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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의 윤태호 작가 1

인터뷰 1

<미생>의 윤태호 작가
“모든 균열은 내부의 조건이 완성한다.” 얼음이 바늘에 깨지는 이유는 얼음 내부의 요인 때문이지 바늘 때문은 아닙니다.

 
 

선우훈
사진 전수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수반된다.”
 
윤태호 작가가 인터뷰 중 자주한 얘기다. 그럼, ‘국민 웹툰 <미생>을 그린 작가’라는 이름도 그렇지 않을까?

그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 볼 수는 있지만, 이 ‘국민 웹툰 <미생>을 그린 작가’라는 한 줄 소개로는 지금까지 일관된 세계를 보여준 중견 만화가의 양면을 알기는 어렵다.
 
그가 어떤 사연과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어 왔는지는 많은 이야기로도 부족할 것이다. 짤막한 소개 너머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듣기 위해, 누룩미디어 사무실을 방문했다.

 
 



              


 

 

1. 근황에 대해

"얼굴 드러내고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싶어요."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윤태호 펜 작업할 때는 손목과 손가락만 아팠는데 태블릿으로 작업을 하니까 어깨까지 아프더라고요. 근육을 보강해야겠다 다짐했죠.

팔굽혀펴기하다가 뚝 소리가 났었어요. 별 거 아니겠지 하고 검도 훈련까지 했어요.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니 팔꿈치 근육이 찢어졌다고 하네요. 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로. 덕분에 <미생> 시즌2를 휴재 중입니다.


휴재중이라 인터뷰를 많이 하나요?
 
윤태호 <이끼> 때부터 많이 했어요. 제가 신인 작가인 줄 아는 분도 있었고, 상업 작가로서 토대가 불안정하다는 생각에 자기 ‘브랜드’를 갖추려고 인터뷰에 응했죠.

하루에 네 개, 다섯 개씩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는데 다 했습니다. 기업 경영에도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며 특강 요청이 많아서 100군데 가량 다녔어요.
 

<미생>이 연재되고 있는 지금은 인터뷰 요청이 더 늘었나요?
 
윤태호 그때 두 세배는 되는 것 같아요. 이제는 원했던 ‘브랜드’가 생긴 것 같고.
 

<무한도전> '릴레이 툰' 편에도 출연하셨잖아요.
 
윤태호 네. 그런데 ‘브랜드’에 대한 불편함도 같이 오더라고요. 저는 잡지 연재 당시 독자들의 반응을 2, 3개월 뒤, 그것도 엽서로 받던 시절의 작가죠. 그 땐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여기저기에 노출이 돼요. 요즘 젊은 작가들은 이걸 즐기는데 저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합니다.
 
제가 연예인도 아닌데 길 가다 사람들이 인사를 해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편이라 누가 인사를 하면 아는 사람인 것처럼 인사하게 되더라고요. 처음 보는 사람이 더라도.
 
그러고 나면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너무 아는 척했나?' 싶다가도 그냥 지나치는 건 또 어색합니다. 아직 적당한 정도를 모르겠어요. 얼굴 드러내고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싶어요.
 

무한도전 출연 시 만화가 멘토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어요.
 
윤태호 그쪽에서 그렇게 요구를 했으니까요. 저는 자임한 적 없어요(웃음). '릴레이 툰'을 앞두고 무한도전 가요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한도전 가요제는 초기가 더 재밌었어요. 프로 작곡가들이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만들면서 희생당하는 콘셉트가 좋았거든요.
 
이번 ‘릴레이 툰’도 누가 저와 파트너가 되든 저는 안내하는 역할만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직접 만화를 그리게 하고 싶었어요. 스스로 이걸 했냈다는 것에 놀라길 바라면서요.

제가 그린 만화에 파트너가 몇 컷 넣는 게 아니라, 파트너가 다 그리면 제가 조금만 손을 보는 그런 과정을 원했어요.
 
