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스크랩]
<조형의 과정> 최재훈 작가

인터뷰

<조형의 과정> 최재훈 작가
"개성있는 작가들과 어떤 '씬'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선우훈
사진 전수만


출판 만화의 시대를 지나 웹툰이 대세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이 전에도, 앞으로도 '대세'가 되지는 않을 만화가 있다. 예술 만화, 독립 만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품들이다. 그런 만화는 어떤 사람들이 그리는 걸까.

독립 만화 잡지 <쾅>을 만들면서, <조형의 과정>과 <꿈속의 신> 두 권의 책을 낸 최재훈 작가를 만났다. 얼어붙는 날씨에 감기까지 겹쳤지만 작가는 쾌활하게 만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목소리는 잠겼지만, 표정만은 밝고 진지했던 최재훈 작가.




소개를 부탁한다.

최재훈 이런 소개를 할 땐 '만화를 하고, 만화책을 만들기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개인 사이트나 SNS를 보면 만화 뿐 아니라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프로필에 적은 'Comic Artist, Illustrator, Publisher'라는 소개도 인상 깊다. 

최재훈 프로필을 그렇게 쓴 이유는 생존과 연관돼서다. 만화가 작업의 중심이지만 웹툰을 연재하는 게 아니고, '그림'이 관련된 여러 일을 하다보니.

한국에서 출판 만화나 예술 만화를 하려면, 다방면의 일을 해야 생계가 유지되고 시너지가 생긴다.


최근 'illion'의 새 앨범에 실은 만화를 이와이 슌지 감독이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로 제작했다. 어떻게 이런 협업을 했나?

최재훈 2015년부터 SNS를 시작했다. 그 후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해외 작가나 출판사들과 일하게 된 것이다.

첨언하자면, 'illion'은 <너의 이름은.>의 음악을 맡은 'Radwimps'라는 밴드의 보컬이다. 노다 요지로라는 사람인데, 개인 활동을 할 때 그 이름을 쓴다.

그가 2016년 4월에 가을에 낼 2집에 만화를
넣고 싶다고 나한테 연락했다.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노래도 듣고, 콘셉트 회의를 많이 했다. 콘티도 진행하고.



 

'illion'의 곡 ‹MIRACLE›의 뮤직비디오 작업에 쓰인 최재훈 작가의 작업.
‹MIRACLE›뮤직비디오(링크)




작업을 하는 과정 중에 ‹MIRACLE›을 위해 그린 만화를 바탕으로한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가 만들어질 것이고, 감독은 이와이 슌지가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예산 문제가 있어서 실제로 이뤄질 거란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느데 다행히 결정이 되었다.


고마운 건, 이와이 슌지 감독이 내 포트폴리오만 보고 제작비가 결정되기 전에 수락해줬다는 점이다. 요지로와의 협업 진행 전이었고, 제작비가 결정되기도 전이었는데.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 기뻐서 혼자 소리를 질렀다.

 

신기하다. 애니메이션에 참여한 밴드와 만화로 협업을 하고, 뮤직비디오 감독은 만화가의 포트폴리오만 보고 감독직을 수락하고.

최재훈  심지어 이와이 슌지 감독은 내게 애니메이션을 만들 줄 아냐고도 물어봤었다. 고맙지만 이제는 못한다고 거절했다. 그들이 훨씬 더 잘할 테니까.

 

시미즈 히로유키와 <한국 타워 탐구생활>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최재훈 유어 마인드의 이로님이 먼저 제안을 했다. 시미즈 히로유키님이 한국 타워에 대한 글을 썼는데, 글의 분위기상 사진보다는 고전적인 느낌의 펜 그림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흔쾌히 수락했고, 작업하면서도 정말 재밌었던 기획이다.





독립출판서점 유어 마인드에서 발간한 <한국 타워 탐구생활>.




 

만화를 그리기까지

여러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만화가다. 만화 작업의 계기는 무엇인가?

 

최재훈 덕후 체질이라 만화를 좋아하고 애니메이션도 좋아했다. 일본도 자주 가고.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를 그리긴 그렸었는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한겨레 출판 만화학교를 다녔다. 더 제대로 하고 싶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했고.

 

대학 진학을 늦게 한 것인가?

 

최재훈 늦게 한 편이다. 21살에 한겨레 만화 학교에 가고, 24살에 한예종에 들어갔으니까.

 

21살부터 24살까지는 무엇을 하면서 지냈나.
 

