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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mIT!!!›의 스토리 작가 전혜진

인터뷰

‹PermIT!!!›의  스토리 작가 전혜진
순정만화의 독자는 소녀다. 성장하는, 다른 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녀.



 

손지상
사진 전수만


 

 

비 오는 오후, 홍대 앞 커피숍 2층.

인터뷰하는 데 실내 음악이 방해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전혜진 작가가 도착했다. 간식과 함께(만세).


 

 
 


스토리 작가 전혜진은 소설가로 데뷔한 이후, 만화 스토리와 소설을 넘나들며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스토리를 담당하고 있는 웹툰 ‹PermIT!!!›을 COMICO(링크)에서 연재 중이다.



공대개그 4컷 만화 ‹PermIT!!!(펌잇)›의 이야기는 주인공 이진수가 친구 정현철을 따라 인현공대에 입학해 악명높은 해킹 동아리 'PermIT'에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주인공 이진수와 등장인물들을 보자. 동아리 '회장', 회장과의 악연으로 고생하는 우등생 '마사', 회장의 동생이자 2학년 과 톱인 '루아', 기계공학과 신입생 '아름이' 등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작가는 이런 청춘 군상이 겪는 대학생활을 풍부한 패러디와 달콤 쌉쌀한 현실을 엮어 선보인다.

 

일반적인 패러디는 ‘바로가기 아이콘’처럼 느껴질 정도로 특정한 문화 코드를 떠올리게 한다. 독자와 작가가 동지의식으로 묶이며, 현실과 떨어진 ‘그들만 아는 리얼리티’를 향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패러디는 뭔가 다르다. 스토리 작가 전혜진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우리가 경험해오고,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리얼’을 전달하기 위해 패러디를 사용한다. 인천의 과거와 현재, 대학생의 일상, 공대 여학생이 겪는 여성혐오라는 이야기를.


전혜진 작가에게 물었다. 출판 만화와 웹툰의 관계,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지금 여기의 리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1. 패러디와 현실


‹PermIT!!!›은 어떤 과정을 거치며 탄생하게 되었나?

전혜진
 내가 인하대학교 수학과를 다니며 공대 수업을 두 개 듣고 있을 때니까, 피시통신 시절 이야기다.

그때 나우누리 만화 스토리 모임에 습작한 조각 글을 가끔 올리곤 했다. 인하대학교 컴퓨터과를 배경으로 한 개그만화 스토리였다.

몇 년 뒤, 대원씨아이에서 신작 아이디어가 있는지 물어왔다. 그때의 조각 글로 콘티를 만들었는데, '미소년전사 하이바맨'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담당 편집자가 개인 사정으로 퇴사하면서, 4, 5화 정도 이어가다 연재가 중단되었다. 연재 분량이 적어서 출판도 흐지부지됐다.



우여곡절 끝에, 공대에서 벌어지는 코미디는 ‹PermIT!!!›으로 결실을 보게 됐다.

 
 
 

‹PermIT!!!›(글/전혜진, 그림/이수현)은 전혜진 스토리 작가가 묵혀둔 '공대 코미디'였다. 이수현 그림 작가와의 인연으로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PermIT과 비슷한 대학 시절을 보냈나?


전혜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예전에는 LUG(리눅스 사용자 모임 Linux User Group)에서 활동했었고, 해킹 동아리에 있었던 적도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인하대 교내 해킹대회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었다. 다양한 패러디도 그때 장난치던 것의 연장선에 있다.

그래도 permIT의 회장처럼 해킹을 해대지는 않았다. 현실에서 그렇게 해킹을 해대면 큰일 난다. 회장도 제 입으로도 “들킬 범죄는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하잖는가?

 

 
 
 
 


현실감을 살리면서 연재 중단의 현실적 문제까지 고려한 '신검' 에피소드.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현실 반영이 두드러진다. 특히 주인공 이진수와 친구 정현철의 신검(병역판정검사) 에피소드는 상세하게 소개된다.

