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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셔로

비평

캐셔로
돈이 곧 힘인 히어로! 그런데 돈이 없다!
 

선우훈
 

<캐셔로>(team befar, 다음)에는 돈이 곧 힘인 영웅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약점은? 주인공에게 힘을 줄, 그 '돈'이 없다는 것.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언제나 약점을 갖고 있다. 트라우마와 윤리에 얽매이는 배트맨, 크립토나이트 행성에서 온 슈퍼맨, 가슴에 핵융합로를 가진 아이언 맨.

 

매스 미디어 등장 이후의,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히어로’에게만 약점이 있는 건 아니다. 스틱스 강에 발뒤꿈치를 담그지 못한 아킬레우스부터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아기 장수 우투리까지, 영웅들은 결함을 타고난다.

 

약점이 존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흥미로운 갈등 구조를 유발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공감하기 위함이다.

 

또한, 영웅들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힘을 가졌지만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다. 영웅이 난관을 딛고 일어서거나 몰락하는 동안, 우리가 공감하거나 연민할 수 있는 이유다. 영웅들은 인간적 면모를 드러낼 수밖에 없으며, 드러내야만 한다.

 

다음 온라인 만화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고 연재된 <캐셔로>(team befar)는 코미디 히어로물이다. 제목처럼 돈을 가진 만큼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초인의 약점이 '생활고'라는 발상은 다른 히어로물과의 차별점이기도 하고, 서사의 동력이기도 하다. 주인공 강상웅, 강상안 남매가 겪는 상황이 우리의 약점과 같아서다.

히어로물과 일상의 고단함을 겹친 것처럼, 만화는 생경하고 부조리하다. 4컷이라는 가벼운 형식을 
높은 밀도의 그림으로 채운다. 대사가 적을 때는 대비적 효과가, 대사가 많을 때는 어우러지는 효과가 난다. 작품이 일관적으로 따듯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도 둥글고 부드러운 선과 꼼꼼한 채색 덕이다. 한 마디로 신선하고 재밌고 귀엽다.



 

생활고에 공감 못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실과 다른 점

 

이야기는 주인공 강상웅이 어느 날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고, 동생 강상안에게 그 사실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바로, 현금이 많을수록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부모 없이 고등학생 동생과 사느라 많은 현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최근에야 알았다.

 

매일 식비 지출을 걱정하고, 캔 커피조차 사치인 남매에게 초인적 능력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고, 능력이 알려지면 귀찮을 게 뻔하다. 초인적 능력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은 계단 6층을 순식간에 올라가서 체력을 과시하고 취업에 성공하는 정도다.


 

초인적 능력으로 한다는 게 겨우 취직이다.



 

<캐셔로>의 세계는 현실과 같다. 아직 맞서 싸울 다른 능력자나 악의 조직은 없다. 능력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보다는, 신체가 매우 강해진다는 설정이다. 초인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단함은 여전하다. 경기는 침체되고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임대료는 비싸고 실업률은 높다. 가난할수록 나가는 비용은 많고, 성실하게 일해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상황과 조건에 따른 판단은 언제나 자원의 득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눈앞에 위험한 사람이 있다면, 득실을 계산하기 전에 어쨌든 사람을 살리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캐셔로>의 주제는 결국 ‘내 상황과 관계없이, 남을 돕는 걸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인지, 등장인물들은 뻔뻔할 정도로 착하다.


 




너무 착한 초인들. 돈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강상웅(위)과 술로 능력을 발휘하는 윤수오(아래).



 

작품의 주제를 언뜻 이해할 10화 이후 쯤, 마침 돈과 관계없는 다른 능력을 가진 인물이 나온다. 이번엔 술을 마시면 신체 능력이 강해지는 미성년자 ‘윤수오’다. 가정 폭력을 겪고 있지만 착하고 꿋꿋한 성정을 가진 수오는 사람을 구하다 상웅과 만난다.

