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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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선택>의 유도리 작가

인터뷰

<판도라의 선택> 유도리 작가
“서양 시대물을 그리는 건 내 시선으로 그들의 역사를 재현하면서 스스로의 통제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로카
사진 전수만

 


피부가 노랗고 못생긴 여자아이인 판도라가 19세기 미국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는 이야기, <판도라의 선택>의 유도리 작가를 만났다.

어떤 경험과 상상을 질료삼아 판도라가 살아가는 머나먼 시공간을 재구성했는지를 들었다.


 

             


 

"여성 서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썩 괜찮은 만화를 그려내겠다는 오기가 있었다."


 


미국 미술 작업에서 한국 웹툰 데뷔로


제 2회 레진코믹스 세계만화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웹툰 작가로 데뷔했다. 소감은?

유도리
일단 상금을 받아서 너무 기쁘다. 죽을 만큼 바빠진 덕분에 이젠 술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밖에 안 마신다.


수상 후 연재까지는 얼마나 걸렸나?

유도리
작년 3월에 수상하고 10월에 연재를 시작했다. 반 년 정도 걸렸다.


잘 되어 가는지.

유도리
중학교 때 애니고 입시 경험을 빼면 만화 자체가 처음이다. 그런 것 치곤 작업 방식이 잘 자리 잡았다.


작화나 연출의 완성도를 보고 미술 전공자라고 생각했다.

유도리
<판도라의 선택>은 그림을 잘 그린 만화지만 그런 걸 좋아하진 않는다.

서구 사회가 생각하는 망가 스테레오타입에 맞지 않게 잘 그린 만화를 하나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인 남성 기득권이 무시할 수 없게.


'잘 그린 그림'으로 평가되기를 선택한 것인가.

유도리 백인 기득권이 유색인종, 특히 여성 서사에 기대하는 그림 양식은 사실 정해져 있다.
못 그린 듯하면서 '진솔'한 그림이다.

그래야만 페미니즘이 약속된 기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주류 서사를 위협할 수 없게 되니까.

여성 서사에 관심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썩 괜찮은 만화를 그려내겠다는 오기가 있었다. 그림을 진짜 잘 그리는 애가 계속 여자 얘길 해서 그들이 '빡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어떤 작업을 했나?

유도리 이십대 초반에는 인문대학에 다니면서 혼자 그림을 그렸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다.

클라이언트들은 늘 '예쁜' 여자를, 그러니까 마르고 하얗고 눈이 큰 여자를 그리길 요구했지만 그런 걸 그리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는 사람이 역사적 맥락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 불편함을 유발하고자 했는지 궁금하다.

유도리 작업의 가장 큰 테마는 몸의 제스처가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읽히는가였다.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서구적 시선이란 과연 완전무결한가, 그 시선 속의 틈새를 동양인 여성은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 것인가 등.


비정상과 정상의 규정이란 무슨 뜻인지 설명 부탁한다.

유도리
예를 들면 몸무게가 어느 정도 나가야 정상인지, 팔다리가 몇 개씩 있어야 정상인지,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적절한지.


원하는 대로 된 적이 있나?

유도리
나는 많이 시도했는데 상대가 안 빡쳐해서 실패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제대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엄청나게 우울했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것을 전부 소진했는데 의도는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으니까. 매일 술만 먹으면서 지내던 중 낙태를 했다.

이모한테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런 일로 죽었으면 한국 여자 반은 이미 죽고 없을 텐데?”라고 웃어넘겨서, 분노 때문에 못 죽었다.

이왕 살게 된 거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고, 지금은 안 죽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모랑은 굉장히 사이가 좋다.


최근에도 웹툰과 병행하는 일이 있나?

유도리
작년에는 섹스 긍정주의 페미니스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애니 스프링클의 오르가즘 지침서에 일러스트를 그렸다.

애니 스프링클은 80년대부터 포르노 배우로 일하며 성노동자의 인권과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에 대한 작업을 해온 사람이다. 4월에 책이 나온다.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한다.



 

 

<판도라의 선택>에 묘사된 19세기 미국의 저택. 작가는 “로코코 의자를 살 수는 없어도, 머리로 외워 버리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그 의자를 재현해낼 수 있으니까.” 라고 한다.



19세기 미국과 21세기 한국 사이에서



<판도라의 선택>은 19세기 미국 북동부를 배경으로 하는 만화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시공간은 아닌데, 당신은 그 시기 서구의 복식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 보인다.

유도리
사실 잘 모르는 시기고, 이걸 그리기 위해 공부했다.

