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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글자, 그릴까? 고를까?

비평
 

만화와 글꼴
만화 속 글자, 그릴까? 고를까?
 

 

 최봉수

 
작년 여름, 타카노 후미코의 단편집 <막대기 하나>를 읽다가 만화 속 글자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작품 자체는 훌륭했으나, 의태어, 의성어 등 효과음을 비롯한 글꼴
 퀄리티가 아쉬웠다. 국내 출판만화 시장 환경을 고려했을 때 국판 발행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지만 ‘병에 걸린 토모코’ 편의 마지막 장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에 걸린 토모코> 한 장면. 일본 원작(위)과 한국판(아래). 정식 발행본은 글자의 균형이 맞지 않다. 기린맥주 간판을 보자. '기'의 'ㄱ' 아래가 너무 비었고, '맥'은 너무 크다.

 


이 작품은 병실에 입원한 어린이가 창밖 풍경 속의 간판을 서투르게 읽으며 마무리된다. 어두운 소도시 밤 풍경과 환한 간판의 불빛을 서정적인 흑백 이미지로 살려놓았다. 장면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간판의 글자다.
 
글꼴의 퀄리티를 보는 방법 중 하나는, 한 글자가 차지하는 가상의 네모 칸을 설정하고 보는 것이다. 네모 안에서 흰 여백과 검은 글씨의 면적이 이루는 모양새는 그 글자의 개성이다. 이 가상의 네모 안에 놓인 여러 글자를 나열했을 때, 여백과 글자의 면적이 모두 고르면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회색도가 고르다’고 말한다.


문제는 글자의 밀도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원작의 한자 간판들을 가상의 네모칸에 넣어보자. 가느다란 흰 선이 빼곡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어 장면에 힘을 불어넣는다. 반면 한국판은 완성도 부족한 폰트로 인해 화면의 힘이 떨어진다. '기린맥주'가 특히 그렇다. 타카노 후미코는 장면 연출에 세심한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한 만화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0여 년 전 새만화책 출판사에서 프랭크 밀러의 <300> 한국판 발행을 위해 만화가 김수박에게 효과음 작업을 맡겼던 것과 대조적이다. 직접 그리느냐, 폰트를 고르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폰트를 고르더라도 더 적절한 것을 골라서 넣어야 했다는 말이다.
 
종종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글자는 만화를 이루는 중요한 하나의 요소다. 대사 외의 모든 소리 정보를 담당함은 물론이고 의성어 의태어와 같은 비언어적 정보까지 전달해준다. 위의 예시처럼 특수한 연출을 위한 방법으로도 동원된다.
 
출판 만화가 대세였던 시절, 글자는 그림의 연장선이었다. 예비 작가들은 글자 그리기 훈련은 필수였다. 깔끔하고 균형감 있게, 모양을 맞춰 그리거나 감정이나 액션의 속도감을 그대로 담아냈다. 이는 타입 디자이너가 글자 도안을 그리는 레터링과 비슷한 접근이다. 한때 극한의 작화를 추구했던 젊은 윤태호의 야심작 <야후>를 보면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야후> 1권의 한 장면. 글자가 장면 연출에 적극적으로 일조한다.

 

국내 만화계의 창작 패러다임이 출판만화에서 웹툰으로 넘어간 2010년대, 만화의 글자는  ‘그리는 대상’이 아닌, ‘선택하는 대상’이다. 폰트를 잘 고르기만 하면 무리 없이 소기의 목적을 훨씬 간편하게 달성해준다. 비록 개성 표출의 가능성은 크게 줄어들지만, 시대적 흐름에 맞는 방법론의 변화라고 본다.

여전히 글자를 직접 그리는 작가들도 있다. 출판만화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가는 <고수>의 문정후 작가 사례가 그에 속할 것이나, 이는 예외적 경우다.
 



최근화까지도 직접 글자를 그리는 것이 보인다. 연출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재의 웹툰 창작 풍토를 돌아봤을 때, 폰트 사용은 당연한 흐름으로 보인다. 먼저, 극대화된 작화의 효율성을 보자. 효과선이나 집중선은 이미 오래전에 ‘클립스튜디오’ 같은 프로그램으로 자동생성 가능해졌다. 배경 작업은 건축용 3D 그래픽 프로그램인 ‘스케치업’을 이용해서 손 그림을 대신하기도 한다.

심지어 작화 전체를 3D 그래픽으로 작업해 시스템화한 천계영 작가의 <좋아하면 울리는>과 같은 케이스도 있다. 이런 시대에 작품 속 글자를 일일이 손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불합리한 접근이다. 웹툰 연재의 살인적인 스케줄까지 생각했을 때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이지만 조잡한 폰트를 썼다간, 컷을 아예 망쳐버린다. 이때 소위 검증된 폰트가 구원책이 된다.
 



<갓 오브 하이스쿨>의 한 장면. 사소한 해프닝이었지만, 먼 미래에 만화 글자 미시사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웹툰 시대를 설명하는 자료로 삼을 만하다.

 


위 사례의 윤고딕은 실제로 두루 쓰이기에 무난한, 좋은 폰트다. 액션 장면의 효과음에 제격까진 아니지만, 어차피 폰트 회사에서 만화 액션에 특화된 폰트를 일부러 개발하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어쨌든 실패하지 않는 안전한 선택지라 할 수 있겠다.
 
현재 폰트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국내 웹툰 작가는 누가 있을까. 금방 떠오르는 작가는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이다. 제목, 본문, 효과음, 배경의 간판 등 모두 작가의 안목으로 추려졌고, 만화의 완성도를 극명하게 끌어올리고 있다.
 



<혼자를 기르는 법>. 플랫폼은 폰트 회사와 연계해 작가들에게 만화를 위한 폰트를 제공한다. 김정연 작가에게 문의한 결과 플랫폼 제공 외의 폰트를 따로 결제했다고 한다. 시각 디자이너 출신인 만큼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만화가로서는 드문 일이다.

 


이제 글자와 관련해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타입 디자이너의 능력보다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그것에 더 가까워졌다. 바로 시각적 선택과 배치에 대한 조율 감각이다.
 
창작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은 전체적인 방법론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글자와 관련해서도 접근 방식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즉, 고민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단편집 <막대기 하나>에서 글자와 관련해 마음에 걸렸던 부분도 이러한 맥락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읽기에 무리 없는 폰트라고 해도, 장면의 의도와 어울리지 않는 무성의한 선택은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다시 강조하지만, 만화 속 글자는 정보의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직접 그리는 기예적 방식을 고집하든, 폰트를 고르는 효율적 방식을 택하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YOUR MANAⒸ최봉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