팔이 아파서 작업에 많은 참여를 못 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마음이 있었죠. 다른 멤버들이 그려달라고 하면 제가 설득될 것 같아서 파트너로 광희 씨가 되길 바랐어요. 제비뽑기를 했는데 정말 제가 원하던 대로 됐고요.
 


2. 책임에 대해

"책임이라는 말이 조금 낯간지러워요."

 


‘누룩미디어’ 설립도 그렇고, 예전부터 작가의 권익에 신경 써왔어요.
 
윤태호 제 사부님인 허영만 선생님은 그런 책임 하는 자리는 고사하셨죠. 문하생 시절에 그런 선생님 보면 안타까웠어요. 많은 역할을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하실까? 저는 어쨌거나 막 참여해서 뭔가 일을 하긴 했어요.
 
저는 ‘허영만’에는 턱 없이 부족한 이름이었지만 <야후>를 연재할 때부터 청소년 보호법 시위도 하고 비대위도 참여했죠. 엄청난 사명감이 있거나 해서 한 게 아니라 그냥 한 거예요. 마침 연재하던 잡지가 폐간되어서 시간도 있었고요.
 
그 때 대단히 많은 작가가 참여했는데, 제 또래 작가들이니까 같이 움직인 거예요. 다들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그 시절의 정서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만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다양한 콘텐츠 산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누룩미디어. 윤태호 작가가 대표이사로 있다. 소속 작가들의 머천다이징 상품들도 보인다.

 

 


당시의 문하생 생활은 열악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개선하려는 작가들의 움직임도 있었나요?
 

윤태호 문하생에게는 화실이 그림을 배우러 가는 곳이니까 생존의 현장이죠. 문하생 집단을 사회 집단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그 안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애써야 하는데, 저는 '문하생'을 빨리 해치우고 나가야 할 과정으로 봤어요.
 
화실을 하면서 100만 원 넘게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한 달 생활비 정도만 벌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따지기보다는 '선생님의 비결을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빨리 습득해야 하나?'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일을 많이 한다는 건 화실 작업에 시간을 투자한다는 거예요. 그만큼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거죠. 또 내 성장을 통한 자연스러운 그림은 선생님을 위해 다 쓰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빨리 작가가 되어야 했죠.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있다가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갔을 때, 문하생이 지각하면 지각비를 걷었어요. 그 일로 싸우게 되었죠. 걷은 지각비로 비품 구매 등 화실을 위해 쓴다고 하는데 왜 문하생들의 지각비를 걷어서 사냐고요. 그건 선생님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출근 잘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들도 ‘운동권’ 같은 문제 제기는 받아주었죠. 그런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화실 운영이 힘들어졌습니다.
 
원래 화실은 선생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에서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질서가 유지 되어야 해요. 그런데 제가 일을 많이 안 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된 거죠. 화실이 민주적으로 변하면서 술도 많이 먹게 되고(웃음). 죄송한 마음이 있죠.
 

이제는 화실을 운영하는 입장입니다. 문하생이 아닌, 어시스턴트 스태프 방식으로 운영하나요?
 
윤태호 문하생 체계입니다. 하지만 4대 보험은 제공해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야 하니까요. 그래도 정체성은 문하생입니다.
 
연재를 4개월 쉬고 있지만, 문하생 비용은 지급하죠. 문하생들은 앞으로 쓰일 요르단의 배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 컷 정도 그려놓았어요.
 

어떤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윤태호 문하생 체계가 조금 신기한 조직입니다. 문하생 입장에선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인데, 선생 입장에선 문하생 없으면 원고를 못해요.
 
이 친구들이 배워가는 비중과 내가 이들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비중이 공정해야 하죠. 가르치는 게 적더라도 프로 작가의 작업에 동참하는 건 연재 자체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도움이 될 수 밖에요. 선생이 하는 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는 것이잖아요.
 
저는 고료 협상이든 인터뷰든 모든 업무상의 전화 통화를 문하생이 있는 곳에서 합니다. 이걸 다 목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주 많은 봉급은 못 줘도 한 명이 한 달 살 수 있는 생활비는 줘야죠.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무적인 관점에서는 창작이 아니라 사업이니까.
 