이전부터 20세기 이전 서양 문화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긴 했다. 지식이라기보단 집착에 가깝다. 서양 장식사와 복식사는 거의 시대별로 외워 두고 있다. 



왜 지식에 집착했나?

유도리
내 삶은 아마도 쉽게 잊혀질 것이고, 나는 기록으로 남겨진 백인 상류층의 삶을 끊임없이 욕망할 것이다. 

서양 시대물을 그리는 건 내 시선으로 그들의 역사를 재현하면서 스스로의 통제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로코코 의자를 살 수는 없어도, 머리로 외워 버리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그 의자를 재현해낼 수 있으니까. '우월한 서양 문화'를 정신적으로 정복하고 소유해 버리는 거다.

하지만 물론 나는 동양인 여성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통제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도 지낸 적 있는지 궁금하다. 제 1세계에서 동양인 여성이 지니는 위치를 자각하기 전, 한국에서의 자신을 자각하는 방식은 달랐나?

유도리
한국에서는 꽤 가난하고 혹독하게 자랐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덜 맞을까, 뭘 하면 조금이라도 맛있는 걸 얻어먹을까 궁리하느라 슬플 새가 없었다.

그런데 TV를 켜면 이층집에서 아침 식사로 토스트랑 커피를 먹는 사람들이 나왔다. 부러웠다.

내가 맞은 걸로는 안 울어도 세일러문의 친구들이 죽을 때는 펑펑 울었다. 서양 문화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존엄성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나보다.

십대 때는 플라톤, 헤르만 헤세, 쇼펜하우어, 셰익스피어, 중요하다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들의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다.


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

유도리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때 마침 집안 형편이 좋아져서 갔다.

서양 문명이 생각하던 것처럼 빈틈없이 짜인 견고한 요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미국인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은 더러운 집에 살면서 자식들을 때린다. 중부 시골 고등학교에선 여학생이 남자처럼 입고 등교했다가 쫓겨나기도 한다. 거기서조차 나는 주변부 인물이었지만.


후회했나?

유도리
인생에 후회하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대학은 좀 달랐을 것 같다.

어쨌든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반종교적이고 퀴어 프렌들리했다.


그 곳에서 지낸 것이 지금 스스로가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끼쳤나? 그 점이 본인 작품 세계의 큰 축이 되고 있는데.

유도리
한국에 있을 때는 오히려 백인 여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어를 아무리 잘 해도 억양이 귀여운 동양인 여자였다. 교수들은 내가 똑똑하고 사교적이며 폭력에서 살아남은 동양 여자이길 원했다.




크리스를 따라 미국으로 온 베로니카는 '장애를 가진 동양인 여자가 남자 하나만 믿고 덜커덕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완전 개털인 상황'을 마주한다.


 

<판도라의 선택>을 그리게 된 직접적 계기가 궁금하다.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라거나, 참고가 된 작품 등. 영향을 준 실존 인물이 혹시 있는지?

유도리
작중 마을과 비슷한 곳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자아이들과 하는 화장실 뒷담화가 뭔지 배웠고, 내 얼굴이 동양인 같아서 귀엽고 예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때쯤부터 교복 치마를 짧게 줄였다. 여자의 성적 매력을 권력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한 거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머무르던 집의 여자는 독실한 혼전순결주의 개신교도였고, 내 옷차림이 너무 창녀 같다고 자주 혼냈다.

이 집 가족과 만난 것은 그들이 내가 보낸 자기소개서와 사진을 보고 날 선택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과정이 전근대적 결혼제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직접적 계기로 들린다.

유도리
그런 환경에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베로니카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동양인 여자가 남자 하나만 믿고 덜커덕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완전 개털인 상황.


그 과정에서 참고한 역사적 실존인물도 있는지?

유도리
그보단 주변에 베로니카 같은 언니들이 많았다. 판도라를 구상할 때는 어릴 때 내가 했던 행동이나 부모님에게 들은 말이 영향을 끼쳤다.


앞에서 이 시기를 특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 때를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유도리
우리가 생각하는 백인 사회의 기준과 근대적 개념들이 이제 막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시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보편적 가치지만 당시 공화국이 된 지 얼마 안 된 미국 사람들에게는 꽤 생소한 개념이었다.

미국인들은 실제로 피식민적 정서, 그러니까 유럽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이 시기는 동서양의 관계에도 확고한 제국주의적 질서가 정립되기 전이다.

1790년대에 영국의 맥카트니 경이 중국의 건륭제에게 무역을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까인 일이 있다. 이건 보호 차원의 쇄국 정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건륭제는 정말로 유럽이 우스웠을 테니까.

