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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툰과 퀴어한 웹툰 사이 

비평

퀴어툰과 퀴어한 웹툰 사이 

 

허이모


기점: 임시 규정 

‘퀴어 웹툰’, 혹은 ‘퀴어툰’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퀴어 웹툰’(이하 ‘퀴어툰’)을 정의하는 문제는 대단히 까다롭다. 수많은 이유 중 두 가지만 말해본다.

첫째, ‘퀴어’라는 개념이 고도로 정교화된 학술적 비평 양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둘째, 광의의 웹툰 독자들이 생각하는 퀴어툰의 용례 자체가 하나의 정의 아래 포섭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BL'이나 '백합'이 아닌 당사자성을 그린 웹툰을 퀴어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어서오세요, 305호에>(와난, 네이버)는 퀴어툰이다.

또 다른 혹자는 작가 당사자가 성소수자이며, 자신의 일상을 그린 웹툰을 퀴어툰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완자가>(완자, 네이버), <이게뭐야>(지지, 다음), <네 쪽의 관점>(이우인, 허핑턴포스트)과 같은 일상툰이 이에 속한다.

좀 더 넓게 영역을 잡는 이들은 성소수자 작가가 가상의 성소수자를 그리고 꾸며낸 웹툰 또한 퀴어툰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맨스는 없다>(이우인, 레진), <거울아 거울아>(다드래기, 레진) 등이 그 예다. <여자 제갈량>(김달, 레진)도. 

제시한 사례들만 보자면 퀴어툰은 리얼 버라이어티 쇼와 유사한 장르다. 시트콤과 달리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서는 연예인들이 각자의 이름표를 달고 자기 자신을 쇼로 보여준다. 퀴어툰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캐릭터도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성소수자의 한 단면을 비춘다. 이때 그 뿌리는 현실에 박혀 있다고 가정된다.

퀴어툰이 BL이나 백합과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현실과의 연관성이다. 만약 퀴어툰이 성소수자의 현실을 재현하는 장르에만 머문다면, 퀴어툰에 성소수자의 ‘당사자’ 웹툰이라는 딱지를 얹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퀴어툰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고민은 그 웹툰이 당사자성을 얼마나 지니고 있냐는 질문으로 바뀔 수 있다.

두 가지를 증명하고자 한다. 첫째, 퀴어툰에는 당사자 웹툰으로서 퀴어툰이 공유하는 패턴이 존재한다. 둘째, 이 패턴 때문에 퀴어툰은 성소수자의 현실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게이 작가가 그린다고 알려진 세 작품의 유사성을 분석할 것이다. 세 작품을 통해 앞서 말한 두 가지 주장을 예증함으로써, 취하고자 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퀴어툰은 당사자성에 천착해서는 안 된다."

 

골방 속의 벽장 — <이게뭐야> 

<이게뭐야>의 전개는 현실 커플의 삶을 쫓아간다 
 

 


 

<이게뭐야>(지지, 다음, 2014-)는 지지와 로별의 남남 커플 연애를 다룬 일상툰이다. 일상툰의 특성상, 전개는 현실의 두 커플을 쫓아간다. 시즌 4·5처럼 두 사람이 이별 위기를 겪을 때는 웹툰 분위기가 암울해진다.

시즌 6 ‘로별뎐’에서 보듯, 작가 지지의 애인인 로별이 스토리 작가를 맡기도 한다. 연애를 웹툰으로 그리는 일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거나 화해하는 장면이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재밌는가? 

만약 주변에 게이 커플이 있다면 이 훨씬 더 내밀한 연애담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이 웹툰에서 의외성과 재미를 느낀다면 그 이유는 아마 ‘주변에 연애 중인 게이 커플이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뭐야> 독자들 주변에 게이 커플이 정말 없을까? 있어도 의미는 없다. 그들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뭐야>의 재미는 내가 모르는 게이의 연애담을 훔쳐보는 데서 온다. ‘게이들은 이렇게 다르구나!’ 아니면 ‘게이들도 이런 건 똑같구나!’와 같은 감상이 이 작품이 주는 재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서술이 의심스럽다면 <이게뭐야>의 댓글 창을 살펴보자. 

하지만 이 웹툰은 게이 라이프를 훔쳐보기에도 그리 좋은 수단은 아니다. 두 사람의 성소수자 지인은 매우 적고, 작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싫어한다.

지지 작가는 37화 ‘이상한 나라의’를 포함한 웹툰 곳곳에서, 또 인터뷰에서 여러 번 자신의 입장을 피력해왔다. 작가의 말이 가장 조리 있게 정리된 인터뷰를 참고해보자.

