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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의 ~야한 만화가 좋다~ㅣ⑤<오! 나의 젠더님>(MSG)

리타의 ~야한 만화가 좋다~ㅣ⑤<오! 나의 젠더님>(MSG)

구토하는 성모, <오! 나의 젠더님>
 

이연숙/리타

*완결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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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일이다. <오! 나의 젠더님>(MSG)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의 완결에 이렇게 울적해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왜 이 작품이 여기서 끝나야만 했을까? 최소한 100화는 더 볼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완결이 나버렸고, 초라한 어휘로 이 걸작의 위대함을 누군가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과 대면해야 할 시간이다.

어쩌다 이런 작품이 나왔을까? 정말이지 천국에서 웹툰 플랫폼을 운영하는 누군가가 지상의 궁핍함을 보다 못해 레진코믹스에 미리 보기를 제공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니 만약 웹툰 플랫폼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이라기보단 신자유주의 지옥에 가까울 것이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 나의 젠더님>이 끝났기 때문이다.
아! 이제 무엇을 보며 나의 영혼을 망치고 병들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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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좀 수다스러운 편이다.
 
 
<오! 나의 젠더님>의 줄거리를 대강 설명하자면 이렇다. 모두에게 괴물 취급당하는 매력적인 ‘트랜스젠더’인 ‘오수’는 회장 ‘박덕만’과 모종의 거래를 함으로써 ‘완벽한 여자’가 되고자 한다. ‘박덕만’의 집으로 들어간 ‘오수’는 ‘사모님’과 의사 ‘스테파니’를 만나 각종 사건과 사고에 휘말린다. 이후 ‘박덕만’의 딸인 ‘시오’의 이야기가 미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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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봉사하는 괴물

여자들. 그것도 악마적이고 괴물같은 여자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다. 트랜스젠더인 ‘오수’가 외부 성기 재구성 수술을 통해 완벽해지고자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그녀를 집단 성폭행하고 괴물 취급한 전 남자친구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그런 괴물적 상태를 대단히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기꺼이 ‘회장’에게, ‘사모님’에게, ‘스테파니’에게 자신을 도구로서 내어준다. 물론, <오! 나의 젠더님>은 진지하지 못한 성인물이므로 ‘오수’는 성적 쾌락을 위해 봉사하는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오수’는 복종함으로써 위협하는 존재다. 오수가 “내가 괴물이어서 당한 이 수모를 완벽한 여자가 되어 모두 되갚아 주고 말겠어!!!”라고 기운 넘치게 외치는 장면에서는 그 어떠한 수치나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길들여진’ 매저키스트의 쾌락이고,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다면, 맞다. 하지만 ‘오수’는 결국 ‘회장’과의 거래에 성공하고, 자발적으로 그의 집에서 걸어 나온다. 여기서 ‘오수’를 둘러싼 모든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발생한다. 한 마디로 애매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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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시는 그 장면이 맞습니다.)

 


‘스테파니’, 그 여자의 방

그런데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린 ‘후타나리물’에 대해 지나친 상찬을 퍼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의 ‘의도’, ‘의미’, ‘의의’를 읽어내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작품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한계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 나의 젠더님>이 단순한 ‘후타나리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스테파니’ 에피소드에서 밝혀진다.

‘스테파니’는 미친 것 같다. 그녀는 환자의 가족 앞에서 무표정하게 (물론 치료 목적으로) 환자의 자위를 돕는다. ‘신랑’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물체는 다름 아닌 딜도다. 그녀의 방에 들어간 남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택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오랜 친구에게 ‘스테파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말이야 인간, 특히 남자 따위는 사랑하지 않아! 못 믿겠다면 보여주지! 들어와라 내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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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나 나올 법한 소녀들의 방~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그녀의 ‘방’이다. 딜도로 가득 찬 ‘스테파니’의 방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이 남자의 대사를 보라.

“여자의 방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내가 상상한 그녀의 방... 하지만 현실은... SF였다!!!”

남자는 ‘스테파니’를 사랑하기에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애액을 담은 병을 들이밀자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스테파니’는 일침을 가한다.

“너희가 30년이나 사랑한 스테파니의 몸에서 나온 물이 더럽다는 거야? 그게 너희의 사랑이니?”