 


3. 비평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모색하는 것도 재미죠."

 


‘에이코믹스’ 로 비평 지형에 기여한 것도 책임의 연장으로 생각했었어요.
 
윤태호 ‘책임’이라는 말이 조금 낯간지러워요. 어떤 작품이 좋아지면 더 알고 싶어지고,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 나와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의 통찰을 갖고 싶어지잖아요. 재미를 위해서 작품을 보기도 하지만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 감상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깊어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혼자서는 깊어지기가 어렵죠. 남들의 생각이 궁금한데 인터넷에는 너무나 많은 의견이 있어서 어떤 글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비평가들의 글을 찾아 읽게 되고요. 물론 너무 어렵게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땐 더 찾아보거나 주변에 물어봐가며 이해해 나갑니다.

 
 
 

 

 
윤태호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파고>. 볼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어 지금도 즐겨 보는 영화라고 한다.

 

 
 


만화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이 “만화는 재미있는 게 최고지.”라고 하는데, 이 말을 정확하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호민 작가가 말한 것처럼 재미는 희로애락이 다 포함되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궁금해 하는 것, 모색하는 것도 재미죠. 재미라는 말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독자들을 흥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해요. 작품을 깊이 있게 읽어내길 원하는 거죠.
 
작가가 자기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작품에서 작가의 무의식적인 면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의견도 매우 중요해요. 만화계에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길 바랐어요.
 

만화비평전문 사이트에 바라는 것이 있는지요?

 
윤태호 경쾌하게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자꾸 평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기거나 만화계에 기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요. 글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서 쓰면 되는 것이지요.
 
평자와 작가와 너무 친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아요. 인사를 나눈 사이더라도 작품은 냉정하게 비판하면 좋겠어요. 작가와 논쟁할 수도 있고요. 다툼 자체가 만화계에 하나의 누적된 경험치로 쌓이면 훗날 봤을 때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거에요.
 
만화판은 시장 변동이 매우 컸는데 이 유동성을 안정화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영화나 소설 쪽은 비평이 이런 격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직업의 안정을 위해서도 만화 작품에 대한 비평이 필요합니다.
 
또 저 역시 작업이 끝나면 한 명의 독자로 돌아가요. 그럴 땐 어떤 작품을 봐야 하는지 알고 싶죠. 봤던 작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남의 생각을 통해 제 깊이를 늘려나가고 싶기도 하고요.
 

 


4. 출판만화에 대해

"출판만화가였기 때문에, 무료로 만화를 보여주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과거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는지요?
 
윤태호 허영만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과거 작품이 다 부끄럽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들으면 한편으로 허세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제가 작품을 하다 보니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성적 농담과 여성 캐릭터들을 함부로 쓰고 소비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폭력적이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씨별곡>을 애착가는 작품으로 꼽았는데 지금 와서 보면 민망해요. 술자리에서나 하던 유머를 많이 써서.


 
 

 



1996년 작품 <연씨별곡> (좌), 2001년 작품 <로망스> (우).

 

 
 
 

<로망스>도 철저하게 남성적인, 남성 주도적으로 쓴 만화고요. 아쉬운 게 많죠. 그래도 <로망스> 만들 때 가장 즐거웠어요. 어떤 면에서는 노인들을 다룬 만화이니까요.
 
한 회씩 끊어지는 만화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굿데이라는 신문사 편집부에서 그런 요구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망스>를 작업할 때 만족도가 높았죠.
 


지면 만화를 하다 웹툰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윤태호 전 신문만화에 매력을 많이 느꼈어요. <로망스>할 때 바로바로 반응이 와서 좋았거든요. 편집자의 생각과 독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제 생각과 독자의 생각이 다른 지점을 발견하거나,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확인하는 쾌감이 컸죠.
 