 

상웅, 상안 남매와 수오는 곧장 유사가족을 이룬다.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능력과, 선의를 가진 사람들. 이들의 연대는 자연스럽다. 1부는 상웅의 입대로 마무리되지만, 이들의 만남으로 <캐셔로>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 잘 지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선의로 포장된 길



<캐셔로> 2부. 선대 히어로의 과거 회상과 교차 편집했다. 위의 두 컷은 선대 히어로의 과거, 아래 두 컷은 현재다.



 

2부는 초인 능력이 대물림 된다는 점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현금에 비례하는 신체 능력을 가지는 선대 히어로가 둘 이상 있었다는 설정. 이제는 노인이 된 히어로 ‘김종석’은 강상웅에게 그 능력을 전달했다. 또 다른 히어로, '이호정'은 자신의 능력을 전할 인물을 찾아 나선다. 20대 초반의 백수 ‘김민현’이 능력을 전해 받는 에피소드와, 선대 히어로의 활약이 번갈아 그려진다. 연애 상대에게 품는 애정의 크기가 곧 신체 능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히어로 ‘신의명’도 등장한다.

 

1부와 달리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진행하지 않고, 또 다른 히어로 신의명의 얘기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구성이 복잡하다. 실제로 독자들의 불만이 있었다. 인물들은 특수한 사연을 가진 경우에도 대화를 통해서만 정보를 밝히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4컷 구조가 이야기의 무게와 엇갈린다. 원인은 다양하다. 정보를 공개하는 속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설명의 범위일 수도 있고 시간순의 배열 문제일 수도 있다.


 

과거에 함께 납치되었던 두 인물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는 설정. '사건'이 아닌 '대화'로 설명한다.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한두 번 다시 정독하면 흐릿하던 부분들이 서로 조각을 맞춰가며 이야기를 완성한다. 특히 2부 후반에는 모든 인물의 사연이 현재와 맞물리고, 일상의 순간에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 작가진의 실력이 다시 빛을 발한다. 1부의 미덕을 넘어서 비장함과 긴장을 더했다.

 

복잡한 구성의 원인은 기술적 미숙함이 아닐 수도 있겠다. 잠깐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70년대에 활동한 선대 히어로들은 갈등을 겪었다. 김종석은 자신의 능력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돈을 벌려 하고, 이호정은 그를 말리느라 싸우곤 했다.

 

이호정은 그렇게 싸우고 나서도, 탄광이 무너졌다는 뉴스에 다시 김종석을 찾아가 사람을 구하자는 인물이다. 연락이 끊겼던 김종석은 노인이 된 지금 이호정을 찾아와 그때를 이야기하며 감사를 표한다. 김종석의 이야기 덕분에 이호정은 덕분에 ‘돈이 없어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돈을 모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돈과 능력을 좋은 일에 써줄 젊은이를 찾아 나서고, 우연히 만난 김민현에게 능력을 전한다.

 

공교롭게도, 이호정이 김민현에게 능력을 전달한 이후부터 만화를 읽기가 수월해진다. 선대 히어로들의 활약을 꼭 회상을 통해서만 전달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여전히 추측에 머물지만, 70년대에 활동한 히어로를 상상하다 보면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시기에 억울한 죽음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과거를 씁쓸하게 회상하는 호정.



 

이호정은 탄광에서 사고로 죽은 열세 명과 가까스로 살려낸 한 명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준 반지까지 전당포에 맡겨가며 현금으로 힘을 발휘하는 히어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와 사람의 목숨이 구별되는 건 언제부터일까? 이호정은 기나긴 독재와 80년 광주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다못해 진실을 전하지 않은 언론에 대한 분노도 없이, 이호정은 백발이 될 때까지 묵묵히 돈만 모은다.
 

이호정의 기억이 드문드문 회상으로 처리되는 것은, 이러한 인지적 공백을 무마하기 위한 장치로도 보인다. 강상웅과 김민현의 구명 활동이, 정치와 구분될 수 있는 알리바이기도 하다. 현재의 힘이 정치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과거의 힘이 정치에서 자유로워야만 했던 셈이다. ‘정치적으로 표백된 선의’가 캐셔로의 영웅들이 합의한 선의의 방향이라면, 그 선의로 포장된 길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작가진이 이 문제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이호정은 해외의 내전 소식에도 관심을 보이고, 노인이 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고공시위 현장에 몰래 다녀가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들은 공백을 보완하기보다, 작가진이 공백의 문제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단서에 가깝다.