“예전엔 어떻게 해야 나를 숨기면서 또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나를 드러내지 말아야지' 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성정체성보다는 일상툰 작가로서 그러는 게 맞는 것 같다.” - <웹툰가이드> 인터뷰(링크) 

 

<이게뭐야>는 결국 ‘벽장’이라는 은유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길 꺼리는 작가가 그렸기 때문이다. 즉, 이 웹툰에서 지지와 로별의 삶에서 게이로서의 삶은 점차 부차적인 것으로 물러난다. 둘째, 한국 게이 사회의 ‘벽장’이 공고한 까닭에 이 웹툰이 재밌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뭐야> 제37화 ‘이상한 나라의’ 중 한 컷. '인식의 벽장'은 게이의 삶과 게이가 아닌 삶을 구분할 수 있다는 환상을 소망한다. 하지만 어떻게 삶이 둘로 쪼개질 수 있는가? 결국 인식의 벽장은 게이로서의 삶을 일반적 삶의 서사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구획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영토를 구획하는 벽장 — <로맨스는 없다> 

 

<로맨스는 없다> 마지막회 커버. 배경으로 그려진 건물은 이태원의 '해밀톤 호텔'이다.



 

둘만의 일상이 아닌, 게이들의 커뮤니티를 그리는 작품을 보자. <로맨스는 없다>(이우인, 레진, 2014-2017)는 게이 작가가 게이들의 섹스 판타지와 라이프를 그렸다. <이게뭐야>와 반대로, <로맨스는 없다>는 한국 게이 문화에 매우 밀착된 콘텐츠다. 게이들 사이에서, 게이 커뮤니티에서 ‘꼴리는 상황’으로 가정된 판타지가 그려진다.

주인공은 에피소드마다 매번 바뀐다. 그들은 고교 동창, 군대 선임, 선배, 후배, 옆집 형, 공대생, 운동 선수, 의사, 농부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불현듯 마주치는 판타지의 대상과 섹스를 한다. 게이 독자들이 선호하는 두툼한 육체가 전시되고, 섹스 장면은 일반적인 BL에 기대되는 바보다는 더 격렬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게이 작가가 그렸기 때문에 이런 묘사는 좀 더 쉽게 사실성을 획득한다. 같은 이유로 사실성이 부족하더라도 ‘만화적 연출’이라는 정당화가 더 쉽게 일어난다. 

이 만화는 게이 커뮤니티 친화적이고 그리는 대상도 게이들의 섹스이기 때문에 <이게뭐야>처럼 쉽게 ‘벽장’을 연상시키진 않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섹스가 일상에서, 우연히,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다. 곧, 많은 캐릭터들에게 친구나 커뮤니티라는 배경을 주지 않는다. 이 점에서 <로맨스는 없다>가 그리는 게이의 연애는 <이게뭐야>와 유사하다. 우연한 만남, 둘만의 세계, 혹은 섹스. 

누군가는 <로맨스는 없다>에서도 이태원의 클럽이나 종로의 게이바, 파고다 극장 등이 다뤄진다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게이 커뮤니티도 이태원·종로라는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게토에 가깝다. 이들과의 친분이 일상으로 흘러넘치는 일이나, 주인공의 일을 잘아는 '비 게이' 친구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때, 벽장 속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주체는 주인공 혼자가 아니라, 주인공을 포함한 한국 게이 사회 자체다. 벽장 속의 로맨스는 벽장의 끝에 다다르면 그 생명력이 다하게 마련이다. 수많은 에피소드에서 두 사람이 오래 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커플로 유지되는 경우에도 이웃 사람들이 형제나 친구로 착각하는 그런 관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될 뿐이다. 

 

 

벽장 속에서 펼쳐지는 스펙타클한 판타지 — <동성극장> 

 

<이게뭐야>와 <로맨스는 없다>는 정체성을 숨긴다.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교류를 막아서는 벽장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작가의 역량을 탓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 지지 · 이우인 두 작가는 사실로 '여겨지는' 것을 다룬다. 퀴어툰 작가로서 그들은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 익히 가정되는 ‘진정성’을, 이 경우엔 ‘진짜 게이들의 삶’이라고 상상되는 이미지를 충실히 묘사한다.
 

하지만 <이게뭐야>를 살펴보며 말했듯, 이런 ‘진정성’이 유의미해지는 까닭은 현실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일반’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인식의 벽장’ 속에 있다. 작가 자신이 오픈리 게이더라도 이런 '인식의 벽장'에서 빠져나오긴 어려운 일이다.

그 순간 퀴어툰이 보여줘야 할 ‘진정성’이 훼손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묘사될 만한 것만이 묘사될 수 있다. 너무 민감한 소재, 너무 내밀한 이야기, 너무 과격한 판타지는 모두 그릴 수 없다. 그릴 수 있는 폭이 좁다 보니 질리는 것도 금방이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걱정하는 게이가 영화관에서 게이 섹스 판타지를 홀로 감상한다. 


 

이런 자체 검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듯하다. 하나는 독자를 한정 짓는 것이다. 웹툰 플랫폼 ‘까만봉지’(http://www.kkatoon.com, 이하 ‘까툰’)는 게이들을 위한 웹툰 서비스를 지향한다. 소위 ‘썰’을 올리는 게시판도 있는데, ‘썰’은 만화의 소재로도 쓰인다.

까툰에서 인기순으로도, 판매순으로도 첫 번째 칸을 차지하는 <동성극장>(변천, 까만봉지, 2015-)은 <로맨스는 없다>보다 훨씬 더 과감한 섹스 판타지를 전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액자식 구성이다. 게이들의 섹스 판타지를 반영한 에피소드는 사실 상영 중인 영화다. 그리고 이런 판타지의 관찰자, 즉 관객은 단 한 명의 클로짓 게이로 상정된다.


