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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를 기르는 법

비평

혼자를 기르는 법 = 공간을 거주하는 법


 

오혁진
 


“20대 여성의 서사를 증명하고 싶다.”

<혼자를 기르는 법>의 작가, 김정연의 표명이다. 이 작품은 서울에서 생활하는 20대 독신 여성의 이야기다. 이 시대에 20대의 서사, 그것도 여성의 서사를 재현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무작정 찬사를 보낼 수는 없다.
 
청년 담론이 한 차례 유행처럼 휩쓸고 간 지금,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혼자를 기르는 법>은 청년세대를 어떻게 재현하고 있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거칠게나마, <혼자를 기르는 법>의 맞은편에 <복학왕>을 두자.
 
여성 서사 대 남성 서사의 구도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글의 관심은 청년세대의 재현 방식에 있다.
 
<복학왕>은 현실의 특정 장면을 최대한 세밀하고 충실히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혼자를 기르는 법>은 보다 조직적이고 입체적이다. 작가는 ‘거주 공간’을 매개로, 청년세대의 삶을 치밀하게 재구성한다. 원룸, 고시원을 관통하는 청년세대의 행적을 추적한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다. 왜 하필 ‘공간’인가? 인간은 공간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고, 공간 행위를 통해 현실의 삶을 펼쳐내기 때문이다.
 
특히 ‘거주 공간’은 한 인간의 세계 중심이며, 구체적 삶이 열려 있는 체험의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거주 공간’은 살아있는 개체가 펼쳐내는 운동의 전체 궤적이다.


 
관찰자 시점이 창조한 세계

<혼자를 기르는 법>은 ‘일상툰’ 형식과 유사하지만 일상툰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 ‘김정연’과 주인공 ‘이시다’는 명백히 분리된다. 이 같은 분리는 작가와 캐릭터와의 거리를 일정히 유지하게 한다.

예고편에서 우주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대한민국으로, 대한민국에서 주인공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과정은, 이러한 관찰자적 시선을 함의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주인공에 감정이입 하기보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주인공의 일상을 관찰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입체적이고 공간적인 작품이다. 서술, 작화 모두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 보는 시각을 공유한다.




여기서 ‘관찰자 시점’은 중요하다. 서술 방식만의 관점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작화 형식과 더 나아가 작품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을 들여다 볼 때, 많은 경우 ‘하이 앵글’을 사용한다. 이 같은 연계는 자연스러운데, 서술-작화 두 시점 모두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 보는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를 기르는 법>의 세계는 건축 조감도처럼 깊이 있고 입체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공간은 정확한 질서를 바탕으로 구조화되며, 그 중심에는 주제와 관련된 ‘거주 공간’이 배치된다.
 
<혼자를 기르는 법> 작화는 또한 그 자체로 공간적이다. 회색 계열 채색과 그래픽 디자인으로 정제된 이미지, 주제라는 토대 위에 정렬된 6칸 에피소드 기둥은 더 이상 뺄 게 없는 ‘콘크리트 큐브’의 모습이다.



 
콘크리트 기호-폐쇄계

<혼자를 기르는 법>의 공간은 ‘서울’이다. 하지만 ‘남산타워’를 제외하면 서울을 뚜렷이 재현하는 기호는 없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서울을 정확히 포착한 작품이다. 단순히 랜드마크를 그려내기보다, 공간 이면에 작동하는 사회적 원리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지방에서 몰려드는 청년 이주민을 흡수하는 거대 공간이다. 각각의 이유로 독립한 서울 거주민까지 이 공간에 속속들이 합류한다. 혼자이기를 결심한 사람들이 모인다.
 
‘거주 공간’은 그들이 가장 먼저 직면할 문제다.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다. 차라리 존재론적 근원에 가깝다. 공간은 계속해 그들의 삶을 운명 짓는다.
 
작가는 말한다. “서울의 부동산은 서울의 조건이다. 공간을 획득하는 것은, 곧 자신이 안착할 수 있는 기준과 비용을 끊임없이 가늠하는 과정이다”라고.
 

 


독립생활을 한다는 것은 공간의 문제이며, 비용의 문제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청년세대의 생애주기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이시다’는 보증금 없는 ‘고시원’에서 청년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굳이 욕심내어 창 있는 방으로 옮겨 보지만, 창 밖 풍경은 꽉 막힌 벽이다. 그녀는 결심한다. 이곳을 반드시 떠나리라. 이후 몇 번의 이사를 반복한다. 남에게는 사소한, 하지만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을 지켜내며.
 
그러고 나서, 완벽하진 않지만 보다 안락한 공간에 ‘마침내’ 다다른다. 주인공은 이렇게 조금씩 자신의 공간을 확장해 간다.
 
그렇다면 ‘성장 서사’의 의미를 부여해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못할 것 같다. 더 이상의 공간 이동과 사회 이동이 여의치 않다. ‘마침내’라는 단어를 굳이 삽입한 이유다.
 