잡지는 서너 명의 안목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래서 작업하면서 화날 때가 많아요. 신문사는 달랐어요. 그분들이 만화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덕분에 자유로웠죠. 앞으로는 신문만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어떤 신문에 연재를 하려고 반년 동안 준비한 작품을 못하게 되었어요. 이현세 선생님이 연재하던 자리였는데, 그 지명도를 잇지 못하는 작품인 것 같다는 게 이유였죠.
 
그리곤 이현세 선생님 데뷔작을 다시 게재하더라고요. 내가 80년대 초반 작품보다 못한 원고를 만들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어 한동안 작업을 못했습니다.
 
생활비가 필요하니까 다른 연재처를 찾긴 했는데 전력을 다할 수 없었어요. 뭔가가 무너진 상태였거든요. 상업 작가는 눈이 많은 곳에서 자기 작품을 보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결국 웹툰이 너무 하고 싶었죠.
 
하지만 그때 저는 출판만화가였기 때문에, 무료로 만화를 보여주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어요. 잡지나 신문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잖아요. 웹툰을 하고 싶기는 한데, 웹툰계에는 출판만화계와는 다른 작가들이 있어서 거기에 내가 들어가는 게 비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래서 양영순, 강도하, 강풀 같은 작가들이 권하는데 들어가기가 싫더라고요. 마치 제가 출판만화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 마침 '유료' 웹툰 사이트를 만든다는 곳이 나타나 웹툰을 그릴 정당성이 생겼던 거죠.
 
그런데 문하생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서 <이끼>를 24회까지 혼자 만들어 놓고 연재를 시작했는데 댓글이 안 달리더라고요. 최고로 많이 달렸을 때가 열아홉 개인데, 아이디를 보면 다 아는 사람들이었죠. 유료도 좋지만 이게 뭔가 싶었어요.
 
포털에 연재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만화를 보여주지만 수익을 창출하더라고요. 영화 판권도 팔고, 광고도 찍고, 지면 광고도 하면서 고료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도 하고요. 웹툰이 과연 무료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끼>를 연재하던 웹툰 사이트 회사가 사업을 접어서 ‘다음 만화속세상’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웹툰 작가가 된 거죠.

 
 
 


 

윤태호 작가의 첫 웹툰 <이끼>.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2008년 부천만화상 일반만화상, 2010년 대한민국 콘텐츠 어워드 만화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끼>는 스릴러 장르의 접근이 새로웠습니다.
 
윤태호 캐릭터를 파고드는 것이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그린 것이지, 장르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본격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카피는 출판사에서 달았거든요.
 
장르의 두려운 점은 독자 중에 장르에 더 정통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댓글난에 나보다 깊이 있게 만화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섭기도 했고요.

직장인들이 많이 봐서 해석하는 수위가 깊어졌어요. 노무현 대통령 서거하면서 정치적 의도와 엮는 사람과, 만화는 만화로 보라는 사람들끼리 혼란도 있었고요. 덕분에 제 작품이 연령대가 높은 만화가 되어버렸죠.


 

<첩보대작전>도 좋았는데, 이제 개그 욕심은 없으신가요.
 

윤태호 <첩보대작전>은 저도 좋아하는 작품인데, 세상이 달라져서 내 개그는 이제 안 되는 것 같아요(웃음).


 


5. 서사와 주제에 대해

"과도한 확신으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삐끗하기를 바랐습니다."

 


<야후>, <이끼>, <미생>, <파인>에서 부자 관계가 반복되는 모티브가 눈에 띄었어요. 지향하는 테마인가요?

윤태호 부자 관계 모티브를 한겨레 토요판의 김두식 선생님이 처음으로 이야기했어요. “왜 작품에 아버지가 죽거나 없느냐”는 말을 듣고 소름이 쫙 끼쳤죠.
 
집을 떠난 문하생 시절, 아버지를 넘어서려고 아버지에 대한 일기를 썼었거든요.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면 형제 중에 아버지랑 단둘이 술 마시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뭔가 해결이 안 됐구나.’ 싶었습니다.
 
