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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로럼 프로히비토럼: 여자 인생을 망치는 책들③ 자학의 시

리브로럼 프로히비토럼: 여자 인생을 망치는 책들③
(Librorum Prohibitorum: '금서'를 의미하는 라틴어)

 

자학의 시
보다 능동적으로 여자 인생 망하기 


 

에티앙


가난하고 외롭게 자란 유키에는 자신에게 기생하는 남자를 통해 존재의 의의를 얻는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받아야만 최소한의 자존감이라도 유지되니까.


 


“우리 그이는 무직인 데다 갑자기 화를 내며 식탁을 뒤엎지만, 내 배에는 닿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근본은 착한 사람입니다.”
 
남자가 밥상을 뒤엎으면 여자가 쩔쩔매며 치우는 일상이 반복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미쳤는가보다.

 

 

유키에는 인생이 망했다 

 

일본. 못생긴 중년 여자가 남자를 부양하며 산다. 남자는 전직 야쿠자에다 무직이고 도박 중독이다. 얹혀사는 것도 모자라 여자가 숨겨둔 생활비를 훔쳐 술을 마시고, 밥을 차려주면 맛이 없다고 상을 뒤엎는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다. 여자의 꿈은 사랑하는 그이와 혼인 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다. 
 
유키에는 어렸을 적에 똥꼬가 찢어지도록 가난했다. 어머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일을 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키에는 초등학생 때부터 우유나 신문을 배달하고 꽃 모형 만드는 일 따위를 하며 아버지를 먹여 살렸다. 학교에선 더럽고 칙칙하다고 왕따 당하고, 무능한 아버지는 결국 창녀랑 놀아나다가 은행 털이범으로 구금당했다. 유키에는 도쿄에 올라와서 몸 팔아 벌어 먹고살다가 약물 중독에 이르고 자살도 감행한다. 
 
그러다가 딱 하나 얻어걸린 게 자기한테 약을 팔던 남자, 이사오였다. 유키에는 이사오의 사랑한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매일같이 착취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유키에는 그런 여자다. 그런 여자가 자기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유키에는 불행해야만 한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부양하면서, 지금은 이사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유키에는 사랑할 대상을 찾는다. 유키에는 바로 그 힘으로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낸다.



 

<자학의 시>는 멍청하고 가난한 데다 못생기기까지 한 여자의 삶을 거의 편집증적으로 재현한다. 아기자기한 듯 신랄한 그림과 네 컷의 작은 프레임 덕분에, 끔찍한 현실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자학의 시>는 정말로 나쁜 만화다. 차별로 점철된 여성의 현실을 희화화하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은 눈곱만큼도 제시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더 나쁜 건 주인공인 유키에의 태도다. 여성으로서의 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노예적 감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자신을 착취하는 이사오에게 사랑을 느낀다. 
 
유키에는 불행하다. 유키에가 뭐라고 하든 유키에는 폭력의 피해자이며 구조의 희생양이다. 유키에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그냥 그렇게 느끼도록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이사오를 사랑한다는 믿음 역시 애정 결핍에 의한 방어 기제이며, 내재적 여성 혐오이고, 스톡홀롬 신드롬이다. 유키에는 마음이 병든 여자다. 그게 옳다!  
 
서구적 페미니즘 이론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세계에 감히 여자로 읽히는 몸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부터가 참으로 경을 칠 일이 아닌가!  

 

행복한 여성, 훌륭한 서사 

 

그렇다면 왜 여자의 인생이 행복해야만 하는가? 서사가 제시하고자 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절대로 불행해선 안 되는가? 온 인류가 고통스러워서 미쳐가고 있다면 그 와중에 여성만 행복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유키에가 남편에게 속 시원하게 일침을 가하고 집을 뛰쳐나와 낙태를 감행한 후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국가 보조금으로 전문대학을 다니고 틈틈이 여성학에 대한 책을 찾아본다면, 이 이야기가 더 진보적이고 더 페미니즘적이고 더 '훌륭'해지는가? 
 
유키에가 성차별적 구조에 순응한다고 해서 독자들에게도 함께 순응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독자가 허구적 인물의 행동을 종속적,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서사의 노예라고 상정할 것인가? 노예적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와 교훈을 제공하지 않는 책은 나쁜 책인가? 
 
