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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도련님>의 하양지 작가

인터뷰

<춤추는 도련님>의 하양지 작가
인생이란 뭔가를 걱정했다가 
이게 별거 아니라는 걸 납득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글 이연숙(리타)
사진 전수만

 

하양지. <달콤한 애드립>으로 시작, <우리는 시간문제>, <딸기밭>, <이런, 용기>를 연재했다. 현재 레진코믹스에서 <춤추는 도련님>과 <래빗홀> 연재 중.



 

하양지 작가의 작품에는 고립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춤추는 도련님>의 ‘도련님’이 그렇다. <우리는 시간문제>의 ‘배수현’ 역시 오랫동안 정체를 숨긴 채 작가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고립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딸기밭>의 ‘만수’는 어떨까? 그에게 있어 집은 감옥과도 같지만, 동시에 가장 숨기 좋은 장소다. 물론 그런 그들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도련님’에게는 ‘용주’가 그런 인물이고, ‘수현’에게는 ‘유진’이, ‘만수’에게는 ‘유영’이 그럴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각자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흔한 서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양지 작가의 작품은 이 서사를 충실하게 따라올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때로 대화가 멈추는 순간의 오가는 눈짓들이 더 많은 말을 전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서사가 중지된 곳에서 중요한 것들을 발견한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하양지 작가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이미지와 언어가 시선과 함께 박제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서울에서 두 시간이 걸리는 하양지 작가의 작업실로 초대받았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오늘은 그런 순간을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마치 교수님의 부탁으로 시골로 내려가게 된 '용주'가 우연히 ‘도련님’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양지 작가의 작업실에 도착한 순간, 내가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곳은 생각보다 시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1. 신작
여자 주인공의 도발적인 면과 허무한  내면을 되도록 집요하게

 
 

신작 <래빗홀> 연재 시작하셨죠. 성인물이어서 놀랐어요.

하양지 저도 제가 그릴 줄은 몰랐어요. 그림 작가(영모)랑 충동적으로 시작했는데 성인물이 처음이라 콘티 짤 때 너무 고생했어요. 그래서 성인 만화와 영상 자료를 보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해봤어요. 어쨌든 욕망이 많은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보려고요.

 

<래빗홀>같은 경우는 확실히 전작들보다 사건 중심인 것 같아요.

하양지 맞아요. 제가 최근에 <우리는 시간문제>를 다시 봤는데, 확실히 사색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약간 소극적인 작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래빗홀>은 콘티 짤 때부터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좀 더 굴곡 있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해서요. 근데 제 친구들은 ‘그래도 니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하긴 하더라고요.

 

신작 <래빗홀>의 한 장면. 주인공의 욕망이 사건을 끌어가는 구심점이 된다.

 

 

좀 집요한 것 같긴 한데, 성인물에 도전하는 게 갑자기 나올 수 있는 충동은 아니지 않나요?

하양지 어렸을 때부터 만화 보는 친구들이랑 같이 있다 보니까, BL을 접할 기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성인물의 문법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독자로서 성애적인 묘사를 받아들일 때와 제가 창작하는 건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어요. 특히 성인만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유형과 행동이 상당히 획일적으로 묘사될 때가 많잖아요. 액자 속 그림같이. 그렇게 재현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거든요. 지금 하는 성인물에선 여자 주인공의 도발적인 면과 허무한 내면을 되도록 집요하게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연재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반응은 어떤가요?

하양지 
다행히 좋은 편에요. 기획서는 2월에 썼어요. 피디님한테 보내드리고 거의 얼마 안 돼서 통과됐고, 시작했어요. 결말도 준비된 상태고요. 완결 콘티까지 다 짜놓은 건 아니지만, 편수가 그리 길지 않아요. <이런, 용기>보다 더 짧을 거예요. 중편 정도? 외전 합쳐도 30화 정도거든요.



 
 

2. 하양지
뭐라도 시작하자는 절박한 마음에서 <달콤한 애드립> 시작

 

작품을 연재한 기간이 적지 않은데, 지면을 통한 인터뷰가 많이 없던 걸로 알고 있어요. 독자분들이 사소한 이야기를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하양지’라는 필명의 의미라던가...