섹스 판타지 블록버스터가 아무리 장황하고 장엄하게 펼쳐지더라도, 그것은 스크린 안에서의 사건이며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액자식 구성은 까툰이라는 플랫폼의 운영 방식과 동형 구조를 이룬다.

나만이 열어볼 수 있는 모바일/PC에서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웹툰이 까툰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그 플랫폼 내에서 해소될 뿐, 그 밖으로 뻗어 나가진 못한다.

판타지를 증식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이 삶 안에서, 현실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 공지마저 연극적으로 연출된 변천의 <동성극장> 

 


 

퀴어툰에서 퀴어한 웹툰으로 

 

판타지를 판타지로 남겨놓는 것은 '벽장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퀴어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선 '벽장의 논리'만을 반복해선 안 된다. 이 말은 '벽장의 논리'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금지 명령이 아니다. 좋든 싫든, 누구도 '벽장의 논리'를 끼고 성행했던 야오이라는 또 다른 장르의 장구한 역사와 그 가치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작가가 오픈리 게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로맨스는 없다>가 보여주듯이 오픈리 게이 작가라도 '인식의 벽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다. 

인식의 전환에는 어떤 요소들이 수반되는가. 당사자성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퀴어툰을 반드시 당사자가 그리거나 당사자를 다루는 것으로 정의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박지은, 네이버, 2014-)와 같은 작품을 젠더 이행성에 대한 우화로 읽을 수도 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기묘한 관계들이 웹툰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퀴어툰의 이름 아래 환영할 수 있다면, 이는 무척 달가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당사자성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말 역시 당사자성을 완전히 부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최선의 사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익히 알려진 예를 들어보자. ‘ㅍㅍㅅㅅ’(ppss.kr) 연재작 <주간 퀴어라이프>(BearSun·하현, 2016-)의 제20화 논란이다.

제21화 말미의 작가 사과문을 빌리자면, “스스로 바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게이를 만난 뒤, 등장인물들이 우리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며 웃는 장면” 때문이었다. 20화가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이 만화 전반에 펼쳐져 있는 여성혐오적 표현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제21화에 동봉된 사과문은 이 모든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담고 있다. <주간 퀴어라이프> 21화(링크)


 

 

<주간 퀴어라이프>에서 논란이 됐던 장면. 바이섹슈얼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이 만화가 묘사하는 현실은 분명히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이다. 문제를 제기한 이들도 이러한 묘사의 비윤리성을 문제 삼았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수많은 바이섹슈얼들이 겪었던 편견의 상황을 재현한다는 게 문제였으니 말이다. 즉, 사소한 섹스 판타지를 묘사하면 현실적이라고 갈채를 받지만, 어떤 사실은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 논란은 무엇을 시사할까? 단순히 게이 작가가 바이섹슈얼을 다룰 땐 조심해야 한다는 점? 그보다는 이 묘사가 야기한 불쾌함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주간 퀴어라이프>의 묘사는 '소수자 정체성'에 있어서, 게이와 바이의 정체성 서사가 서로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만약 정체성이 경험과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속성이라면 이런 묘사에 불쾌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A가 아니다/없다’는 말로 A임을 부정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선언에 대한 머뭇거림 때문에 바이섹슈얼이라는 기표에 자신을 동일시했었다고 기억하는 게이들은 ‘정말로’ 존재한다. 

 

어떤 표현을 금지하고 가로막는 일은 쉽다. 하지만 표현의 금지만으로는 사건의 발생을 막을 수 없다. 모든 웹툰에서 바이섹슈얼 정체화를 존중하더라도 현실이 똑같이 움직이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정체성과 그 서사가 서로를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다시 퀴어툰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퀴어툰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독자들이 생각하듯 당사자성만 참조하여 정의하는 것은 퀴어툰이라는 장르를 극히 좁은 영역에만 머물게 한다. 오히려 퀴어툰을 생각지 못했던 정체성과 성욕성을 일깨우는 웹툰이라고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이 장르를 새로운 문화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동시에, 현실에 뿌리를 박은 이야기로도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그릴 수 있다. 그런 이야기 중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만 감히 발설하기엔 ‘너무’ 현실적이며 예의 없는 것들이다. 예의 없는 것들을 그려야 한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충돌 지점을 섬세하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주간 퀴어라이프>는 그 충돌 지점을 충분히 섬세하게 배치 못했기에 사과문을 쓰는 사태로 이어졌다. 그런 부족함 때문에 <주간 퀴어라이프>에 찬사를 보내긴 어렵다. 하지만 질타와 멸시보다는 격려를 보낸다. 이런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퀴어툰이 판타지가 아닌, 퀴어의 현실과 공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며, 현실 속의 퀴어를 그릴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해나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도로 정교화된 학술적 비평 양식으로서의 퀴어 역시 멀리 있지 않다. 자못 희망적인 결론을 내려본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 우리는 퀴어툰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문화적 동력을 발견할 수 있다. 



 

YOUR MANAⒸ허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