최재훈 덕후의 삶을 살았다. 만화에 필요한 것들이 단순하지 않아 여러 일을 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션 회사도 다니고, 친구랑 영화도 찍고, 사진도 배우고. 그 와중에 한겨레 출판 만화학교도 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화를 더 배우고 싶어서 다시 입시를 했다. 24살에 한예종 애니메이션 학과에 들어간 거다.


한겨레 출판 만화학교는 어떤 곳인가?

 

최재훈 1년 교육 과정을 갖춘 만화 전문학교다. 2000년대 초반에는 전문적인 만화 교육기관이 거의 없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예종을 다닐 때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주로 했나?

 

최재훈 한예종은 2004년에 입학해 2008년쯤 졸업했는데, 애니메이션은 2학년까지만 열심히 했다.

나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 편을 만들어도 1년 정도가 걸리는 애니메이션보다는 만화가 맞는 것 같았다. 만화는 단편으로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졸업 작품도 만화로 했다.

 

대중문화를 소비하던 오타쿠가, 대중적인 장르적 서사를 다루지 않는 게 신기하다.


최재훈 그 시기를 나눌 필요가 있는데, 24세 전에는 <에반게리온>의 진성 덕후였다. 극장판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그 이후에는 ‘덕업일치’를 이루려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만화라는 매체를 좋아하는 덕후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원피스나 에반게리온, 하이큐 같은 각 작품에 대한 덕후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쪽 보다는 만화책, 만화 미학 덕후에 가까운 것 같다. 실제로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변한 것도 있을 거고.


잡지를 만들다

다른 작가들과 함께 만들고 있는 독립 만화 잡지 <쾅>은 어떤 잡지인가.

최재훈 <쾅>에 있는 작가들과 함께 한국에선 하기 힘든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작품을 실을 곳이 없었다.

당시 한예종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끼리 어차피 놀 거 좀 재밌게 놀자고 만든 게 온라인 <쾅>이다. 온라인 <쾅>의 작업이 쌓이다 보니 단행본도 내고 오프라인 잡지도 내게 됐다.

 

<쾅>은 만화적 실험과 재미를 공유하는 어떤 창작 집단이다. 한국에서 만화나 그림의 지형도를 넓혀가는, 다양한 제안을 하는 공간이면서 혹은 출판사면 좋겠다. 아니, 출판사라기 보단 집단.


창작 집단이면서 출판사이고, 작가들이 유통과 홍보도 맡고 있는 것인가.

 

최재훈 그렇다. 그런데 작가들이 귀속되어있는 건 아니다.

 

 

<쾅> 사이트 메인 화면. 월간 발행하는 온라인 <쾅>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온라인 <쾅>과 오프라인 <쾅>은 어떻게 다른가.

 

최재훈 처음엔 같았는데, 지금은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들이 생겼다.

온라인 <쾅>은 훨씬 더 자유롭다. 작가들이 서로 강력한 크리틱을 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뭐든 해도 된다. 일러스트나 만화, 동화도 할 수 있고 분량이나 주제 등도 자유다. 
완성도도 본인 자유고.

오프라인은 원고료도 있고, 무엇보다 더 강한 잣대로 서로를 체크한다. 아무래도 온라인은 무료고 오프라인은 유료니까.

 

고료가 지급되는지 몰랐다.

 

최재훈 오프라인은 다 고료가 나온다. 단행본은 인세도 나오고.

 

고료가 어디서 나오나.

 

최재훈 처음 시작하던 2011, 2012년에는 출판 잡지 지원 등을 받아서 마련했다. 지금은 기존의 책들을 판매하면서 순환이 가능해졌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래도 순환이 된다는 게 굉장히 고무적으로 들린다.

 

최재훈 그렇다. 우리의 목표는 '최소한의 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한 달에 얼마씩 회비를 걷거나 했는데 지금은 회비를 걷지 않는다. 운영비가 따로 있고.

어느 순간 오프라인 잡지도나오고 인지도도 생겼다. 수익을 나는 걸 보니 순환이 가능하게 만들고 싶었다.


판매는 어떻게 하고 있나?

 

최재훈 쾅 사이트에 자체 온라인 샵이 있고, 예술 서점 중심으로 출고도 했다. <쾅> 샵은 2017년부터 주로 해외 판매에 집중할 생각이다.

작가들이 SNS를 해서 그런지 해외 구매 수요도 꽤 된다. 한국은 온라인 대형서점 등으로 판매를 확대할 예정이다. 지금도 알라딘 등에 출고하고 있다.