하양지 예전에 <밀양>이란 영화를 봤어요. 일반적으로 '햇빛'하면 밝은 이미지가 연상되잖아요. 그런데 그 영화에서 햇빛은 삶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양면성을 상징하는 거라고 느꼈어요. 거기에서 ‘양지’라는 이름을 따왔어요.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느낌으로 의미 부여를 한 거죠. 그냥 ‘양지’라고 하면, 고기 부위 이름으로 들리기 쉽잖아요. 어색해서 성을 하나 붙였어요. 사람 이름처럼. 하 씨 성이 예쁘더라고요.

 

문예창작과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다른 인터뷰에서 들었어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하양지 원래는 만화를 좋아해서 애니고를 가고 싶었어요. 독서실 같은 데서 혼자 그림 그리면서 입시 준비를 했어요. 제가 사는 곳이 시골이라 입시학원이란 개념을 몰랐거든요. 다행히 운 좋게 붙었는데, 들어가고 1년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다들 그림을 너무 잘 그리고, 동인 활동하다가 온 친구들도 있어서 적응하기가 힘들었어요. 한동안 그렇게 헤맸어요.

그러다가 영화에 빠져서, 영화감독이 되려고 했었어요. 다른 친구들이 그림 그릴 때 혼자서 영화 보고 감상문 쓰고 그랬죠. 서울예대 영화과 준비를 하다가 떨어졌는데, 재수를 준비하다 문득 영화가 저랑 잘 안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를 만든다는 게, 사람들을 통솔하고 자기 의견을 주장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또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고요. 그런 걸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재수 중에 주말마다 교회에서 청소를 했어요. 거의 혼자서 책 읽고 그랬는데. 그냥 그 시간이 좋았어요. 그 때 문창과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나는 스토리 쓰고, 언어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니까, 가면 되겠지.’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문창과에서의 경험이 지금 만화 그리는 데 많이 반영되고 있다고 느끼나요?

하양지 엄청 큰 거 같아요. 문창과에서 주로 하는 수업이 소설을 읽고 세계관, 작가-화자의 관계에 대해 비평적으로 분석하는 거거든요. 학생들이 각자 작품에 대해 품평하고 교수님들도 평가를 해주고. 그러다 보니 대학 다닐 때 책을 엄청 읽었어요.

 

그럼 어쩌다 만화를 그리게 된 거예요?

하양지 대학 입학하고 나서, 첫 학기에 처음으로 쓴 게 SF 소설이었어요. 근데 교수님께 혹평을 받아서 소설 쓰는 걸 바로 포기했어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다음 해엔 소설 수업을 안 들었어요. 그리고 시 수업도 들었는데, 내가 이걸 진짜 제대로 하려면 뭔가 많은 걸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뭐라도 시작하자는 절박한 마음에서 <달콤한 애드립>이란 작품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게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공모전을 준비했는데 떨어졌죠. 그래도 한번 준비한 거 끝까지 해보자 싶어서 계속 그렸어요. 연재 주기가 불규칙적이었어서, <달콤한 애드립> 40편을 그리는데 2년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편 올릴 때도 있었고.

 

하양지 작가의 대학 시절 경험이 유머로 승화되고 있는 4컷 만화 <달콤한 애드립>.

 
 
 
 

3. 작품 특징
사람이 구원받는 서사, 그 구원이 거창한 방법은 아니었으면

 
 


사실 작가님이 문창과 출신이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했어요. 대사가 엄청 시적이잖아요. 창작을 했던 분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식도 그렇고.

하양지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봐요. 영화는 이미지랑 대사가 합쳐져 있어서 강렬하게 와 닿는 것 같아요. 특히 그 캐릭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런 대사 있잖아요. 화를 내든 슬퍼하든 저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그런 거.

미국 드라마 보면서 대사를 눈여겨보는 습관이 들었어요. 좋은 대사를 보면 콘티북 같은 데다 메모해 놓고요.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눈발이 날리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면 기억해 놓죠. 하다못해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인물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장면이 마음에 들면, 그것도 킵해놓고요.

이런 이미지랑 단어들을 여기저기서 따와서 수집해놓는 거예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거 엿듣다가, 툭 던지는 단어 중에 괜찮은 거 있으면 그것도 기억해 놓죠. 그렇게 모아놨다가 나중에 이미지로도 합쳐보고 언어로도 합쳐보고 그래요.