즉 서양은 아직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 아니었고, 미국 역시 '서양 세계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던 때다.


이 세계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곳이라고 파악하고 있는가?

유도리
<판도라의 선택>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리본과 프릴이 가득한 서양임과 동시에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서양의 빈틈이다.


 



여성의 삶, 소수자의 삶


가족과 여성이 작품의 큰 주제다.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해 긍정적인 편인가?

유도리
어쨌든 사람은 외로우니까 서로를 속이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붙어있는 게 혼자 사는 것보다는 낫고, 그게 결국 사랑이다.

사랑을 숭고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가족 제도는 어쩌면 이런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제도다.


여자의 삶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유도리
그 안에서 여자의 삶을 조명하고 싶은 건 내가 여자이고 여자의 삶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걸 그린다는 이상의 사명의식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토론에서 이기거나 정책을 수정하는 게 아니다. 삶을 재현하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


최근 휴재분에서 자신의 작품을 '기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에 동의할 수 없다.

유도리
동양인 여자가 19세기 미국에 엄청 집착해서 그리게 된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넓은 의미의 기록이라면,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맥베스>의 인용 장면. 작가는 <맥베스>가 '나쁜 여자가 자기를 버린 세계에게 어떻게 보복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여성과 출산이라는 테마를 위해 <맥베스>를 테제로 다루는데, 독자들을 위해 본인이 읽은 <맥베스>에 대해 간단히 말해 줄 수 있을까.

유도리
일단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 보통 셰셰익스피어는 백인 문학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19세기 이후에 해롤드 블룸 등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그 당시의 잘 만들어진 예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퀴어, 낙태, 이교도 같은 소재를 많이 다뤘고, 정치적인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을 재현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떻게 화형을 피했을까. 그게 궁금하다. 그 사람을 롤 모델로 삼고 있다.


그래서, <맥베스>의 경우는 무엇이 흥미로운가?

유도리
그 안에서 젠더가 분명하게 그려지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여자가 낙태한 것이 암시되는데 절대 낙태했다고 얘기되지는 않는 점.


<맥베스>를 이야기할 때 낙태는 보통 언급되지 않는다.

유도리
아이가 죽었다는 것 자체는 메이저인 해석이다. 여자는 남자한테 죽은 아기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남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맥베스>는 나쁜 여자가 자기를 버린 세계에게 어떻게 보복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맥베스 부인도 그렇고 마녀들도 그렇다. 뭘 극복해보자는 희망도 없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도 없고 그냥 분탕질이 치고 싶은 거다.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인물간의 유동적 역학 관계


작중에서 판도라 이외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인공 이외에 가장 흥미를 갖고 창조한 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유도리
빅터다. 작중에서 가장 바깥세상과 가까이 닿아있는 사람이다. 판도라나 크리스와는 달리, 자기가 망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걸 계속해서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세균학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절, 의사로 일하는 빅터.



굳이 직업이 의사인 이유는?
 

유도리 서양 의학의 역사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도 인륜적이지도 못한데, 빅터는 그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이 합리적이고 인륜적이라고 주장한다.



판도라가 어떤 방식으로든 주변 인물들에게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힘을 주어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유도리 과연 능동적일까? 판도라는 그냥 성격이 더러운 어린이이고 자기 자신의 분노에 대응하기도 바쁜 인물이다.


그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가는 주변 인물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최근의 휴재공지에서 묘사된 판도라와 크리스.




최근 휴재공지에서 판도라가 단순히 억압받는 유색인종 여성의 전형이 아닌 캐릭터라고 했다. 또 크리스 역시 억압적인 백인 남성의 전형이 아니라고.

유도리 
무조건적으로 악랄하기만 한 가해자와 순결한 피해자의 관계는 너무 간편하다.

폭력에 대한 담론은 젠더 이분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급, 인종, 국적, 문화 등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판도라와 판도라의 친척들. 분명 좋은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판도라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판도라의 성격이 어떻든 판도라가 억압받고 차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판도라가 아빠보다 얼마나 세게 말할 수 있든, 아빠를 때릴 수 있든 아니든, 크리스가 판도라보다 권력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지점은 어떻게 다루고자 하는가?


유도리 그건 당연히 그렇다. 너무 할 말이 없게 당연한 말이라서 정말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판도라를 향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느냐'와 '판도라가 그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규정할 것인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또 '판도라가 피해자의 전형인가, 피해자의 전형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가' 역시 다른 문제이다.

<판도라의 선택>은 꽤 전형적인 제 4의 물결적인 서사이고, 일방적으로 피해자의 고통을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그 안에 개인의 다이내믹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한국 웹툰 시장의 독자들은 어떻게 읽으리라 예상했는가?