 

작가들을 모으고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최재훈 사실 나는 뭐든 대충하는 편이다. 근데 <쾅>에 있는 작가 분들이 되게 까다롭고, 실력도 좋고, 무엇보다 열심히 한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쾅>을 하면서 초반에 나왔던 얘기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하다 보니까 투고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중에 <쾅>의 색과 맞는 작가 분들과 함께했다.

 

구현성 작가 같은 경우가 최초로 영입된, '한예종 출신이 아닌' 작가다. 한예종 친구들과 시작한 일이라 너무 폐쇄적이 될까 봐 조심스러워 하던 차에 구현성 작가를 만나게 된 거다.

최형내 작가나 이윤희 작가, 심규태 작가 등도 같은 학교 출신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투고를 받으면, <쾅> 작가진과 상의해 영입하나?

 

최재훈 작가들이 심사를 하진 않는다. 그런데 같이 하게 된 작가들을 보면 함께 하고 싶다는 걸 굉장히 많이 드러낸 작가들이더라.

작품도 많이 들고 오고, 얼굴도 자주 비치는. 그런 분들과 오래 작업하게 됐다.

 



<쾅>사이트의 소개 이미지. <쾅>(QUANG COMIC ART MAGAZINE)은 2014년 3월, 1호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9호가 출간되었다. 9호의 콘셉트는 '흑백'이다.




 

오프라인에서 회의를 하는지?

 

최재훈 기본적으로 매주 만난다. 꼭 <쾅> 작업이 아니더라도 작품 얘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책 발행이나 결정은 다 같이 한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쾅>에는 리더가 없다.

 

리더는 아니더라도, <쾅>을 주도하는 작가인 줄 알았다.

 

최재훈 아무래도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해서 그런 것 아닐까. 사람도 자주 만나고, SNS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리더가 없다는 얘기를 한다.

 

예를 들어 <쾅>에 7명의 작가가 모였을 때, 다들 나름 만족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단 한 명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일종의 합의 민주주의 시스템인데, 그래야 가장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7명의 작가를 예로 들었는데 지금 활동하는 작가는 몇 명인가?

 

최재훈 참여했던 작가들은 20명 내외인데, 지금은 10명 정도다. 10명 정도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하고.

7명은 항상 있는 작가들. 해야 할 일은 항상있다. 보통 그 7명이 한다.


<쾅>에는 회화와 만화의 경계에 있는 작품들이 많다.

 

최재훈 <쾅>의 색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적인 경향 같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다 보니 정보에 대한 경계들이 많이 허물어지고 있다.

무엇이 회화고 무엇이 일러스트고 무엇이 만화인지 묻기도 모호할 정도로 흘러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기가 좋아하는 작업을 하고, 그것들을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직접 선보인다.

<쾅>에 있는 작가들은 그렇게 활동하면서, 만화를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는 거다. 

세계적인 경향이 그렇다 보니 협업 연락을 받기도 한다. 해외 페스티벌에서 초청 연락도 오고. 물론 만화 시장이 크진 않아서 경비 등의 문제로 참가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9권의 오프라인 잡지 <쾅>을 내면서 겪었던 특별한 에피소드는?

 

최재훈 특별한 에피소드보다는 시스템을 얘기하고 싶다. <쾅>은 만약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한 매번 편집장이 바뀐다.

물론 편집장을 도와주는 작가들이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들을 만나고, 협의하고, 책을 만드는 과정을 경험해보길 추천한다. 5호까지 세 명의 편집장이 있었고, 6, 7, 8호의 편집장이 다 달랐다.

 

 

  

작품 이야기


<조형의 과정>(좌), <꿈속의 신>(우)의 표지.



 

단편집 <조형의 과정>과 장편 <꿈속의 신> 1권, 두 권의 책을 발매했다. 모두 직접 만든 것인가?

최재훈 직접 만들었다는 표현은 좀 애매하다. <쾅>에 관련된 모든 아트워크와 디자인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 바로 스파크 에디션(sparks edition)인데, 이분들이 <쾅> 잡지, 단행본, 배지 등 모든 것을 총괄한다.

<조형의 과정>과 <꿈속의 신>도 스파크 에디션이 디자인했다. 그런데 표지 디자인 시안에 의견이 분분했다. 미술 이론 잡지 같다고.