부자 관계성은 내가 의도한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발견한 요소였죠. 이유는 저도 모르겠네요. 이유 자체는 정신과 의사가 분석해야 할 것 같고(웃음).
 
어렸을 때 평범하지 않게 자라긴 했습니다. 아버지 직업도 그렇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면 날 소개해야 하는 일이 잦았죠. 어렸을 때 피부가 좋지 않아서 친구들이 이유를 물을 때마다 저는 항상 해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선지 스스로에 대한 화가 어릴 때부터 너무너무 많았어요.
 
그래도 학교 다닐 때는 애들 얼굴을 계속 봐야 하니까 싸움은 안 하고 지냈지요. 20대가 되어 사회에 나와서는 내가 왜 화를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어떤 문이 열린 것처럼 뭔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어요.
 
한쪽에선 성공하고 싶고, 자존감 없던 걸 보상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선 짐승 같은 화를 원초적으로 풀고 싶어 했죠.
 




<아버지를 향한 파도: 만화가 윤태호가 한국의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기까지>크리틱엠 선우훈 평론(링크)






작품에 화를 투사하셨군요.

윤태호 맞아요. <야후> 할 때의 얘긴데, 뉴스를 보면 화가 나잖아요.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건을 방송국마다 뉴스로 다룬 적이 있었어요. 헬기로 생존자들 구하는 와중에 헬기에 올라가는 여자 분의 치마가 뒤집혔는데, 이걸 반복적으로 보여주더라고요.

또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 등을 스포츠 중계처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뉴스가 많았죠.

아현동 근처에 살고 있을 때 가스폭발 사건이 터지기도 했는데, 언론이 이를 다루는 방식에도 몹시 화가 났죠.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 사고가 때는 구조자가 나올 때마다 생존일수 해외 최고기록이 며칠, 몇 시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도하는 식이었어요.
 
그 모든 일을 우리는 그저 뉴스로 보고 지나가죠. 어떤 사고를 경험한 사람도 그 사고만을 경험했을 뿐이고요. 그런데 모든 사고를 다 경험할 수밖에 없는 위치의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야후>의 핵심이었습니다.

 
 


 

극화 작가로서의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된 작품 <야후>.  '야후'는 <걸리버 여행기> 4부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말들의 나라에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야만스럽게 살아가는 동물을 지칭한다.

 
 


<야후>의 김현은 잘살아 보려고 했는데 자기파멸로 빠질 수밖에 없는, 테러를 하려는데 그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의식의 언어화를 해보지 못해서 적을 찾지 못하는 거죠. 대한민국에 불특정한 해프닝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저 권력을 희롱하는 정도에 그쳐요.
 
원래는 김현이 비리 국회의원을 죽이고, 그 사람의 가족을 방송에서 보면서 내상을 입는 장면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첫째가 태어났어요. 제 피부병이 유전이라 아이에게 영향을 줄까봐 아내와 함께 하루는 웃고 하루는 울던 시절이었죠.
 
그때 내가 만든 주인공이 싫어지고 혐오감이 들었어요. ‘네가 뭔데 사람을 죽이냐?, 너만 힘드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인공에게 피를 묻히면 안 되겠다 생각이 많이 들어서 해프닝으로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판권을 팔았을 때는 관계자들에게 김현이 자기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고 했어요.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보이길 바랐어요.
 

악마화에 따른 어떤 비장함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사회적 사건들을 보면, 사회적 압박으로 인한 개인의 폭력성이 약자를 향해 드러나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윤태호 영화 <파고>도 실제 사건을 묘사한 것이잖아요. 이유를 생각해보면 작품에서 추출되는 감정이 유효하니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남아야 하니까 그랬겠죠.
 
실제 사건과 사고를 다루는 방식이 어쨌든 창작물에서는 작가가 의도한 서사가 들어가잖아요. <야후>를 그릴 때는 어디론가 나의 에너지를 폭발시켜야만 했던 개인적 이유가 컸습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노를 제대로 풀어본 경험이 없다고 생각해서예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우리가 기대한 부분 중에 정확한 징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기대를 저버린 채 대표로서 용서하는지, 그게 왜 화합이라 불리는지 답답했죠.