결국 채집한 단어랑 이미지를 캐릭터의 특징으로 정형화하는 건 작가님의 몫인데요. 지금까지 관찰자인 ‘순진하고 겁 없는’ 인물과, ‘예민하고 불가사의한’ 인물의 세계를 주로 다뤄왔잖아요. 이런 모티브가 반복된다는 점은 의식하고 있는지요?

하양지 제가 의식하고 그리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를 그린 것 같거든요. 근데 폐쇄적인 인물 관계에 관심이 많은 건 맞아요.

어렸을 때 <양철북>이란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 되게 기괴한 분위기잖아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주인공 남자가 빨간 이불속에서 여자랑 뭔가를 하고 있어요. 성적인 긴장감이 느껴지는 장면인데 동시에 두 사람만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대학교 다닐 때 강사님이 이야기해준 건데요.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세상을 등지고 있대요. 밀접한 두 사람이 외부의 세상이랑 상관없다는 말인 것 같아요. 그 말이 제가 그리는 만화랑 비슷하게 느껴져요.

사실 저는 그 폐쇄성 사이에서 엄청난 용기도 보이는 것 같아요. 사실 다른 사람 삶에 끼어들 용기를 가지는 것이 쉽지가 않잖아요. 이 사람이 궁금하지만 예의가 아닐까봐 물러서게 되고, 혹시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무서워서 거리를 두게 되는 게 일상적인 관계잖아요.

 
 

근데 작가님 만화의 주인공들은 정말 뻔뻔할 정도로 두려움이 없어요. 그렇게 서로 상처 주면서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게 작가님 만화의 특별함인 것 같아요. 그런 뻔뻔한 용기는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양지 제가 사람이 구원받는 서사를 좋아해요. 그 구원이 어떤 수단으로 이뤄지냐고 했을 때, 막 거창한 방법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질상으로 불안한 면이 많아서, 별 이상한 걱정을 다 하고 살거든요. 어떨 때 보면 인생은 뭔가를 걱정했다가 이게 별거 아니라는 걸 납득하는 과정의 반복 같아요.

저에게 구원이라고 해봤자, 그냥 쩔쩔매는 사람을 그 날 하루 편하게 만들어주는 수준인 거죠. 그래도 제가 사는 세계에서는 그런 수준의 구원이 중요하죠. 좋은 일이 일어난 것에 기뻐하기보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는 거. 이게 행복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춤추는 도련님>에서 ‘도련님’이 겪는 감정선이 이것과 비슷할 거 같아요.


그렇게 들으니 신기하네요. 저는 ‘도련님‘이 작가님일 줄 몰랐어요.

하양지 제 생각인데, 저랑 제일 비슷한 인물일 거예요.


<이런, 용기>의 ‘용기’도?

하양지 용기가 여자였으면...


<우리는 시간문제>에서는?

하양지 없을 거예요.

 
 
 
 
 
 

 
 
 
 
 

4. 우리는 시간문제, 도련님
두 인물 사이를 서로에게 1순위인 유일무이한 관계로

 
 

저는 작가님을 <우리는 시간문제>로 알게 되었는데요. 첫 작품 연재할 때와 지금의 인기도나 반응 차이가 클 거 같아요. 언제 처음 그걸 느꼈나요?

하양지 <우리는 시간문제> 때요. 트위터 찾아보면 재밌다고.

 

<우리는 시간문제>가 인기가 많았던 이유 중 하나는 ‘백합’적인 요소 때문이기도 한데, 동의하나요?

하양지 네,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일부러 ‘백합만화’로 읽히도록 의도하신 건 아닌 거 같은데.

하양지 제가 ‘백합물’이라고 부를 만큼, 그 장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또 이런 식으로 자기 ‘존잘’을 좋아하는 건, 평소에 제가 자주 갖는 감정이었거든요.

동거하게 되는 설정부터가 상상의 영역이었죠. 또래 여자들이랑 같이 있으면 좋지 않나요? 전 여자들이랑 있을 때 느껴지는 그 분위기가 좋아요. 남자랑 여자가 있으면 절대 다수가 정해준 위계나 정치적인 관계로 묘사되기 쉬운 것 같아서요. 그런 쪽은 제 관심사도 아니고요. 그래서 백합만화라고 불러주니 좋았어요.

예전에 리타 씨가 보시고 폭풍 트윗을 한 적 있잖아요. 제가 레진코믹스 일 주년인가, 이 주년인가 파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시간문제>로 검색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그걸 발견하고 캡처를 다 해놨어요. 되게 흥분한 사람의 말투였는데 그게 다 진실되어 보여서. 그런 식의 고양된 반응을 얻은 적이 없었거든요.

