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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과 몸: <그 남자의 하이힐>과 <너의 이름은.>

비평

하이힐과 몸:
<그 남자의 하이힐>과 <너의 이름은.> 

 

글 허이모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사랑은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그만큼 사랑은 오만하다. 다른 갖가지 생각들은 추상인 채로도 만족할 수 있는데, 이 사랑이란 생각은 살과 피를 붙이고, 망토와 페티코트, 스타킹과 조끼를 붙여주지 않으면 끝내 만족할 줄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올란도의 사랑이 여자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살아 있는 몸이 본질적으로 심히 느리게 적응하기 때문에, 그녀 자신이 여성인데도 그 사랑의 대상은 여전히 여성이다. – 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너의 이름은.> 메인 포스터



<너의 이름은.>과 소수자 재현의 문제 

 

2017년 1월 4일 개봉한 신카이 마토코 감독의 <너의 이름은.>(2016)이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너의 이름은.>은 2017년 첫 주(1월 2일~1월 9일) 1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 모으며 2017년 첫 주 한국 흥행순위 1위에 올랐다.
 
막강한 대중성의 원인으로는 신카이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작화나 서정적인 서사, (페이크) 노스탤지어 등이 지목되었다.
 
동시에, 일부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이 두 주인공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불쾌함을 촉발시킨 장면은 남녀 주인공의 몸이 뒤바뀐 뒤의 장면이다. 여자 주인공의 몸에 들어간 남자 주인공은 가슴을 만지며, 자신이 여성의 몸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한다.
 
이 장면이 불러일으킨 불쾌함은 여성혐오와 트랜스포비아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묶어낼 수 있겠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몸이 ‘여성’임을 확인하는 장면을, 왜 하필 여성의 가슴에 대한 문화적 페티시즘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그려 넣어야만 했는가.
 
또, ‘뒤바뀐’ 몸을 받아들일 때 단순히 호기심을 느낄 뿐, 어떻게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결국, 몸이 바뀌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활용될 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몸과 그 몸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을 존중하진 않는다는 것이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뒤바뀐다는 설정과 그 묘사는 헤테로규범적인 로맨스 서사를 좀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활용될 뿐, 그 장면이 (의도와 무관하게) 연상시키는 소수자의 삶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전환을 경험하는 타키




이러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으로 이어진다.
 
어떤 재현이 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일까? 예컨대 소위 ‘퀴어 영화’와 같이 퀴어의 삶을 주인공으로 삼는 재현물은 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일까?
 
혹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만나서 완성하는 로맨스 서사는 성소수자를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소수자를 배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헤테로섹슈얼 당사자가 자신의 로맨스 서사를 그리는 것이기에 소수자를 착취하지 않는 겸손한 재현인가?
 
<너의 이름은.>의 사례에 맞춰 질문을 좁히면 이런 의문들이 뒤따른다.
 
여성의 몸을 중성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이 처한 차별적 현실을 탈색하려는 시도 아닌가?
 
몸과 영혼의 불일치를 트랜스젠더 담론과 연결 짓는 것은 트랜스젠더의 몸을 ‘틀린 것’, ‘교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해묵은 보수적 젠더 담론 및 성별이분법과 제휴하게 될 가능성을 품고 있지 않은가? 
 
이 글은 <너의 이름은.>이 보여주는 헤테로규범적인 서사를 옹호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특정한 재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고민을 안고, 대안적인 재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글이다.
 
김지미 작가의 웹툰 <그 남자의 하이힐>(2015-2016, 레진코믹스)은 현존하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존중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를 제시한다.
 
이제부터 안전한 재현을 만들기 위해 이 작품이 어떤 방식을 취했는지 주목하면서 이 작품이 품었던 욕망의 흔적을 뒤따라 가보자.





김만석만의 신발장 

<그 남자의 하이힐> (김지미, 2015-2016, 레진코믹스)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의 역사에서 ‘젠더와 옷’만큼 깊이 있게, 꾸준히 탐구되어 온 주제는 흔치 않다.
 
버지니아 울프가 <올란도>에서 주인공의 성전환 이후 옷과 젠더, 욕망의 연관 관계를 캐물었을 때부터, 혹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여성의 실존을 가로막는 다양한 사회적 규범을 비판했을 때부터, 옷은 특정 젠더에 부여되는 역할과 규범을 표시하는 기구로 언급되어 왔다.
 