 
<야후> 이후에도 남성들의 질서가 많이 다뤄지는데, 매력을 느끼는 주제인가요?
 
윤태호 짐작해보면 아버지 때문에 남성적 질서에 많이 노출되었던 것 같아요. 다른 아버지상을 꿈꾸더라도 그걸 묘사할 때 ‘기존의 세계’라는 틀을 쓰지 않으면 어려워요. 전 다른 어른 남성의 목소리를 모르죠. 그 안에 여성이 포함된 틀도 모르고. 

여자 형제가 없다 보니 여자 캐릭터가 한 명 나오면 대사 쓰는 것도 괴롭더라고요.
 

작품이 진행되면서 아버지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져요.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윤태호 애를 키우다 보니 부모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애는 혼자 크더라고요.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만 있으면 알아서 도덕과 성취욕과 욕망의 관리 같은 걸 알아요. 물론 제가 없는 자리에서 아내의 많은 노력과 노동이 있긴 했지만, 제 아내도 “애가 스스로 자란다.” 고 말해요. 사람은 그런 존재인가 봐요.
 
그런 경험을 하고 보니 과거 아이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부모 세대가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때려서라도 교육한다는 생각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80년대, 70년대 생각해보면, 제가 여섯 살이 처음인 것처럼 자기들도 서른 살이 처음이면서 어떤 확신을 갖고 그렇게 대한 건지 우습죠.
 
우리는 각자 최초로 살고 있잖아요. 2016년에 마흔을 사는 사람에게 2015년에 마흔이었던 사람이 조언을 해봤자 다른 시기에 대한 얘기죠. 대체적인 확률적 조언만 가능할 뿐인데 그게 아이를 때려가면서 기를 만큼의 확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특히 옛날일수록, 어려도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게 되면 완전한 어른 취급을 해줬잖아요. 그 어린 어른들은 확신에 대한 자격증이라도 딴 것처럼 행동했죠. 그에 대한 반발을 갖고 있었고, 그렇게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삐끗하기를 바랐어요.
 

<파인>은 그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즐겁게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윤태호 <파인>도 부성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살았을 법한 시대를 얘기하는 거죠. 서열을 따지며 어떻게 자기확신을 지키려고 하는지, 그게 실제 얼마나 볼품없는 게임인지, 그런데도 얼마나 목숨 걸고 했는지, 근면 성실이라는 구호는 얼마나 ‘선의’가 없는지. 그걸 묘사하려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근면 성실한 악당들이 신안 앞바다의 보물을 건지려는 이야기 <파인>. '촌뜨기'라는 의미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무뢰배들의 언어가 서로에게 사투리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알린다. 더불어 아무도 '오야'가 될 수 없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 태도를 작품에서 연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어요. 특히 <야후>의 주인공들이 작가님과 같은 69년생이던데요?
 
윤태호 연재된 건 1999년인데 만화는 1986년에 시작하죠. 저와 주인공이 그때 청소년이었으니까요. 5권 정도로 기획해서 2002년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인터뷰에서 20권까지 하겠다고 허풍쳤다가 결국 20권까지 하게 되었지요.
 
<부킹>이라는 청소년 잡지에 연재를 했는데, 저도 주인공도 나이를 먹어갔죠. 연재가 끝날 땐 주인공이 서른 중반이더라고요.
 

청소년 잡지인데 수위가 꽤 높았습니다.
 
윤태호 일본 만화의 과격한 표현을 동경했어요. 잔인한 장면도 그렇고, 그때 누드크로키를 열심히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청소년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면서 성인의 몸매처럼 그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작품의 균일함을 떨어뜨리는 일이었죠.
 

<야후>가 1980년대와 2000년대까지, <이끼>는 2000년에서 2010년까지를 다뤘습니다. <미생>은 현재 진행형이고요. <파인>은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를 택하신 것인가요?
 
