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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중요한 건 ‘재현의 정치’다!

비평

우리 시대에 중요한 재현의 정치’다!
유어마나 비평  <단지 – 재현의 윤리>(글/ 이오우에)에 대한 반론
 

 

박인하

 


<단지> - 재현의 윤리
링크)


유어마나에 실린 ‘이우에오’의 <단지>(단지 글, 그림)에 대한 비평은 ‘재현의 윤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첫 문단에 ‘도덕은 트래킹 숏의 문제이다’라는 뤽 물레의 글을 인용한다. 이 문장은 ‘도덕은 트래블링의 문제다’로 주로 번역되고, 고다르의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다’로 구체화된다. 도입부에서 소개한 홀로코스트 영화 <카포(KAPO)>(Gillo Pontecorvo)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고다르의 ‘트래블링은 도덕의 문제다’와 연결된다.



 

 


홀로코스트 영화 <카포(KAPO)>(Gillo Pontecorvo)


“<카포>의 극 중 엠마누엘 리바가 전기가 흐르는 수용소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는 이 장면의 미학적 마무리를 위해 철조망에 걸쳐진 그녀의 손을 트래킹 숏(움직이는 연기자를 따라가면서 일정한 숏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촬영장면)으로 담아냈다.

비평가인 리베트는 이를 ‘천함에 뛰어든 행위’라며 단호하게 비난했고, 이 이후 영화 속 재현의 윤리에 대한 논의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창작물이 사건을 윤리적으로 합당하게 다뤄야 함의 중요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피해의 사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창작물로서 나온 이상 그것은 제삼자(독자, 관객 등)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소비’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우에오는 이렇게 <카포>에서 아우슈비츠를 재현한 방식을 비판한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의 글을 받아 평론을 시작한다. <카포>의 트래블링에 대한 비판은 아우슈비츠 같은 거대한 비극을 재현할 때, 해석하지 말라는 비판이다.

세르쥬 다네(Serge Daney)는 ‘카포의 트래블링’(1992)라는 글에서 <카포>의 트래블링과 <우게츠 이야기>(미조구치 겐지)에서 도적떼가 여행자들을 공격하고, 그 중 하나가 미야기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을 비교한다. <카포>에서 트래블링으로 따라가며 응시하는 카메라는 비윤리적이고, <우게츠 이야기>의 ‘못 본척하는(pretended not to see)’ 응시는 윤리적인 재현이라고 본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영화 <사울의 아들> 씨네토크에서 <사울의 아들>이 찬반양론에 휩싸여있다고 소개한다. <사울의 아들>의 아웃 오브 포커스를 <카포>의 트래블링과 비교해, 아우슈피츠의 죽음 앞에서 그 재현은 도덕적인가를 묻는다.
 
“아우슈비츠를 영화에서 다루기 더 까다로운 이유는, 영화가 그것을 다루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재현’이라는 문제와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와 마주한 순간, 우리는 세 가지 질문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아들>에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바로 재현의 정치학, 재현의 미학, 마지막은 재현의 윤리학입니다.”

 



<사울의 아들> 대한 정성일의 시네토크
링크) goo.gl/KCtuhr

 

정성일도 <카포>의 트래블링 샷에 대한 리베트의 비판과 그를 이어받은 세르쥬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이라는 글에 나온 질문을 언급한다.

이우에오의 <단지>에 대한 비평도 리베트,  세르쥬 다네에 온전히 기대 재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제기한다.  <단지>가 재현한 가정폭력에 대해 ‘2부에서의 표현방식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며 부모에 뜻에 반한 피해자가 남동생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과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골라 소개했다. 그리고 이 장면들이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충분히 윤리적이지 못한 까닭이 ‘자극적이고’ ‘세심한 묘사’라서 ‘폭력을 전시하고 피해 사실을 납작하게 소비’하게 하며 ‘평면적인 이미지 뒤에 숨은 가정 폭력의 구조와 문제점을 간과하게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실이 스펙터클로 소비’되어버리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비평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하나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다. 앞서 세르쥬 다네는 <카포>와 <우게츠 이야기>에서 죽음을 재현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비교했다. 핵심은 어떤 방식으로 ‘응시’하느냐다. <카포>가 죽음의 비극을 트래블링으로 스펙터클하게 재현했다면, <우게츠 이야기>는 죽음의 비극을 ‘못 본 척하는(pretended not to see)’응시로 재현한다.

<단지>에서 비극을 재현하는 방식이 스펙터클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우에오는 <단지> 에서 2개의 장면을 소개한다. 하나는 피해자가 남동생에게 폭력을 당하는 장면. 하나는 아버지의 성폭력 장면이다.

인용한 장면에 대해 ‘뺨을 맞아 드라마틱하게 안경이 날아가는 컷을 시작으로 이후 두 컷에 걸쳐 황망히 쓰러진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이 두 컷은 뺨에 맞은 안경이 날아가는 장면(안경이 칸의 중심에 있고, 동생에게 뺨을 맞은 누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머리카락만 살짝 보인다)과 풀 쇼트로 잡은, 뺨에 맞아 쓰러져 얼굴을 만지고 있는 누나의 모습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정도 구성으로 비극을 스펙타클하게 재현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장면은 세르쥬 다네의 논리를 빌면, 못 본척하는 응시에 가깝다.