전혜진
신검은 매우 중요하다. 안정적인 결말을 위해!

작품이 계속 중단되는 경험을 했었다. 조금씩 스토리 올리던 피시통신이 문 닫았고, 연재하던 만화가 중단되고. 그런데 혹시라도 COMICO까지 문 닫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언제 중단되더라도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려고 신검 에피소드를 넣었다. 설령 불상사가 생기면, 진수와 현철이를 군대로 보내면 되니까!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리얼리티를 위해 꼭 필요했다. 우리나라 젊은 남자라면 신검을 받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디테일을 위해 병무청에 요청, 신검 절차에 대한 사진 자료도 받았다.

 


인물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인지, 진수는 항상 수동적으로 나온다. 인현공대도 친구 현철이를 따라 입학했으니. 루아의 마음을 얻으려고 중력머신을 몇 번이고 타는 현철이를 보며 “저렇게 까지 하면서 연애를 해야 하나?”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전혜진
(웃음) 그게 정상인이다! 

기인이 잔뜩인
‹PermIT!!!›에서 진수랑 진수 엄마가 가장 제정신이다.진수 엄마는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엄마다. 공부에 관심도 많고, 술도 잘 먹고.


160화 이후 드디어 진수가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파이썬을 공부해볼까 하면서.

전혜진
(웃음) 지금까지 진수는 주변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꾸준히 변화해 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학교 1학년이 이루어낼 수 있는 변화와 성취는 뻔하다.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제약이 있으니까. 진수는 현실적인 성장과 변화를 보일 거다. 


그 부분마저 현실적이다.

전혜진
현실 반영을 한다지만, 진수와 현철이를 비롯해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좋다. 교수님들도 보통 교수님들보다 학생에게 관심도 많고. 회장의 ‘싸이코’ 같은 짓을 그냥 둘리도 없다. 

어디까지나 판타지다.


그 말을 들으니 ‹PermIT!!!›은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는 판타지처럼 보인다.

전혜진
현실반영적인 내용은 일부러 넣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즐거운 이야기만 하면 좀 아쉽다. 

내가 그동안 써온 작품 모두에 공통되는 이야기인데, 물론 독자가 웃고 즐기는 게 제일 좋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도 뭔가가 남았으면 한다. 

예전에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이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리는 기억 안 나고 캐릭터만 기억 난다. 현실적인 내용이 없어서다. 당시에도 그런 대학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싫었다.

'논스톱' 보다 이전인 90년대 초반 대학생활을 다룬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마냥 신나고 즐거운 이야기만 하지 않고, 친구 부모님이 병에 걸리거나, 등록금이나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논스톱'을 보며 “이건 퇴보가 아닐까?”라고 느꼈다.

 


대학생활을 코미디로 다룰 때도, 현실의 반영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혜진 현실 대학생의 삶은 결코 편하지 않다. 힘들고, 졸업해도 취직이 막막한데, 작품이 마냥 즐겁기만 하면 그건 기만이다. 현실의 이야기도 즐거운 이야기 만큼이나 다루고 싶다.

 

만약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었으면 더 쉬운 방법이 있다. <논스톱> 시절 1990년대 중반으로 시공간 배경을 옮기고, 철저히 개그만화로만 그리면 된다. 현재 상황을 조사할 필요도 없고, 관련 책을 구해다 볼 필요도 없겠지. 



2. 공대생으로, 공대생 여학생으로 산다는 것


자기중심적이고 유아적인 남성의 행동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전혜진 루아가 조별과제로 갈등하고 허위소문을 퍼트린 선배들과 대립하는 시퀀스가 진행될 때 ‘이 만화는 남혐만화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니, 근데 정말 억울한 게, 대한민국 만화 중에 이렇게 평균적으로 남자애들이 똑똑하고 평균 아이큐가 높게 나오는 웹툰이 또 있나? (웃음) 그런데도 남성혐오 아니냐는 쪽지나 댓글이 있었다.