그렇다면 <자학의 시>는 정말로 금지되어야만 할 책이 맞다. 

 

 

훌륭하고 행복한 여성되기 

 

<자학의 시>가 금지된 사회에서 여성은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여자, 일하는 아버지,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 가사를 돕는 아들,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일상생활에 지장 받지 않을 정도의 착한 독서를 하기.
유키에가 조금만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게 싫다면 다른 걸 해도 좋다. 이분법적 젠더론을 부정하는 두 생물학적 여자가 적당히 좁은 집에서 함께 살기. 돈을 조금 벌어도 지적이며 즐거운 일을 하고, 결혼이라는 폭력적 제도에 순응하는 대신 고양이나 개를 키우기.

유키에도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면 이처럼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보다 능동적으로 여자 인생 망하기 

 


유키에는 세상에서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행복할 권리와 의무를 거부한다.




 

"뭔가를 얻으면 반드시 뭔가를 잃게 됩니다. 뭔가를 버리면 반드시 뭔가를 얻게 됩니다. 단 하나뿐인,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어떨까요? 우리는 울부짖거나 두려움에 꼼짝 못 하거나... 하지만 그게 행복이다 불행이다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젠 인생을 두 번 다시 행복이냐 불행이냐 나누지 않을 겁니다." 
 
유키에는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다. 자기 인식이라는 위대한 근대적 특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 버린다. 서구 사회가 지정한 훌륭한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즉 계속해서 옳고 그름을 분류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행복을 쟁취하는 삶을, 가장 일상적이고 상투적이면서 수동적인 '유키에만의 언어'로 거부한다. 
 
유키에는 그 선언을, 주소지가 불분명한 어머니에게 부친다. 유키에의 어머니에게 편지가 닿기나 할지, 유키에의 어머니가 편지를 뜯어서 읽고 이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유키에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언어와 타인의 언어를 일치시키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유키에는 결국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별로 없는 여자'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허덕인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혹독한 현실을 극복하고 차별에 맞서 싸우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자주적’인 시민으로서 ‘평등한’ 사회를 일구어 나가야만 하는데, 유키에는 이것도 저것도 힘드니 현상 유지나 겨우 하며 애나 낳아 기르겠다는 것이다.
 


유키에를 기다리는 불행의 굴레. 그러거나 말거나 유키에는 기뻐 보인다.



 

유키에의 세상에는 페미니즘도 없고, 행복도 없고, 돈도 없고, 정신적 교류도 없다. ‘서발턴’은 고사하고 ‘피해자’나 ‘소수자’ 같은 말조차 없다. 말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당한 게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자학의 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서로 기만하고 질투하고 서운해 하고 착취하면서 그냥 구질구질하게 함께 살아간다. 이성적 소통과 정신적 사랑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이다.



 

<자학의 시>의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면서도 그냥저냥 살아간다.



 

 

그러니까 더욱 마음 놓고 금지하자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모두 그렇지 않은가? 내가 말한다고 뭐 말이 통하는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 사람들을 상대로 왜 여성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교육 받고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자각하게 되면 행복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가?
 
그런 삶이 더 낫다, 더 진보했다고 정의하는 자는 누구인가? 인류는 정말로 진보해왔는가? 진보가 뭔가? 보다 많은 사람이 보다 백인 중산층적인 삶을 산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백인 중산층은 뭔가? 백인 중산층은 다 똑같은 대리석 탁자에서 똑같이 하얀 빵을 먹으며 똑같이 하하호호 웃는가?
 
우리는 왜 전 인류가 한 가지 언어로, 그러니까 '나'의 언어로 대화해야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좇느라 밥을 굶는가?  
 
사실은 그나마 먹고 살 만해서가 아닌가? 정말로 맞아 죽은 여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못한다. 너무 우울하고 막막해서 밥이 안 넘어가는 것도 자기 힘든 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다. 
 
내가 <자학의 시>를 금서로 지정하거나 말거나, 유키에는 벌어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만화 캐릭터인데 뭐. 

 


 

YOUR MANAⒸ에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