뤄지면 좋겠다. 


만화와 삶 

마지막으로 신일숙 작가에게 삶과 만화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묻고 싶다. 

신일숙 어렸을 때 아주 무서워하면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 커서 이 세상이 별로 무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계속 그 무서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다.

반대로, 사랑받은 아이는 자기가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데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받았기에,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받지 못했기에 다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야>를 그리면서 애초에 스타트가 다 똑같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커서 다 달라지더라도 아이들이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고, 무서워 하는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다면 어떨까?

각자의 환경에 너무 큰 차이가 없고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 몫만큼만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너무 큰 차이가 불행을 만든다. 

세상에는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이 있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약한 사람을 강하게 만들 수도, 강한 사람을 약하게 만들 수는 없다.

분명한 건 각자 태어난 몫만큼 살아갈 수 있게 해줄 것이냐는 거다. 약하면 약한 몫만큼 키워주고 안정감을 주는 그런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게 이뤄질 수 없다고 해도 내 생각의 이데아에서는 그렇다. 

내가 세상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니 나는 ‘내가 가장 행복한 방식대로 살겠다’ 라고 생각한다. 가진 게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다. 풍족함이 주어졌을 때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작가로서 여러 세계를 만들고, 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신일숙 그렇다. 내가 남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바꿀 수 없으니까 나는 내 생각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가장 행복한 방식으로 살다가 죽는 게 내 목표라고나 할까?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빨리 다음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한 작품을 했으니까 좀 즐기겠다는 생각을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느긋하게 즐기면서 살겠다는 거다.

그렇게 조금 낙천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살면 어떤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다보면 몸도 망가지고, 정신도 피폐해진다. 

나는 휴식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그게 나한테 당장은 불이익으로 돌아오더라도. 하지만 결국 그게 나를 이롭게 할 거라는 걸 믿는다. 


 


yourmanaⓒ허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