유도리 꽤 전형적인 제4물결 페미니즘 서사니까 그렇게 읽히겠지 정도.

의외로 베로니카나 판도라가 깽판 치는 것 자체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독자가 더 많으려나.

나는 사실 전반적으로 꽤 웃긴 만화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이 웃긴가?

유도리 어린 여자애가 아빠를 패고, 의사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아내랑 남편은 말을 안 하고, 제정신인 사람이 없으니까.


반응에는 많이 신경쓰는 편인지.

유도리 연재를 끝나고 이런 부분이 부족했다고 하는 건 도움이 되겠지만, 과정 안에서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별로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던 기억도 있어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편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남의 말에 휩쓸리는 게 작업에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다.


위안부, 소아성애, 한일 합병 과거에 그렸던 그림이나 행적이 SNS에서 이야기됐었다. 이에 대해 말해 주었으면 한다.

유도리 나는 정상과 비정상이 어떻게 읽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항상 해 왔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불편함을 느껴야 하고 그게 맞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규범은 서구적이다. 그에 대한 불편함을 느꼈으면 한다.




유도리 작가의 작업 1.



 

위안부를 성애화해 그렸다고 논란이 된 그림의 경우는 어떤가?

유도리 일단 위안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한국 여성들은 일제 강점기뿐만이 아니라 20세기 전반부에 그와 비슷한 의상을 꾸준히 입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자아이의 신체에 가해진 폭력'에 대한 직접적 표현도 없다. 허벅지에 피 한 방울이 묻어 있는데, 물리적 폭력의 증거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아이는 서럽게 울고 있다. 그런 점이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유도리 작가의 작업 2.

 

소아성애를 미화했다고 평가되는 그림은 어떤가?

유도리
나는 소아성애적으로 '읽힐 수도 있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고, 그와 별개로 미성년자 대상 범죄를 옹호하거나 지지한 적이 없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소아성애가 아니라 미성년자의 성욕과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한국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성에 대한 공포를 주입받았다. 어른들은 항상 강간을 당하는 게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 일인지만 강조했다.

미국에서는 노출이 있는 옷을 입었다가 성희롱을 당했더니 주변에서 "네가 옷을 그렇게 입었으니 매춘부로 착각했나 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중학생 여자아이가 대학생 오빠와 연애하는 내용의 순정만화는 항상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유도리 작가의 작업 3.

 

 

나는 일러스트 안에 나의 역사와 정체성을 최대한 타자화하고 왜곡한 상태로 재현한다. 물론 단편적 이미지에는 명백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는 몸의 제스처를 무엇으로 읽을 것인가는 보는 사람의 몫이다. 



 

유도리 작가의 작업 4(SNS와 함께 캡처된 화면을 찾을 수 있었다).

 

 

한일합병을 야오이의 포맷으로 표현한 그림의 경우는 어떤가? 대학에서 과제로 작업한 그림으로 알고 있다.

유도리
맞다. 상정한 감상자는 백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뉴욕 예술계였다. 백인 사회가 계속해서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폭력의 역사를, 90년대 야오이 양식을 빌어서 최대한 자극적이고 멜로드라마틱하게 재현했다.


화풍은 고전적인 일본 야오이의 형태를 취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유도리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 만화와 그들이 보여주는 폭력, 그들이 보여주는 백인스러운 외모를 주입 당하듯 보고 자라 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안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일본 만화가 재현하는 금발과 벽안 등 '백인스러운' 것이 우월하다고 느끼면서 자랐다. 그런데 어른들은 우리 세대에게 ‘일본 문화를 소비하지 말 것’만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했다.

그걸 재생산함으로서 무언가를 비웃고 싶었다.


왜 '야오이'여야 했나?

유도리
제국주의 자체가 남자들의 땅따먹기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야오이는 게이 문학과 전혀 상관없는, 남성 중심 동성 사회에 대한 판타지다.

여성이라고 규정되는 몸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남자들만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노력이다.

또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지워지는 반면, '유린당한 모국'이나 '순수하고 가련한 위안부', '고아 소녀' 같은 이미지는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에도 유관순의 업적보단 유관순이 어떻게 고문당하고 죽었는지에 더 집중했다. 결국 여자는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남자의 몸과 언어를 빌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많은 여자들이 남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항상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국가 혹은 남성 권력체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할 것을 요구받아 왔다. 

또 야오이의 의미가 '의미 없음, 절정 없음, 결말 없음'이라는 것, 그 이름이 역설적이게도 서구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서사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상에 부합한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나.