 

존잘님을 모시고 살려면 이 정도 추진력을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준 <우리는 시간문제>.

 



 

<우리는 시간문제>를 단지 ‘백합만화’로 치부하지 말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하양지 이런 대답은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봐도 상관없어요. 제가 근래에 생각한 건데, 저는 두 인물 사이를 서로에게 1순위인 유일무이한 관계로 그리려 했어요. 결국 그게 사랑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참,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했던 질문. 존잘인 ‘수현’이 쓰는 소설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는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요?

하양지 헤르만 헤세의 정서일 거에요. 엄격한 기숙사 학교, 폐쇄된 공간. 세상을 알기 직전인 과도기의 남자아이들. 그런 키워드를 좋아해요.

그리고 ‘마리오 자코멜리’라는 사진작가가 있어요. 신부 수업하는 남자들을 찍은 흑백사진 작품집이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를 많이 따왔어요. 규율이나 형식 속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생기발랄한 표정 짓고 있는 걸 보면 묘하게 설레더라고요.

 
 
 
 
 

There Are No Hands To Careless, Mario Giacomelli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시간문제>의 결말이요,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소개해줬는데 되게 애매하다고 하더라고요. 다 죽은 거냐는 말도 들었고. 어떤 의도로 연출한 건가요?

하양지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그런 광경을 그리는 걸 좋아해요. 거기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의미는 읽는 사람의 몫이죠. 저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되게 잘 끝났어요. 이거 인터뷰 때 말씀드릴까 고민했었는데, 사실 결말을 구상하던 단계 때 유진이가 죽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지인들의 반대로 금방 철회했습니다.

 

이제 <춤추는 도련님> 이야기를 해볼까요. 마지막 휴재를 지난 6월에 했는데, 결말은 언제쯤?

하양지 70화요. 지금 53화니까 올해 안에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상을 3년 전에도 이미 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설정을 하게 되었나요? '트라우마가 있는 은퇴한 아이돌'이라는 설정이 너무 신선해요.

하양지 3년 전 구상과 지금의 이야기는 톤부터가 많이 달라요. 그 당시에 남자 주인공은 지금의 도련님처럼 50대 중년 남성도 아니었어요. 동년배의 남녀가 시골에서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 정도였어요. 도련님이 아이돌이었다는 설정은 작년에 후속작 준비를 하면서 살을 붙였어요. 제가 아이돌 노래를 많이 듣거든요. 그 직업군이 뭔가 화려한데 공허하고, 엄청 매력 있어요.

피디님을 만났을 때 내놓은 또 하나의 시놉시스는 수능 출제 위원들 이야기예요. 근데 피디님이 준비하는 노력 만큼 재미가 보장될 지 모르겠다고 해서 <춤추는 도련님>으로 결정했어요.

 

 

<춤추는 도련님>의 초반부, 아직은 예민하고 이상한 도련님일 뿐(전혀 춤을 출 것 같진 않다).



 

5. 마무리
“이름을 너무 신중하게 지으면 작별할 때 상심이 클지도”

 

그러고 보니 작년에 만났을 때는 부모님이랑 살고 있었는데, 이제 자취방 겸 작업실에서 혼자 생활하잖아요. 아무래도 달라진 점이 많겠어요.

하양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스스로가 이렇게 건강에 집착하는지 몰랐어요. 비타민제, 마그네슘, 아연 같은 영양제를 챙겨 먹고, 하루에 세 끼를 먹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건강관리를 위해 수영장 다니려고 수영복을 사놨는데 며칠 전에 발등을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어요. 걷는 게 어려워서 답답할 따름입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데…

 

동거 중인 고양이도 있는데, 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하양지 재작년 이맘때에 처음 만난 친구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집 마당을 서성이고 있더라고요. 다가가면 도망가지 않고 얼굴을 비비며 바닥에 뒹굴거리고 그랬어요.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함께 작업실에서 놀고 아침이 되면 야생으로 내보내는 일과를 보내다가 지금은 함께 살게 됐습니다.

 

아까부터 ‘야옹이’라고 부르던데... 진짜 이름인가요?