규제와 금지는 욕망의 흔적이거나, 욕망을 생산한다. 따라서 여성의 옷을 입는 남성, 남성의 옷을 입는 여성에 대한 강력한 의학적·법적·문화적 규제가 오래된 만큼이나, 복장 전환에 대한 욕망 역시 바로 그 규제와 꼬여 이어져 왔다. 
 
나와 ‘다른(혹은 반대의) 젠더’에 동일시하는 이들이 ‘입기로 되어 있는’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욕망은 한때 ‘도착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동성애자나 복장 전환자, 드랙퀸과 드랙킹,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정체성 및 하위문화에 의해 긍정되기도 했다.
 
금지에 대한 긍정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복장 전환의 욕망은 지금까지도 몇몇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 무척 중요한 요소로 지목되곤 한다. 
 
<그 남자의 하이힐>의 주인공인 김만석은 후줄근한 양복과 낡아빠진 남성용 정장 구두를 신고 회사를 다니는 ‘평범남 ①’로 통한다.
 
그런 그에게는 ‘여성의 하이힐’에 집착한다는 이중생활이 존재한다. 만석은 하이힐을 리뷰하는 인기 블로그 ‘만숙씨네 신발장’을 운영하는 파워 블로거이기도 하다.
 
하이힐을 신는 남자라는 게 밝혀지면 자신의 사회적 위신과 위치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는 인터넷에서는 여자인 척하는 ‘넷카마’이기도 하다. 
 
이 웹툰에서 잊을만하면 나오는 문구는 만석이 자기 자신을 ‘그냥 변태’로 선언하는 부분이다.
 
1화부터 주인공 만석은 내레이션을 통해 “저는 게이가 아닙니다. 저는 여장 남자도, 성적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가는 힘겨운 영혼도 아닙니다. 저는 단지 100% 신체 건장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힐 신는 걸 너무 좋아하는 변태일 뿐입니다.”라고 못을 박는다.
 
이러한 선언을 통해 만석의 정체성은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신체 건장한 남자’로 고정될 수 있다. 




정체성 선언은 김만석을 시스젠더-헤테로-남성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해준다. 




그가 하이힐을 사 모으고, 신고, 사진 찍어 블로그를 통해 공유하는 기벽을 갖게 된 경위를 본다면, 그의 정체성 서사는 더더욱 흠결 없어 보인다.
 
예전에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가 그를 떠났다. 추억을 되새기며 그녀의 신발을 신어 본다. 그 행위가 자신의 허전함을 메워준다. 이 사실을 깨달은 뒤로 그는 하이힐에 홀리게 된다.
 
딱한 사연을 살펴보니, 하이힐에 대한 그의 집착은 손상된 헤테로규범성과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보충하기 위한 보증서로도 읽힌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만석을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으로 일관되게 묘사한다. 동시에 몇몇 소수자 정체성을 알고 있음을 전시함으로써 소수자 재현에 늘 따라붙는 책임 추궁을 피해간다.
 
다시 말해, <그 남자의 하이힐>은 아주 특수한 어떤 남성, 김만석 개인의 서사로 읽히길 욕망한다.
 
만석만이 홀로 속해 있을 ‘실연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이힐에 집착하게 된 남성’이라는 틀은 두 겹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이 틀은 만석의 서사가 다른 정체성에 옮겨 붙는 것을 막는다(“저는 OO이 아닙니다”).
 
둘째, 이 틀은 소수자 정체성으로부터 만석을 보호한다(“저는 신체 건장한 남자입니다”). 

 



다정함은 소수자를 길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하다. 



만석은 시작부터 자신을 소수자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그 남자의 하이힐>이 소수자를 배척하고자 고안되었거나 악의를 가진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다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만석을 포함, 사회에서 배척당한 약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한다. 천재 구두 디자이너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업계에서 추방당한 오 사장, 수많은 알바를 해서 돈을 버는 최군, 만석의 동생이자 레즈비언인 만숙,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멸시받는 려은, 지나치게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험담을 듣는 화주 등 다양한 맥락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해 포용적인 배려를 베푼다.
 
이 작품이 그려내는 포용성은 만석의 다정함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남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소수자를 배척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통해 약자를 구원하고, 만석 역시 자신이 포용한 이들이 마련해 준 인정으로부터 구원받는다.
 
<그 남자의 하이힐>은 에필로그에 이르러서 남의 취향에 왈가왈부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공간이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만석이 자신을 받아줄 사람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한 이후에나 찾아올 수 있는 내적 평화를 상징한다. 일종의 추가 보상이자 결말을 위한 장치인 셈이다.