그녀는 남자의 앞에서 섹스머신에 올라타, ‘오수’와 함께 기계를 시연해 보인다. 이 모든 상황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기꺼이 참여하는 것은 물론 ‘오수’ 뿐이다. (당연하다.) ‘오수’와 ‘스테파니’가 섹스머신 위에서 절정에 다다를 무렵, 남자는 여태까지 ‘스테파니’에게 속아왔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모두 죽여 버리겠다”며 기계를 부순다. 그는 도저히 ‘스테파니’의 분열적인 이미지를 감당할 수 없다. 남자에게 ‘스테파니’는 동정녀야만 하고, 위협적이지 않아야 하고, 분리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그에게 공포다. 남자는 그녀로 인해 사로잡히고 붕괴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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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운 비체들

에둘러갈 것 없이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비체abject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인 비체는 우리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하는 것들, ‘삶 속에서 죽음’-즉 한계를 보게 하는 것들, 그럼에도 우리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킨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비체는 청결, 건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기보다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에 더 가깝다. 비체는 내 세계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경험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오! 나의 젠더님>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남자가 속한 가부장적 질서, 이성애적 규범, 성차별적 언어와 행동양식은, ‘스테파니’와 ‘오수’의 살덩이에 펌프질하는 플라스틱, 그녀들의 분출하는 정욕 앞에서 얼어붙고 결국 그는 뒷걸음친다. 이 비체들 앞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소멸된 지 오래다. 도망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태어난 장소’, 모성적 근원으로 빨려 들어갈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공포는 남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스테파니’ 본인은 남근에 대한 공포증이 있고, 딜도가 아닌 실제 ‘남근’이 삽입될 경우 그녀는 구토를 일으킨다. ‘스테파니’가 ‘목동들’에게 받았던 과도한 사랑과 관심이 그녀의 “영혼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혹시 그녀는 이미 분열된(‘망가진’)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자아를 지탱해야 하고, 오로지 이 분리를 통해서만 자아가 구성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 아닐까? 그 결과 그녀가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근’의 배제를 통해서만 그녀라는 주체는 구성될 수 있다. (‘스테파니’ 에피소드는 심지어 감동적인데, 이 두 사람이 결국 서로의 증상을 껴안으며 사랑으로서 통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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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가 생기면 맨 처음 해야 할 일)

 


‘시오’, 악마적인 복수

<오! 나의 젠더님>은 문제가 많은 작품이다.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시오’가 아무리 파괴적인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가 복수를 행한 방식에 대해서 누군가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호모포비아 연쇄살인범을 영웅 취급하는 파렴치한 강간범들에게 법과 도덕이 어떠한 제재도 가할 수 없을 때, ‘시오’는 섬뜩한 상상력을 발휘해 그들의 영웅으로 하여금 그들을 처벌하게 했다. 이것은 동성애가 범죄가 되는 어떤 상황, 바로 그 권력을 당연시하고 이를 이용한 것이기에, 우리는 ‘시오’의 행위 앞에서 실로 위반적인 쾌락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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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가 강간당하는 장면은 어떤가? 이제 와서 MSG작가의 그림을 설명하기 민망하지만 <오! 나의 젠더님>은 솔직히 ‘그래서는 안 되는’ 많은 장면들을 엄청나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MSG작가는 종교화를 연상시키는 아이콘들을 섹스신에 무분별하게 삽입하고(덕분에 엄청나게 키치한 장면이 연출된다), 내 평생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은 기괴한 클로즈업 키스신과 구토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감탄스러운 것은, 과장되게 찢어지는 옷과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의 부피감 있는 묘사다. 프린트해서 방 문 앞에 걸어놓고 싶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오쿠 히로야) 이후로 이 정도의 ‘프로’는 간만이다.

어쨌든 ‘시오’의 강간씬으로 돌아가자면, 이 장면은 마치 <힙합>(김수용)을 연상시킨다. 대체 왜 이렇게 연출한 것인지 죽었다 깨나도 나로서는 모를 것이다. 이런 연출 덕분에 ‘시오’는 성적인 폭력에 노출된 무력한 여자가 아니라, 육체적 폭력과 싸우는 한 인간으로 보인다.

이 작가는 대체 왜 이런 연출을 선택한 걸까? ‘시오’의 인간적 존엄을 회복해주고자 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아이로닉한 유머를 구사하고자 했던 걸까, 그도 아니라면 독자가 ‘시오’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거리를 두게 만들고 싶었던 걸까? 후자라면 실패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 전체의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함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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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최고의 연출, 최고의 작화라고 할 수 있다.

 
 

<오! 나의 젠더님>은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걸작이다. 문제는 ‘가능성’이라 불리는 ‘중도 포기’나 ‘실패’들이 그러하듯, 다른 사람 눈에는 걸작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발견했을 때 기쁨, ‘작은 금가루’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여기 저기 떠벌리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내가 이 작품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 충분히 역설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실패했는지도.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 <오! 나의 젠더님>의 다음 화를 보고 싶다. 그것이 내 소박한 올해 소망이다.

 


 

YOUR MANAⒸ리타
 

 


<오! 나의 젠더님>(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