만화에서 액션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1)칸과 칸의 연결 (2)칸 안에서 동작의 표현으로 구분된다. 스콧 맥클라우드가 <만화의 이해>에서 칸과 칸의 연결을 총 6개로 구분했는데, 순간이동(Moment to Moment)과 동작이동(Action to Action)이 첫 번째 칸과 칸의 연결을 통한 액션, 즉 동작의 표현 방법이다.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中

 


칸과 칸에서 표시된 이미지를 이어 붙여 동작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며 칸이 연속되는 만화에서 자연스러운 연출 방법이다. 칸 안에서 동작 표현은 칸 안에 동작선이나 잔상 등을 활용해 움직임을 짐작하게 해 주는 방식이다.





택배기사 5화 中





택배기사 5화 中

 

액션연출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이윤균의 <택배기사> 5화의 한 컷이다. 남자는 왼쪽에서 들어오고, 여자는 뒤로 물러난다. 남자가 들어오는 속도감을 주기 위해 집중선이 남자 쪽으로 몰려있다. 여기에 더해 남자의 동작 잔상을 빗금과 선의 날림으로 표현했다.

소개한 컷 이후 세 번째 컷을 보면, 역시 동작을 한 칸에 묘사했는데 뛰어오르는 여자의 동세를 강하게 잡기 위해 카메라를 낮은 앵글로 잡았다. 역시 집중선을 사용했고, 박차고 뛰어오른 곳에 효과를 넣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뛰어오른 여자 캐릭터의 속도감을 주기 위해 선을 날리는 표현을 활용했고, 다른 인물들을 아웃포커스로 잡아 역시 속도감을 주었다. 그다음 컷, 그다음 컷으로 이어서 보면 왜 이윤균의 액션 시퀀스를 칭찬하는지 알 수 있다. 집중선을 넣고 빼는 건 물론이고, 동작의 분할이나, 아웃포커스의 활용 등 다양한 표현방법을 동원해 동세와 타격감을 드러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스펙터클하다고 할 수 있다.





이윤균 <택배 기사> 
링크)

 

이와 비교해 <단지>의 연출은 오히려 동작을 가능한 숨기고 여성의 비극을 드러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충격적인 장면도 두 칸에 불과하다. 어린 화자의 모습을 클로즈업한 첫 칸과 카메라가 화자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잡은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잡은 풀숏으로 구성된다. <단지>는 재현이 또 다른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 계속 경계하고, 극도로 칸을 아꼈다.

우리에게 <단지>가 필요한 건, 재현의 윤리학 이전에 재현의 정치학의 측면이다. 이우에오는 ‘이야기의 부재’라는 한계를 지적했지만, <단지>의 창작의도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는 드러나지 않은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자존감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위로한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지닌 수많은 여성이 <단지>에 공감하며 위로를 받았다. <단지>에서 중요한 건 윤리학 이전 정치학이다. <단지>가 피해자들의 정치를 위해 유용한가?

작가의 경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제보받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2부는 그런 점에서 더 정치적 재현이다. 인용한 2건의 가정폭력은 스펙터클의 맥락보다는 충격적 폭로의 정치적 맥락에 존재한다.  비평에서 인용한 아버지의 성폭력 장면을 다시 보자. 첫 번째 칸은 아버지의 성폭력으로 잠에서 깬 어린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그다음 칸에서 카메라는 머리 위로 빠진 풀 숏이다. 효과음을 과하게 느껴지지만, ‘내 턱 아래에 있는 아빠의 정수리를 봤어요’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재현된 한 컷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이고, 때론 역겹고 고통스럽지만 스펙터클하지 않다. <단지>는 1인칭 나레이션으로 고통을 고백하고, 그 고백을 들어야만 하는 우리는 고통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단지>는 가정폭력을 미학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애초에 가정폭력이 미학적으로 다룰 소재나 주제가 아니다. 작화 스타일도 능숙함보다는 거칠고 단순하다. 칸을 현란하게 나누지도 않고, 1인칭 나레이션은 거의 모든 장면에 개입한다. 숏이나 앵글도 대부분 평이하다.

<단지>에서 재현한 비극에는 <카포>의 트래블링이나 <사울의 아들>의 아웃 오브 포커스 같은 미학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는 고백이며 고발이다. 그래서 허구적 서사가 아니라 1인칭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이우에오는 ‘이야기의 부재로 이 웹툰의 감상이 동정과 분노에서 더는 확대되지 못하고 단순하게 소비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동정과 분노가 <단지>의 의도라며, <단지>의 윤리이자, <단지>의 도덕이라면? <단지> 이전에 가정폭력을 이처럼 선명하게 드러낸 서사가 있던가?

<단지>는 고발조차 불가능했던 가정폭력을 끄집어내 고발하고, 그래서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또 같은 폭력을 경험한 이들을 위로했다. <단지>에서 재현한 수많은 가정폭력의 양상들은 괴롭게도 현실의 그것이다. 현실을 재현하는데, 방식의 윤리성을 고민해야 할까? 어떻게 재현해야만, 어떻게 이야기해야만 동정과 분노에서 더 확대된 무엇을 만들어낼까?

우리가 콘텐츠에서 비극을 재현할 때, 재현의 윤리학을 고민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단지>가 아니라 비극을 포르노그라피로 재현한 콘텐츠들이여야 한다. 예를 들면 영화 <노리개>나 웹툰 <왁싱하우스>같은 콘텐츠들 말이다.

그동안 만화가 외면하고 있던, 못 본척하고 있던 현실을 <단지>는 그대로 끄집어 내 우리 앞에 드러냈다. 현실에서 끝없이 가정폭력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이 충분히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현실에서 재현의 윤리를 이야기하기에는, 그 논의를 <단지>에 투사하기에는 <단지>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너무 버겁다



<단지>
링크)
goo.gl/e2yQf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