<그 남자의 하이힐>의 에필로그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어떻게 소수자를 길들이는지에 대한 우화로도 읽힌다. 




문제는 이 작품이 만석을 통해 보여주는 다정함이 작품의 의도와 반대로, 소수자를 다시 주변화 함으로써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만석은 다정하다. 다만 그가 ‘신체 건장한 남성’인 한에서 그렇다.
 
예컨대 그는 만숙에게는 오빠로서, 려은과 화주에게는 남성 직장 동료로서, 최군에게도 형님으로서 자신의 다정함을 베푼다. 반면, 오 사장이 그에게 ‘뮤즈’라는 여성적 자리를 요청할 때는 거절한다. 자신만의 신발장이 발각되어 남성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으로부터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공포 때문에 숨기고자 한다는 점에서 만석의 신발장은 동성애자의 ‘벽장’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만석은 소수자를 존중하기 위해 그러한 연결 고리를 강하게 부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석의 신발장을 동성애자의 벽장에 유비해서 읽고자 하는 시도는 서사적 차원에서 미끄러지게 된다. 기껏해야 메타적 해석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남자의 하이힐>이라는 작품이 품은 욕망 중 하나가, ‘소수자에 대한 포용’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그리고 타인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포용함으로써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패로부터, <그 남자의 하이힐>과 <너의 이름은.>이 젠더와 젠더의 이행성을 다루는 방식은 서로 동형 관계를 그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소수자를 시스-헤테로 규범적 시각에서 재현했고, 이 때문에 구설에 올랐던 <너의 이름은.>과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노력해 많은 갈채를 받기도 했던 <그 남자의 하이힐>이 동형 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작품이 묘사하는 장면은 그리 다르지 않다. 타키(<너의 이름은.>의 남자 주인공)나 만석 모두 자신이 어떤 몸에 들어와 있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나 섹슈얼리티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성이므로 여성을 사랑할 것으로 가정되며, 실제로 서사의 진행은 이러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타키가 여성의 가슴을 페티시적으로 소비하듯이, 만석은 여성의 하이힐에 페티시적으로 집착한다.


(물론 타키의 행동이 타인의 ‘몸’을 착취한다는 시각을 견지한다면, 타키의 행동을 하이힐을 사 모으는 것과 완전히 같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 마지막 문장은 상징적 측면의 유사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지 두 사람의 페티시가 문화적·역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수준에 머문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장면에서 읽혀지는 인물의 욕망을 정말로 '남성'의 욕망으로만 읽는 것이 합당한가? 



 
이 의도치 않은 동형 관계는 두 작품 모두 ‘정체성’이라는 틀을 의문 삼지 않기 때문에 성립한다.
 
<너의 이름은.>은 많은 이들이 비판했던 것처럼 다른 정체성을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시스-헤테로 정체성과 서사를 보존한다.
 
<그 남자의 하이힐>은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되, 정체성 자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회피한다.
 
<그 남자의 하이힐>의 모든 등장인물에게는 징후로 읽힐 수 있는 구조가 있다. 등장인물 모두 ‘왜 그렇게 됐는지’가 심문당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각기 다른 차별을 겪었지만, 그러한 차별이 왜 시작됐으며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대화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사회·문화적 차별 자체는 각자의 사정으로 남아 있고 소수자들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 외에 안식처를 얻지 못한다.
 
만석이 통영에서 자족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가 서울에서 통영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통영에서 이해받을 수 있는 까닭 역시 각자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곧, 서울의 차별적 공간은 여전히 차별적인 채로 남아있으며 ‘변태’인 만석은 변두리로 내쫓긴다. ‘독특한 취향’의 공동체가 유토피아로 보이는 만큼, 딱 그만큼 사회적 차별은 제지받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다양함에 대한 관용이 작동하는 한 가지 방식이며, 다정함이 위험한 까닭이다.
 
우리는 관용이 없는 세상에 너무 오래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그래서 관용과 다정함에 쉽게 설득되곤 한다. 실제로 나쁜 의도가 없는 경우라면 의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사회·문화적 차별의 종식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선하기에 더욱 교활한 책략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선의와 다정함에 편안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 남자의 하이힐>이 의도치 않게 나에게 전달해준 귀중한 교훈이다. 
 



 

YOUR MANAⒸ허이모

 
 

<그 남자의 하이힐>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