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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심청>, 그녀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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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심청> (seri, 그림 비완. 저스툰 연재)

  

 

효녀, 열녀 등 여성에게 주어진 젠더 규범은 <그녀의 심청>에서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여성이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갖기 위해서는 당대의 지배 규범에 걸맞은 효녀나 열녀가 되어야 했다. 바리데기나

심청, 춘향은 그런 이름들이다. 2017년 저스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그녀의 심청>은 고전 <심청전>을 중심으로

로 대표되는 그녀의 이름을 의심하고 질문한다. 현숙한 부인으로 기록된 장 승상의 부인은

왜 심청의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내주겠다고 제안했으며, 이름난 효녀 심청은 이를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와

같은 자연스러운 질문은 그동안의 <심청전> 다시 쓰기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효녀가 되기 위해 심청은 장 승상

부인의 도움을 거절해야 하고, 장 승상의 부인은 훌륭한 여성이기에 기꺼이 어려운 자를 위해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인물이라고, 쉽게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심청>은 효녀와 열녀가 될수록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잃어가는 여성들에게 개성을 부여한다. 모두 똑같은 효녀담, 열녀담 속 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결과 고전 서사의 토대를 뒤흔들고 여성 서사로 거듭난다.

 

이 상상력은 현재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페미니즘적 전환 속에서 등장했다. 효녀, 열녀 등 여성에게 주어진

젠더 규범은 <그녀의 심청>에서 모두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착한 딸은 거짓말을 일삼는 딸이고,

현숙한 부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심청 외에도 뺑덕어미나 장승상 부인, 장 승상의 며느리까지 여성 인물들의

사연에 집중함으로써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 사이의 연대는 자연스레 GL(girl's love)적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여성들 사이의 연대가 언제나

위험하지 않은우정이나 소녀적 감수성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그녀의 심청>에서 여성들의 관계는 조금은

위험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 만큼 성숙하며, 진정한 의미의 성장으로 연결된다.

 

눈먼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서 구걸과 동냥, 도둑질까지 마다하지 않는 하층민인 심청은 여자가 될 수 없다.

산발한 머리에 맨발, 잘 씻지 않은 몸 등 남자로 오해받을 정도다. 반면 꽃처럼 아름다운 장 승상 부인은 심청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그녀의 심청>2권 표지를 보자. 앞면은 중성적인 심청이,

뒷면은 화려하게 치장한 장 승상 부인이 등장한다. 심청전의 공간적 배경인 유리국의 유리가 일본어로 백합인 것처럼,

이 둘의 포즈나 표정은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극의 핵심 질문으로 삼자, 이름 없는 장 승상

부인에게 서사가 부여된다. 그녀가 왜 현숙한 부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비렁뱅이인 심청을 수양딸로 삼고자

했는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지참금 없이 늙은 장 승상에게 팔려온 장 승상 부인은 현숙한 부인이 되어서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것이 여자의 살길이라고 배운다. 남자인 오라버니보다 책도 더 많이 읽고 시도 잘 지었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그녀의 심청>에서 장 승상 부인과 심청은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는 다르지만,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라는 점에서 통한다. 이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장 승상 부인과 심청을 괴롭히는 악역인 장 승상의 며느리 역시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인물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실상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다. 정해진 규범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나쁜 여자가 된다. 원작의 악역 뺑덕어미는 혼자 아들을

낳은 탓에 나쁜 여자가 되었다. 혼자 아들을 열심히 키우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는 아들 덕이를 버린 뺑덕이라

불린다. 모두가 저마다의 고통을 가지고 있기에,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서로 돕고 희생할 줄 안다.

 

그래서 <그녀의 심청>의 주인공은 심청과 장 승상 부인 두 명이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장 승상 부인은 이 모든 구조적 불평등을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심청에게 네 아버지는 다정한 게 아니라 가장 쉬운 일을 고른 것”(30)이라고

알려주거나 승상 집에서 권력을 갖기 위해 말 한마디라도 조심하며 자신을 통제한다. 하지만 그 권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그녀의 심청>은 보여주고 있다. 장 승상 부인의 말을 따라 여자다운 몸가짐을 하게 된 심청은

효녀라는 찬사를 받지만 동시에 각종 성폭력에 노출된다. 남자들의 폭력을 고발하자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네 몸가짐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난이다. 치마 길이를 늘이고, 속옷을 더 갖춰 입는 것으로 성폭력을

막을 순 없다. 장 승상 부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규범을 최대한 이용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결국 <그녀의 심청>은 그 화려한 집을 벗어나지 못하면, 장 승상의 죽은 전 부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 승상의 죽은 전 부인과 심청의 어머니는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 신분과 질서, 성별에 가로막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 웹툰은 단 한 줄로 기록된 여성들의 이야기에

하나하나 현미경을 들이댄다. 심청이 어머니의 편지를 찾았을 때, 그녀의 이름이 연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자기 연민에 빠진 심 봉사는 그 마지막 편지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그녀의 이름을 빼앗는 것은

가부장에 다름없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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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심청>은 원작 <심청전>에서 스치듯 지나간

장 승상 부인과 심청의 관계를 파고들어 재해석한다.

 


<그녀의 심청>의 남자들은 악인이다. 늙고 힘없는 심 봉사는 어린 딸에게 기대어 살았으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약속할 만큼 어리석다. 장 승상은 손녀뻘인 부인을 들인 탐욕스러운 인물이고,

그 아들은 새어머니를 제거하고 자신이 재산을 차지할 생각만 한다. 장 승상 부인의 오빠는 기방에 드나들며

가산을 탕진하고 뒤늦게 벼슬을 얻으려 동생을 늙은 장 승상에게 시집보낸다. 몽은사의 주지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해 심청을 공양미 삼백 석이라는 함정에 빠뜨린다. 이들은 폭력적인 구조를 이용하여 심청과 장 승상 부인을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속에서 여성들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돕는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집을 나설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 후반부를 향해 가고 있는 <그녀의 심청>은 지금까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제 장 승상 부인은 높은 담을 넘어 자신의 힘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그녀가 심청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 결말이 기다려진다.

 

허윤 |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조교수.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