이 시대의 청년에게 최적화된 주거형태는 집이 아닌 한 칸의 ‘방’이다. 저임금, 고분양 시대가 강요한 삶을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4인 가족 경로에 편입하면 된다. 아니면 <허락> 에피소드처럼 부모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여의치 않다면, 방에서 방으로 이동만이 무한 반복되는 폐쇄계를 맴돌아야 한다.

 


인간도 반려동물도 모두 한 칸의 방에 거주한다. 그래서 작가는 사육장을 매개로 이 시대 청년의 삶을 이야기한다.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 육면체 공간인 사육장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사육장은 그 자체로 현재 거주공간의 강력한 환유다.
 
120L 리빙박스. 먹기, 마시기, 배설하기 등 삶의 최소 조건이 갖춰진 공간. 햄스터를 포함한 양서류, 갑각류 무엇 하나 예외 없이 120L 삶을 산다.
 
이 삶은 방의 평등주의가 아이러니하게 실현된 청년세대 삶과 정확히 포개진다. 좁은 공간이 강제되면, 영역 싸움 자체를 포기하는 물고기 ‘시클리드’. 수면 산소를 취하는 능력 때문에, 오히려 커피 컵에 키워지는 ‘베타’. 임대 기간이 끝나면 사라지는 거주자처럼, 2년이라는 짧은 수명을 가진 ‘햄스터’.
 
사육장의 생물도, 육면체 공간의 인간도 치사량까지 아닌, 그래서 견딜 만큼의 불행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그 공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고, 확장하려는 욕구를 가진다. 그리고 확장된 공간만큼 무언가를 소비하고,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주인공 역시 거주하는 공간에서 최대한 행복을 추구한다. <수족관> 에피소드는 이 같은 공간의 욕망을 또렷이 보여준다.
 
주인공은 수석을 놓고, 수초를 심으며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한다. 세계 각지 수역을 재현한 수족관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푸르른 기운이 감도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다.
 
공간의 욕망은 더 이상 현실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현실에 고착되지 못하고 번번이 미끄러진다. 사실 수족관은 욕망의 최대치에 가깝다.
 
그것은 ‘300*300*300mm’ 기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현실은 언제나 주어진 공간과 그 공간이 부여한 질서에 의해 제한된다.



 

큐브 거주자의 취향은 철저히 제한된다. 그들이 취향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실은 좋은 것이 아닌, 덜 나쁘지 않은 것을 택하는 과정이다.




다시 <혼자를 기르는 법>의 ‘고시원’을 들여다보자. 극한의 면적을 가진 공간. 오직 주인공 몸만이 간신히 놓일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이 무엇을 갖고 싶은지를 절대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다음 ‘원룸’으로 이동해보자. 확장된 공간만큼, 어쩌면 늘었을 월급만큼, 이전보다는 많은 선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첫발을 내딛는 순간, 취향과 상관없는 공간에 둘러싸인다. 물품과 가구를 선택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자신의 욕망과 제품의 가격이 항상 일치하는 법이란 없다.
 
차선책으로, 최저가 설정을 한 후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취향과 부합하는 것을 택한다. 그 결과 방안은 온통 못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취향의 욕구는 이 정도로 좌절되지 않는다. 주인공 이시다의 선택은 생활의 연차만큼 늘어날 것이고, 강제됐던 취향 역시 서서히 세련될 것이다. 그녀는 욕망의 크기에 반 뼘 모자라는 선택을 거듭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반 뼘의 구매력은, 다시 한 뼘을 초과하는 무언가를 구입하는데 사용된다.
 
작가가 유어마나 인터뷰에서 밝혔듯, '혼자를 기르는 법’이란 욕망이 현실에 부딪혀 점점 사라지는 과정인 동시에 이것만이라도 지켜야지 싶게 되는 과정이다.


 

꿈을 꾸지 못하는 공간

<혼자를 기르는 법>은 청년세대의 ‘거주 공간’ 기록이다.
 
이 시대의 청년만이 ‘원룸’ 같은 공간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이전 세대 역시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한 칸의 방에 거주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기어코 ‘거주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현재 청년세대가 충분한 ‘꿈’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이시다’는 ‘삶이 밖으로 몰린 사람들에게 어떤 곳에서 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자조한다. 그것은 집이 아닌 회사에 자리 잡은 삶이다.
 
누군가는 밤을 지새우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른 의미로 꿈을 꾸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거처는 과거와 달리,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사회 이동은커녕 임대가 끝날 때마다 강제로 떠나야 한다.
 
고된 삶이 당도할 미래는 무너진 꿈의 잔해다. <공간의 시학> 저자 바슐라르는, 인간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집을 지어낼 힘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삶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세계. 우리는 어떻게 혼자를 기를 수 있을까?


 
 
 
 

YOUR MANAⒸ오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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