하지만 나는 <쾅> 얘기를 하면서 언급했듯이, '만화의 지형도를 넓히는 제안'의 기능이 디자인에 담기길 바랐다. 만화책은 이래야 한다는 편견을 잡지나 단행본을 만들 때마다 깨고 싶어서.

그래서 <조형의 과정> 표지를 봤을 때 마음에 들었다. 또 반대로 <꿈속의 신>은 전형적인 만화 같아서 균형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단편집이 나오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렸다. 2012년 작품인 <00시 00분>부터 2015년 작품인 <조형의 과정>까지 한권에 묶었다. 이렇게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최재훈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첫 번째는 <쾅>에 있는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이, 이걸 해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해서, 어느 정도 생계를 희생할지언정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약간 고료가 모자라든지 경제적 상황이 안 되더라도 하고 싶은 비전이 있으면 작업을 한
다.

또 하나는 개인적으로 만화가 너무 좋다. 팬으로서도 좋고 작업을 하는 것도 좋다. 앞으로도 장편과 단편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싶다.

그런 마음이 두 권의 책에 담긴 것 같다. <조형의 과정> 같은 경우는 내가 고민했던 만화적 실험들, 제안들, 해보고 싶었던 경로가 담겨있다고 해야 할까.

 

<꿈속의 신> 작업 기간은 얼마나 되나?

 

최재훈 2년 정도 되는데, 다른 일을 하면서 조금씩 시간을 내서 했기 때문에 오래 걸렸다. 그래도 장편을 꼭 해보고 싶었다.

웹툰도 준비하고 싶다. 장편이 하고 싶어서.
 


<꿈속의 신>은 얼마만큼의 분량을 생각하고 있나?

 

최재훈 2권에서 끝낼 생각이다. 대신 2권을 더 두껍게 출간할 예정이다.


 

 

<꿈속의 신>의 한 장면. 근 미래를 배경으로,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장치와 의문의 종교단체, 수상한 기업에 얽힌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준비 중이라는 웹툰에 대해 더 듣고 싶다.

 

최재훈 시나리오 쓰고 있는 친구랑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좀 지지부진해서 오래 걸리고 있다. 계획대로였으면 작년에 연재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장르는 '19금 SF호러'다. 야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컬러풀한 웹툰이 주목 받는 시대 흑백 출판만화를 작업하는 이유가 있나? 오히려 특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최재훈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만화 미학은 흑백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준비하는 웹툰도 그렇고 부분적인 컬러 사용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기본은 흑백이다.

 

나는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는 게 좋은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흑백은 기본적으로 컬러보다 정보가 적다. 그런 요소가 굉장히 중요하다.

펼친 페이지 안에서 여러 칸이 복합적으로 개연성 있게 나열되는 순간, 컬러보다 흑백에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라 흑백을 추구한다. 흑백은 내가 이야기하려는 주제들이 우울한 편이라 그런 분위기와도 맞아서 끌리는 것 같다.


작업할 때 어떤 도구를 이용하나.

 

최재훈 잉크와 펜을 쓴다. G펜, 둥근 펜, 마루 펜 등 여러 펜을 쓴다. 볼펜도 쓰긴 하지만 아무래도 펜이 제일 좋다.

펜은 가장 개성이 없는 도구다. 볼펜은 볼펜대로, 수성펜은 수성펜대로 특성이 있는데, 펜촉은 쓰는 사람에 따라 특성이 달라진다.

  

'얼굴', 혹은 '머리'를 소재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최재훈 특히 일러스트를 그릴 때 그렇다.

만화 같은 경우는 효율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편이다. 만화는 배경이나 시선 이동, 칸에 대한 활용 등이 중요하다. 하지만 효율적인 몰입을 유도하는 건, '인물과 얼굴 중심의 연출'이다.

 

물론 잘못하면 ‘대갈치기’처럼 보일 수 있어서 카메라 각도나, 빛, 구도의 기법으로 그것들을 다양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최재훈 작가의 사이트. 두상과 조형을 흑백으로 표현한 그림들이 눈에 띈다.





 

작품 자체에서 추구하는 바는.

 

최재훈 작가들이 다 그렇겠지만 특별한 뭔가에 반응하게 되지 않나. 내가 반응하는 건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외면하는 것들, 덮어놓으려고 하는 것들이다. 죽음이나 공포, 혐오 같은 것들.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중요한 것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재밌게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그걸 만화 미학적, 조형적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것 같다.

최재훈 이야기적으로는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외면하는 것들을 소재 삼는다. 그것들을 만화 미학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야기가 꼭 만화여야 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연출과 컷도 마찬가지다.