하양지 이름을 너무 신중하게 지으면 나중에 이 친구랑 작별할 때 상심이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방어의 일종으로 무심히 작명을 해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질없네요... 지금은 정말 잘해주고 있어요. '츄르' 라고 하는 핫한 고양이 간식도 하루에 하나씩 주고,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아까 미국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하양지 미국 드라마나 영미 소설, 영화의 대사는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이에요. 말을 가지고 기교를 잘 안 부린다는 느낌?

 

혹시 추천하고 싶은 드라마가 있나요?

하양지 영화 <파고>가 생각나요. 두 명의 유괴범이 나오는데 과묵하고 음침한 남자가 시종 시끄럽고 땍땍대는 파트너(스티브 부세미)를 죽이거든요. 이유가 너무 간단했어요. 너무 말이 많다, 그 한마디였던 것 같아요. 물론 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겠지만요. 그 무시무시한 행동을 해놓고서는 말이 많아서 죽였다니... 저런...

가장 최근에 <섹스 앤 더 시티>를 다시 봤어요. 샬롯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습니다. 네 명의 주인공 중 그나마 제일 보수적이고 가정을 중시하는 여성인데,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가 않거든요.

남편과 둘이서 자식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남편이 지치고 말아요. 남편이 그다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밝히자, 샬롯이 슬픔 속에서 거실의 벽을 응시하는 장면이 있어요. 샬롯의 직업이 미술관 큐레이터라 추상화가 벽에 걸려있는데, 그 장면이 정말 묘하더라고요. 표면적으로 보면 상당히 성공한 삶이잖아요. 아주 비싼 집에 예쁜 그림이 걸려있는데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씁쓸해요.

체홉의 어떤 짧은 소설에서 결혼식을 묘사한 장면이 있었어요. 날씨는 화창하고 결혼식 노래가 아름답게 퍼지며 사람들 얼굴도 밝았겠죠. 근데 어떤 비수를 꽂는 문장이 있었어요. 신랑이 햇빛에 눈이 부셨던 건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묘사였어요.

전 그 문장이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관통했다고 생각해요.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불운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청객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 근처에 처음부터 머물러있었던 건가 싶어서 섬뜩했어요. 먼저 말한 드라마에서도 그런 지점이 느껴졌어요. 그런 맥락으로 봤을 때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도입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감독을 꿈꿨다고 했는데, 어떤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하양지 고3 때 이와이 슌지 영화를 정말 좋아했어요. <피크닉>이랑 <리리슈슈의 모든 것>을 여러 번 봤어요. 그분 영화가 엄청 섬세하고 슬프고 예민하잖아요. 십 대 때는 사소한 것도 비장하고 낭만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쉬워요. 그래서 훨씬 잘 본 것 같아요. 

 

최근에는 어떤 영화를 봤나요? 얼마 전에 <트럼보> 재밌게 봤다는 트윗을 읽었어요. 저도 진짜 재밌게 봤거든요.

하양지 네. 하지만 요즘은 새 영화를 잘 못 보네요. 얼마 전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다시 봤어요. 진짜 재밌어요. 레지나 조지라는 악녀로 나온 레이첼 맥아담스가 <어바웃 타임>에 나온 게 충격이었거든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도 봤어요. 개인적으로 <맵 투 더 스타>가 이 분 것 중에 제일 좋아요. 칠순의 나이에 저렇게 에너지 넘치는 작품을 만들다니...

 
 
              

 

 
 

인터뷰가 끝나고 하양지 작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동틀 무렵 잠에서 깼는데, 베란다를 통해 밖을 보니 동네 전체가 희뿌옇게 안개 낀 모습이었다.

“이 동네가 주거 인구 비율 대비 자살률 1위래요. 안개 때문인 것 같다고 들었어요.”

공식적인 통계인지는 모르겠다. 작업실이 위치한 동네는 지나치게 조용해서, 마치 아파트 단지 전체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만약 ‘하양지 작가와의 인터뷰’라는 제목의 영화를 찍는다면, 마지막 장면으로 완벽할 것 같았다(물론 이 경우는 <우리는 시간문제>보다는 좀 덜 적막하고, 덜 을씨년스러울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배가 고파져서 편의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꿈꾸던 ‘하양지 작가와의 하양지 만화 같은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하양지 작가의 고립을 최선을 다해, 더욱 뻔뻔한 방법으로 방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YOUR MANAⒸ리타

 
 

<춤추는 도련님> (링크)
<래빗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