 
 
 


 

익명으로 루아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린 일당 중 한 명. 아이디를 빌려줘 혼자 뒤집어쓰게 생기자, 자기도 피해자라며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해하는 모습.

 

 
 
 
루아가 조별과제 때문에 남자 선배들과 갈등하는 시퀀스가 길게 이어진다. 15화부터 90화까지.

전혜진
남자 선배들이 인터넷에 익명으로 루아에 관한 허위비방을 퍼트린다. 그러다 잡힌 남자 선배가 피해자인 루아에게 책임을 떠넘기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기 기분과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죄를 지었다니.
 

이런 에피소드는 관찰과 경험에서 유래한 것인가?

전혜진 물론 경험도 있다.

 


‘남혐’과 관련해 납득이 안 되는 댓글을 봤다. “아름이가 어장 관리하는 장면을 넣어서 균형을 맞춰야 평등하지 않느냐?”는.
 
전혜진 나도 그 댓글을 봤다. 당시 나는 임신 중이었는데, 아기의 태명이 ‘아름이’였다. 아름이가 구설수에 오르는 걸 남편이 안 좋아했다.

그래도 나는 “아니다, 공대 1학년 생으로 이렇게 저렇게 치이고, 피해를 보는 여학생을 그려야겠다.” 하고 그냥 써버렸다. 

아니 뭐, 남편이 어쩔 건가? (웃음)


으허허. 맞는 말이다. 본인이 콘티 그려줄 것도 아니고. (웃음)

전혜진
오탈자 하나 잡아줄 것도 아니고(단호).

 


네팔의 풍습인 ‘쿠마리 데비(쿠마리 여신)’은 어린 소녀를 여신으로 추대되었다가, 초경이 시작되면 불가촉천민으로 전락한다.

 



루아는 능력을 비하당하고 무시당하는 형태의 여성혐오를 겪었다. 그런데 아름이는 ‘여성숭배’라는 대상화의 여성혐오를 당한다.

전혜진
그래서 106화에서 ‘쿠마리’라고 하는 문화적 풍습을 소개했다.

어린 소녀를 아름답게 치장해 여신으로 모시는 풍습이다. 쿠마리는 자아나 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 행동은 억압당하고 의지는 금지당한 채 앉아있어야 한다. 떠받드는 대로 가만히. 표정 없이, 그저 인형처럼.

쿠마리는 생리를 하는 순간 가장 천한 존재로 전락한다. 순수한 소녀가 아니라 불결한 여자가 되었다는 거다.

여자에게 ‘너는 인형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순간, 끝장이다.’ 하고 으름장을 놓는 거지.


여성숭배를, 여성 비율이 적은 공대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라 볼 수 있을까?

전혜진
 여자가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몰리는 경우는 많다.

아름이와 루아는 단순히 공대 여학생이 아니라 특출난 존재다. 아름이는 과에서 손꼽히는 머리 좋은 애고, 루아는 과톱에 오빠가 악명높은 ‘permIT’의 회장이다. 

그런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일을 당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거다.

의외로 여학생들이 공대에서 성적이 좋은 경우가 많다. 남자들에게 치이니까 공부라도 열심히 하자는 애들도 있고, 진짜 경우에 따라서는 오빠들에게 과제를 부탁하거나 족보를 받아서 이용하는 애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성적을 얻는다. 영리하게 이용하는 애들도 있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애들도 있고, 다양한 타입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니까 당연히 공학적 지식 등은 모를 거라는 식의 취급을 받는다.


‘맨스플레인' 같은 건가.

전혜진
개인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나는 대학생 때 컴퓨터 수리하는 알바도 하고 학교 서버실 관리 알바도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용산에 가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당시에는 용산의 컴퓨터 업자를 ‘용팔이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손님을 속이거나 협박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여자 손님에겐 더 했다. 마우스도 못 고를 줄 알고, 메인보드의 ‘메’자만 꺼내도 ‘이 언니가 인터넷 검색 좀 하고 왔나 보네.’ 하는 식이다. 