단편들을 모아둔 <조형의 과정>에서 그런 의도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최재훈<조형의 과정>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소리의 조각>같은 경우에는 기호와 이미지를 이야기와 결합한 형태인데, 만화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편 <조형의 과정>에서의 조형들도 마찬가지고. 이런 조형들이 각각의 이야기와 얼마만큼의 개연성을 갖고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들. <불타고 달리는>도 그렇고.

 



<소리의 조각>(위), <조형의 과정>(아래)의 한 장면. 흑백의 조형적 이미지와 전통적인 만화적 연출이 어우러진다.

 

 

 

앞서 말했지만 플랫폼이나 출판사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제작과 홍보를 한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하다. 이 두 작품은 어떻게 유통되고 있나?

 

최재훈 <쾅>이 창작 집단이면서 출판사니까. 온라인 서점에 유통하고 있고, 오프라인 서점에도 출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출판사로서의 <쾅>은 가능하면 최소화하려고 한다. 왜냐면 재미가 없어져서다.

작가들끼리 모여서 작업 얘기하는 게 좋지 유통이나 세금 얘기하는 건 재미없다. 다 같이 모여서 회의할 때에도 실무 얘기는 가장 나중에 얘기한다. 가장 피곤할 때.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최재훈 정말 하고 싶은 건 스페이스 오페라다. 5년 전부터 쓰고 있는 이야기인데, 몇 권이 될지도 모르겠는, 굉장히 긴 이야기다.

한국에선 꾸준히 사랑받고 누구나 아는 작품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듄>이나 <반지의 제왕>, <닥터후> 같은. 한국엔 왜 그런 게 없을까 싶어서.

물론 <아기공룡 둘리>나 <뽀로로> 같은 작품들이 있지만 성인을 위한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걸 꼭 마흔이 되기 전에 시작하고 싶다.



 

'만화 미학은 흑백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만화 미학에 대해 묻자 사뭇 진지하게 대답하는 최재훈 작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씬'

만화가 기본적으로 대중 매체다 보니, 상대적으로 독자 수가 적은 독립 만화의 목표가 궁금하다.

 

최재훈 <쾅>이 비주류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비주류라는 건 전체 시장을 10이라고 했을 때 그 중 1에 해당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전 세계 시장을 100이라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중에 비주류가 10이라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비슷한 크기의 시장이다.

비주류로서 어떤 생존 전략을 세울 것이며, '씬'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힌트가 되지 않을까.

최근에 illion과 이와이 슌지도 그렇고, 일본, 미국, 유럽에서 협업 연락이 온다. 그들이 나의 한국에서의 위상을 생각해서 연락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원화를 산다는 것이 미술관이나 작업실에 가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작가가 직접 SNS로 연락을 받는다.


지금은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개성이 있고 열심히만 한다면 알려지는 게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재밌는 시대다.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작가들이지만 독립적이지만은 않은 네트워크가 만들어졌으니까. 이건 플랫폼이나 매체와는 다른 것이다.

 

다른 작가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나.

 

최재훈 SNS에서 연락을 하거나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려고 한다.

작가들이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고 스스로 홍보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떤 '씬'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씬을 만드는 것은 작가들끼리의 교류다. 관객이나 독자들이 그런 것을 보면서 유입되고 점점 저변이 넓어질 거라 기대한다.

 

어떤 '씬'이란 무엇인가?

최재훈 인디나 독립만화 씬이 아니고, 아직 이름 붙이기 어려운 규명되지 않은 씬이다.

신모래 작가나 김인엽 작가, 류경호텔의 류경호 작가, ㅇㅇㅇ작가들의 작업을 보면 일러스트이면서 동시에 만화다. 그들은 만화가이자 작가이다.

그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시기인데,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이 씬은 분명 존재한다. 이에 대해 이름 붙이거나 고민할 수 있다는 거다.

 

한 작가로서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씬 자체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최재훈 씬이 필요한 이유는, 작가들이 같은 걸 느껴도 홀로 일하면 힘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개인 작업을 하면서 출판만화, <쾅>, 씬에 대한 네트워크 등에 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인터뷰하는 동안, 최재훈 작가가 만화의 모든 일에 열정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커피 슬리브에 적힌 문구가 묘하게 어울렸다. '책은 문화의 뿌리이자 그 결과이다.'





YOUR MANAⒸ선우훈

 

최재훈 작가 사이트(링크)
쾅(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