게임의 한 장면으로 보였다.

유도리
시뮬레이션 게임 형식으로 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방향적 서사 전개가 가능하다.


아까 독자 반응을 웬만하면 읽지 않는다고 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나?

유도리
그렇다. 비난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일이다.

예전에는 벽을 보고 소리 지르는 기분이었다. 백인 여자가 장난감처럼 끼고 있는 동양인 시종을 그려도 다들 예쁘다고만 했다. 불편해야 하는데.

지금은 불편함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그 불편함을 토대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보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다.

북미에선 1980년대에도 포르노를 만들어도 되느냐를 놓고 싸웠고, 지금도 킴 카다시안이 과연 페미니즘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싸운다.

그런 싸움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과정 속에서 상처 받고 불이익을 받는 사람은 많겠지만 무의미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보다는 대화가 오가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나는 일러스트 안에 나의 역사와 정체성을 최대한 타자화하고 왜곡한 상태로 재현한다. (…) 지금은 불편함을 인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후의 계획


작업 사이클은 어떻게 되나.

유도리
주 5-6일 정도 작업과 관련된 일을 한다. 아주 신나면 펜터치하는 데 이틀도 안 걸리기도 하고, 피곤하면 사흘 넘게 걸리기도 한다.


몇 화 완결 계획인가?

유도리
40화는 안 넘기고 싶은데 분량 조절을 못 할까봐 너무 무섭다.


레진코믹스에서 출판할 계획이라고.

유도리
맞다. 아직 자세한 일정은 없다.


총 몇 권인가?

유도리 아마 2권.


 

해외 진출을 언급했는데, 그에 대한 계획도 말해 줄 수 있나.

유도리 늦어도 4월 전에는 레진코믹스에서 영문판이 오픈될 예정이고, 북미 출판은 일단 번역이 끝나야 가능하다. 번역은 직접 할 계획이다.


계속해서 웹툰을 할 것인지. 이후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미래에 대해.

유도리 취집해서 잘 먹고 잘 살기?

동양인 여성의 몸이 존재하는 서사나 이미지는 당분간 안 만든다. 그 똑같은 얼굴 좀 그만 그리고 싶다.

몸을 물리적인 형태로 재현하는 이상 남성적 시선에 소비당할 수밖에 없다. 보다 능동적으로 동양인 여성의 몸을 지워버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사실 그러려고 야오이를 그렸었는데, 하다 망해서 다시 <판도라의 선택>으로 돌아갔다.


차기작 계획도 있나?

유도리
웹툰을 그린다면 이두형 접합쌍둥이 소년들이 비교적 사소한 경범죄로 재판을 받는 법정 드라마를 그리고 싶다.

시민사회가 정의하는 개인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서양의학은 어떤 기준으로 이상신체를 규정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 이미 결말까지 생각해서 적어뒀다.

아니면 이아고와 로데리고의 관계를 중심으로 <오셀로> 패러디 야오이 만화를 그리거나.

기독교 사회에서 밀려난 남자들 사이의 권력 구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셰익스피어는 서양 문학사 최고의 메이저 팬덤 중 하나라서, 내가 뭐라고 지껄이든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최고의 합법적 분탕질이 될 수 있다.


늘 분탕을 찾는 사람인 것 같다.

유도리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을 재현하는 시선은 나의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을 어떻게 읽어도 내가 통제할 수 없으니까 분탕질이 되는 거겠지. 

 


 

             



 

긴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많아 인터뷰가 길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유도리 작가는 하고자 하는 말이 많았고, 그 말을 전부터 정리해 둔 것으로 보였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는 21세기 한국과 19세기 미국 사이에 서는 바탕이 된 개인적 경험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의미있는 이야기다. 동양인 여성으로서 경계를 넘나드는 의미를 듣고 전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즐겁다.

개인이 인종과 젠더로 인해 놓이는 정치적 위치는 정해져 있으나, 그의 말마따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소수자는 주어진 한계 안에서 스스로를 무엇으로 규정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선택할 수 있다. 단순한 흑백논리를 따르지 않는, 섬세하고 다양한 정치적 구도를 제시하는 작품이 더 많이 필요하며 우리는 계속 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가 불편한 작가가 되기 위해 작품으로 또 어떤 '분탕질'을 저지를지 계속 지켜보고 싶다. 판단은 개인의 몫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고, <판도라의 선택>은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입체적 역동을 다소 비틀린 방식으로 재현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가 더욱 첨예한 판단을 요구하는 작품을 선보이기를 기대한다.








YOUR MANAⒸ로카


 


<판도라의 선택>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