 

 
 


루아 비방글 사건의 주모자인 남자 선배는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폭력을 휘두른다.

 

 
 


작품의 배경이 공대라 더 두드러져 보인 것이지, 여성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은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혜진
맞다. 그래도 루아나 아름이는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니 지혜롭게 넘기고 있잖나. 그러나 폭력에 대항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는 있다. 특히 물리적인 폭력에는.

루아와 대립하는 남자 선배를 함정에 빠뜨려 잡는 장면에서, 현철이가 남자 선배를 잡자 그 남자 선배가 주먹을 휘두른다.

물론 로맨스를 위한 장치이기는 하다. 현철이가 다치고, 이를 목격한 루아가 현철이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니까.

하지만 만약에 루아가 그 상황에 몰렸다고 생각해보시라. 그리고 과연 현실의 여학생이라면 실제로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과연 잘 대처할 수 있을지...

이 부분을 지적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읽었고, 그 한 명이라도 읽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대중문화에서 많이 보이는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가 서로의 가슴 사이즈를 의식하고 비교한다.’ 같은 편견에 반대하는 장면도 많이 나왔다.

전혜진
(불쑥) 경쟁을 해도 다이어트로 경쟁을 하지 무슨 가슴 크기로 경쟁을 한다고..! 


절묘하게도 그 에피소드 제목은 일본 대중문화 용어인 ‘백합’이지 않나. (웃음)

전혜진
하하하하! 
 

대중문화, 특히 웹툰에서 사회적 편견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필요가 있을까?

전혜진
나는 BL이나 남성향 에로도 가리지 않고 본다. 여성향이나 남성향에는 각자 지향하는 망상, 환상의 코드가 있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을 환상에 끼워 맞추려는 게 문제다.

만약에 어떤 여자가 BL물을 열심히 보고 나서, 세상 모든 남자가 서로 뚫고 뚫리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일이지 않나?

그런데 여자들이 서로 가슴 사이즈를 가지고 경쟁한다고 하는 왜곡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죄책감을 안 느낀다.

 


3. 웹툰과 출판만화

 

현재 작가로서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해왔다. 소설, 출판만화, 학습만화, 웹툰까지. 웹툰이 다른 매체와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지.

전혜진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얼마 전 부천만화축제에서 중국 웹툰관에 들어갔다가 나오지를 못했다. 놀라움이 커서.
 
중국이 인재풀도 많고, 시장도 크고, 역사적으로 활용할 소스나 콘텐츠도 많지 않은가? 그림의 질도 높더라. 국내 몇몇 사이트는 메인으로 걸어놓은 작품이 중국 작품이다. 

10년 후에는 한국 만화가 예전 대만 만화와 비슷한 처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만화의 성장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들려온다.

전혜진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출판만화와 웹툰을 비교할 때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웹툰은 지속적으로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공급도 늘고, 인터넷에만 있던 재야의 ‘존잘님’들을 많이 발굴했다. 특히 작년과 올해. 나는 그걸 ‘대웹툰시대’라 부른다. 아마추어 작가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제가 걱정스러운 건 이 부분이다.


좋은 현상 아닌가?

전혜진
작품은 작가가 만들지만, 상품은 편집자가 만드는 거다. 지금 웹툰계에는 좋은 작가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작가를 지원해줄 편집자는 얼마나 있는가, 이 부분이 가장 우려가 된다.

예를 들면 장편 연재를 시작하려면 보통 출판만화든 웹툰이든 설정을 미리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복선을 깔고 전개의 흐름을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동인지 활동을 주로 한 작가는 데뷔 준비를 할 때 이 부분이 약한 경우가 많다. 동인지는 분량도 짧고 기존 작품을 재해석하는 2차 창작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예전 출판만화의 경우 편집자와 함께 이 부분의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지금은 장편 연재를 위한 호흡을 알아서 익혀야 하는 상황인가?