윤태호 우리는 과연 2016년을 살고 있을까? 지금도 우리는 70년대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미덕이라는 ‘근면 성실’을 나쁜 놈들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사기꾼들이 작당한 뒤에 몫을 분배하기로 해요. 예를 들어 바닷속에 황금이 있다면 '배를 타자.', '끌어올리자.'에는 합의가 되는데 그다음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덜 있는 게 이득이 되니까, 같이 돌아오는 건 손실이 되는 거죠. 그런데 바다에서 돌아오긴 해야 하는 겁니다. 비도덕적인 놈들끼리 모였는데 도덕적인 결속이 필요해져요.
 
의형제를 맺는 이유가 그런 거잖아요. 남은 남이라고 철저하게 인식했을 때 결속력이 강해져요. 형제라고 하면 합리성을 넘은 아쉬움이 생기니까.
 
책상에 붙여놓은 문구가 있어요. “모든 균열은 내부의 조건이 완성한다.” 얼음이 바늘에 깨지는 이유는 얼음 내부의 요인 때문이지 바늘 때문은 아닙니다. 바늘은 요구 조건에 부합하는 외부환경일 뿐이죠.
 
물은 바늘로 찔러도 깨지지 않잖아요. 이들이 깨지는 이유는 본질 상 악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서예요. 저는 이게 굉장히 매력적이더라고요.


 
근면 성실의 속성이 우리의 믿음만큼 선하지 않다는 것, 악당들 또한 근면 성실하다는 것을 복합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단순한 권선징악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윤태호 그건 상관없어요. <미생>도 그저 직장 활극으로만 보셔도 좋고, 깊이 있게 봐주셔도 좋아요.
 
그런데 <파인>을 연재할 때 복잡했어요. <미생>이 드라마화 되면서 사람들이 절 너무 많이 찾아서 산만했죠. 휴재도 잦았고. 그 시대의 아이러니를 더욱 고급스럽게 묘사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훨씬 이전을 다룬 <인천상륙작전>은 서사가 없다고 느꼈어요.
 
윤태호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서사가 있어요.
 

 

 


누구도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던 시기를 그려낸 <인천상륙작전>.

 
 
 
 

말씀을 듣고 보니 학습 만화와 서사 만화가 섞인 것 같습니다.
 
윤태호 가급적 서사는 만들지 않기로 했지요. 한국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몰랐던 것들에 이야기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묘수가 빛난 바둑은 상황이 좋지 않은 대국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빛난 건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말인데, 해방 때부터 문제가 있었어요.
 
실은 미국이 우리를 위해 싸운 것도 아니고 일본이 망하면서 해방이라는 전리품을 얻었을 뿐이죠. 해방의 주체가 누구인지 난감해진 상황이니, 깃발을 든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했어요.
 
미 군정이 가장 잘못한 지점은 행정의 편의를 위해 일제에 복무한 사람을 데려온 거예요. 만주에서 돌아온 민족지도자들과 정통성의 문제에서 충돌했죠.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해방의 의지를 갖고 살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당연한 질서처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해방을 원했을까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아주 예민한 조치가 필요했을 텐데, 미 군정은 적이지만 일본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위생에 대한 우려도 커서 일본 주둔 부대의 문제아들만 한국에 보내는 식으로 운영했으니 처음부터 일이 꼬였죠.
 
그래서 해방부터 이야기해야 하고, 인천상륙작전 자체의 매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작전이 시작되며 등대 불빛이 짠하고 켜지는 거로 끝내려고 했는데, 한겨레에서 더 하자고 하는 바람에... (웃음).
 
원래 거기에서 끝났어야 완성형의 이야기가 되었겠죠.
 

 
 

 

인터뷰 1 <미생>의 윤태호 작가 끝 (인터뷰 2로 이어집니다.)

YOUR MANAⒸ선우훈

 
 
 

인터뷰 2 <미생>의 윤태호 작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