<캐셔로>의 출발점이 현실의 모순에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이 없었더라도 정치적 문제들이 생각났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맞추는 게임을 하자는 게 아니다. 히어로와 현실의 모순이 실제로  연출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정치적 표백이 앞으로도 작품에 영향을 미칠 때만 이 지적에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언제나 정치다

 

작품 후반 얘기를 해보자. 강상안의 짝 미선은 상안에게 아이디어를 받아 ‘캐셔로’라는 제목의 소설을 웹에 연재한다. 그런 미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이 온다. 지반연구소 연구원이 연구소에 싱크홀 발생의 위험을 경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연락한 것.

 

상안은 히어로들을 모으고, 교통을 차단하고 인위적으로 싱크홀을 발생시킬 계획을 세운다. 두 선대 히어로에게 능력을 전해 받은 강상웅과 김민현, 신의명과 윤수오는 한자리에 모여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며 싱크홀을 만든다. 아무런 확신도 상관도 없이, 지나쳐도 될 일을 굳이 나서서 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1부의 끝이 상웅, 상안 남매와 수오가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받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부의 끝은 선의의 연대를 보여준다.

 

이제는 정말 정치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스토리 작가는 1부 후기에서 <캐셔로>가, ‘응당 시스템이 대처해야 마땅할 사회의 구멍을 스스로 메꾸는 경험을 해보았을 여러분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2부가 끝난 지금은 다르게 들린다.

 

적이 없는 초인들의 세계에서, 극단적인 위협은 재난뿐이다. 재난을 막는 것은 시스템이 응당 대처해야 마땅할 일이며, 히어로는 곧 시스템의 대변자가 된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일단 살리고 보는 수오(위)와 현민(아래). 본인들도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상웅, 상안 남매와 수오가 겪었던 환경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일 수 있다. 연민을 가진 이들이 시스템 자체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현민과 수오가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서 목숨만 살리는 것은, 그들을 다시 부당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아닐까?

 

생활고가 명백히 존재하는 <캐셔로>의 세계는,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 1위를 달리는 지금의 한국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목숨을 버리는 선택의 어디까지가 개인의 의지이며 책임인가. 우선 살리고 본다는 발상은 지하철 스크린 도어나 창문 철창보다 온도가 약간 높을 뿐이다.


 

세상을 지키는 히어로

 

히어로는 결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세상을 지키기만 한다. 선악 구도 위에서 스펙타클한 액션을 펼치는 히어로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은 이방인, 외국인, 명백한 중범죄자들, 외계인, 악당을 응징하는 것으로 정의를 설명한다.

 

이는 결국 히어로물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근원적 질문과도 닿는다. 사회 질서를 해체하는 이들만이 히어로의 적이라면, 히어로는 인격화된 시스템이다. 히어로는 결코 스스로 장비를 사는 소방관이 될 수 없다. 스스로 장비를 사야하는 제도를, 절대 악으로부터 지킬 뿐이다.


 

히어로는 곧 정부이자 사회, 시스템이다. 

 


 

모든 히어로가 정치 운동을 시작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웃음의 시작점이 현실의 모순이었기에 그냥 둘 수는 없다는 얘기다. 악의 비밀 조직을 등장시켜 갈등 구조를 단순하게 만드는 일은 뻔하지만 쉬운 돌파구다. <캐셔로>도 이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해냈듯이 뻔하지 않게 재밌을 수 있다고 믿는다. 혹은 선대 히어로가 체제에 저항했던 모습이나 히어로의 고민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화려한 복장으로 정체를 숨기고 시스템을 예외적으로 농락할 수 있다면, 체제의 저항자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퀴어가 되거나 빅브라더가 되거나. 과연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언제쯤 마주할까. 아니면 어떻게 그 순간을 계속 모면해 나갈까. <캐셔로>가 이 시대의 새로운 영웅 서사가 되길 바라며, 3부를 기다린다.





 

YOUR MANAⒸ선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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