전혜진
 그렇다. 중국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가 중국만큼 인구가 많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맞대응하기는 무리다. 그래서 일회성으로 ‘존잘’을 소비해버리는 건 아까운 게 아닌가 싶다.

소설화 작업에 참여하고 싶은 웹툰이 몇 작품 있다.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보인다. 연출이나 컷 배치 등이 지금도 좋지만, 능력 있는 편집자의 도움이 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현재 상황에서는 웹툰 작가가 출판만화 시스템을 한 번 경험해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문화사와는 아직 일을 해보지는 않았고 학산과 대원에서 일을 해봤는데, 대원 쪽의 경우는 계속 콘티를 고치게 하고 피드백을 준다.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이 빡빡한 콘티가 보이겠느냐?" 혹은 "화면에서 양면으로 봤을 때와 한 면으로 봤을 때는 연출의 느낌이 다르지 않겠느냐" 같은 조언. 이게 굉장히 공부가 된다.


콘티를 짜거나 할 때, 받는 피드백 중 구체적인 것을 꼽아본다면?

전혜진
예전에 <캔디 캔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 시절에는 보통 한 페이지당 세로 4단, 가로 3칸으로 나누었다. 큰 칸도 들어가니 8에서 12칸 정도로 나뉘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보는 시대다. 기본적으로 세로 3단이다. 중요한 장면은 한 페이지 안에 두세 칸으로 끝내라고 편집자가 조언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휑한 느낌도 있는데, 폰으로 볼 때는 이보다 더 작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다.

출판만화 편집부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종이, 모니터, 스마트폰 등 다양한 매체에서 볼 때 독자는 어떤 경험을 하는가. 작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웹툰 쪽에서도 이러한 연구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웹툰의 경우에는 페이지 구성이 아니라 스크롤로 길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니, 차이가 있겠다.

전혜진
화면에서 어떻게 보이느냐, 어떻게 연출하느냐는 웹툰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러 웹툰 포털은 스크롤 방식 이외에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스크롤 방식 웹툰 작품 중에는 종이책으로 보니 꽤나 심심한 인상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부분은 작가가 스스로 깨달으면 좋다. 하지만 작가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부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작가를 지원해 줄 편집부가 있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더 좋다.

가끔 다른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할 때도 있다. “작가는 다른 작가에게 배우는 것보다 편집자에게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면 분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4. 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페미니즘


마지막 질문이다. 199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에 관련해서.

전혜진
90년대는 한국 순정만화 역사에서 특이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잡지가 양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고, 많은 한국 순정만화 작가가 잡지를 통해 데뷔했다. <유어마나>를 지원하고 있는 거북이북스의 대표도 그 당시에 순정만화잡지 편집장이었다. 만화에 패러디가 많이 되었다. ‘안드로이드 강’ 캐릭터로. (웃음)

그리고 90년대는 작가의 학벌이 굉장히 올라간 시기라는 점도 독특하다. 예를 들면 유시진 작가는 서울대를, 천계영 작가는 이화여대를 나왔다. 고학력인데 만화가가 된다니, 하고 당시에 이슈가 된 적도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 연구는 1990년대 대학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영향이 한국 순정만화로 이어졌고, 다양한 내용과 테마를 작품에 담았다. 김혜린 작가의 <북해의 별>은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많이 주었고, 김진 작가의 작품은 철학적인 테마가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순정만화의 메인테마는 '사랑'이다. 그러나 그 근본에는 ‘소녀의 성장’이 있다. 이건 소년만화와도 통하는 구석이 있지만 표현되는 양상이 다르다. 

소년만화는 ‘아버지를 뛰어넘기’, ‘전설의 검을 손에 넣기’ 등의 형태로 표현되나, 순정만화는 ‘과거의 자신과 다른 나가 되기’로 표현된다.

아직도 이 땅에서는 소녀가 나 자신이 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작품에서 배경을 아예 다른 시공간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 박무직 작가의 책에서 “이 땅의 소녀들은 여기서는 꿈을 꿀 수 없으니 다른 세계로 간다.”는 글도 본 것 같다. 강경옥 작가의 <별빛 속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순정만화 속 소녀들은 사랑하기 위해, 역사 속에 휘말려 왔다. 역사의 격량에 맞서서 변화하고 성장하고.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비슷한 내용이다.


전혜진 황미나 작가의 <불새의 늪>도 그랬고, <굿바이 미스터 블랙>은 유명하다. 범죄자였던 소녀가 이름인 스완 그대로 백조처럼 변신한다.
 
궁극적으로, 순정만화란 소녀가 과거의 자신과 다른 나가 되는 과정이다. 과정의 일환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거다.

 

 
 
 
 
 


유시진 <쿨핫>의 한 장면


 

 


그 지점에서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는 거로 보인다.

전혜진
그렇다. 그 전에는 역사의 격류 등으로 빗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게, 90년대에는 더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면 유시진 작가의 <쿨핫>은 노골적인 페미니즘 이야기다.

가부장제의 모순이나,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동경이의 내적 고통 등. 동경이와 루다의 관계, 남자 캐릭터 간의 관계 등을 통해 성 소수자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진경 작가가 '나인'에서 연재한 <사춘기>도 그렇고... 결국, 소녀의 성장이다. 

소녀가 성장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이슈는 보통 '가정'이다. 그리고 '가정'은 대부분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과 연결된다.

저항 전략으로 아예 이정애 작가처럼 소년들의 탐미주의적인 사랑을 그리기도 한다.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이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와 같은 전략으로 보인다.

전혜진
그 외에도 다양한 전략이 있었다.


권교정 작가는 학원물에서는 밝고 즐거운 분위기를 보여줬지만, SF 등에서는 기존과는 다른 여성상을 제시하려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순정만화를 다루고 있는 사람이 90년대 순정만화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순정과 관계가 있는 20, 30대 작가군이라면 어린 시절에 본 순정 만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테마뿐만이 아니라 연출, 칸 나누기까지도.
 
예를 들면 <치즈 인 더 트랩>을 보다 보면 소년만화의 문법과는 다른 칸 나누기가 나올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아 이 작가는 순정만화잡지 <화이트>에서 연재된, 김진 작가의 <숲의 이름>을 좋아하겠군." 하고 생각한다. 나도 가끔 콘티 짜면서 공부 삼아 다시 보곤 한다.

90년대 작가군은 그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국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 오리지널리티 덕에,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의 분리를 이루지 않았나 생각한다.

요새 ‘작가가 독자를 생각해야지.’ 같은 말이 나오고 있는데, 순정만화의 독자는 소녀다. 성장하는, 다른 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녀. 

그런 독자를 위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순정만화 작가는 페미니즘적 시각을 갖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전혜진 작가는 순정만화 작가라면 페미니즘적 시각을 갖는 게 맞다고 믿는다.



 
               

 

 

흔히 오타쿠는 현실에서 도피해 가상 세계에만 몰두한다는 식의 비판을 듣는다. (나도 그런 편이다. 오타쿠니까.)
 
하지만 전혜진 작가는 훌륭한 오타쿠이면서도 현실사회의 다양한 부조리와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언제나 작품에 반영된다.
 

‹PermIT!!!›이 소위 ‘오타쿠’의 코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제한적인 문화코드로서의 한계를 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관심 덕분이 아닐까.
 
SF 작가 관련 모임에서 전혜진 작가를 이따금 만난다. 작가의 첫 딸 돌잔치 사회를 볼 정도로 개인적 친분이 있다 보니, 작품 이야기를 하기가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간 궁금했던 질문을 잔뜩 쏟아냈다.
 
그리고 좋은 대답을 얻었다. 독자에게도 유용한 답이 되리라 기대한다.

 
 
 

YOUR MANAⒸ손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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