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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국 만화에 필요한 질문들

비평
 

2017년, 한국 만화에 필요한 질문들

2016년이 우리에게 남긴 것

 

성상민

 
8548억, 그리고 9000억. 8545억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집계한 2014년 한국 만화 산업의 총 매출 규모이다. 9000억은 올해 4월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추정한 2016년 한국 만화사업의 규모이다.

만화잡지의 몰락과 함께 추락할 것처럼 여겨졌던 한국 만화는 어느덧 어림잡아 1조에 달하는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증가한 산업 규모 덕분일까? 한국 만화는 주로 산업적인 측면으로 환산된다. 기관의 각종 보고서나 보도자료, 언론에서는 대부분 만화 산업의 ‘시장성’을 말한다.
 
한국만화가협회 같은 단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만화에 대한 논의의 결론은 산업성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기업은 만화의 시장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유료 웹툰 플랫폼 시장을 개척한 ‘레진코믹스’는 사이트를 오픈한 후 한동안 ‘연봉 1억을 받는 작가를 배출했다’고 알렸다.
 
최근 ‘투믹스’는 ‘짬툰’을 리브랜딩한 뒤 광고를 쏟아내고 있는데, 연봉 1억 작가를 100명 이상 배출한다고 선언했다.
 
2014년, 한국만화가협회는 젊은 세대의 회장단(회장 이충호)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만화가 표준계약서 제정’이나 ‘자율규제위원회’와 같이 만화가와 기업 또는 만화가와 정부 사이의 평등한 관계 정립에 애썼다.

만화가협회에서는 협회에 소속된 작가가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에는 자체적인 조사를 거쳐 징계를 내렸다. 최근 들어 계속 문제가 된 ‘OOO 내 성폭력’에서 만화계 역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만화연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벌어지자, 빠르게 만화가 시국 선언을 하며 적극적인 대응을 했다. 만화가들이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우리만화연대는 날치기로 통과된 2009년의 미디어법 사태, 2014년 세월호 참사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대응한 바 있다.


 

우리만화연대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발표한, ‘시국선언 만화’의 일부. 사회적 이슈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만큼, 한국 만화의 현실은 건강한가? 그리고 내부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살펴 볼 때다.

 

이렇게 한국 만화계는 한국 만화의 시장 규모를 더 늘려야하고, 표현의 자유를 쟁취해야하고, 공정 계약을 이뤄 내야하고, 사회 현안에 대한 시국 선언을 해내야한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풀 수 없는 한국 만화계 내부의 사안들 역시 존재한다. 한국 만화의 양적 발전은 물론 질적인 발전을 위해 몇 가지를 짚어 보자.

 


첫째, 늘어난 플랫폼에 걸맞게 작가의 권리가 확보되고 있는가?
 
#1

하지만 늘어난 플랫폼만큼 작가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사례도 함께 늘어났다. 성인 웹툰 플랫폼 ‘탑툰’에 <동창모임>을 연재하던 스토리작가 박달곰(웹툰 에니전시 ‘AA미디어’ 계약 작가)은 ‘탑툰’으로부터 갑작스런 계약 해지를 당했다.
 
2016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김자연 성우지지, 옹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인 김자연은 자신의 트위터에 ‘메갈리아4’를 후원하는 티셔츠 구매 인증사진을 올리고, 페미니즘을 지지했다. 넥슨은 유저들의 입장과 다른, 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김자연 성우와의 계약을 즉시 해지했다.
 
페미니즘이 지지하는 많은 이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항의했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문화계 노동 현장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소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문화 노동자들이 소신 발언을 이유로 속속 해고되거나 계약이 해지되었다. 만화계 역시 이러한 광풍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김자연 성우를 지지한 많은 웹툰 작가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특히 탑툰은 <동창모임>의 연재 종료를 공지하며, 해당 작품의 스토리 작가가 ‘불미스럽게도 고객을 기만’했다고 밝혔다. ‘고객 보호’와 ‘독자들의 기쁨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회사 입장에서 연재를 중단시킨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몇몇 개인적인 항의가 있었지만, 작가의 권리에 대한, 만화계 차원의 문제 제기는 없었다.





탑툰이 <동창모임>의 연재를 중단하며 내건 공지. 탑툰은 <동창모임>의 스토리 작가가 ‘고객을 기만’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2
작가의 권리 문제는 갑자기 벌어진 게 아니다. 2012년, 김나경 작가는 카카오톡을 통해 연재중인 <보바쏭>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연재 고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울러 밝혔다.
 
<사각사각>, <토리 Go! Go!>로 유명했던 만화가 김나경(웹툰 에이전시 ‘투유 엔터테인먼트’ 계약 작가)은 원고료를 광고 수익으로 받기로 하고 연재 계약을 했지만 7개월 간 수익 없자 한계를 느끼고 작품을 끝낸 것이다,
 
투유엔터테인먼트는 그저 작가와 해당 원고료 지급 조건에 동의해 계약을 맺었으므로 문제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도 여전히 웹툰 에이전시에 대한 문제나 적정 연재 고료에 대한 이야기는 만화계 차원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


 


<보바쏭> 연재 중단을 밝힌 김나경 작가의 블로그 포스팅.

 

둘째, 만화계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 둘만의 문제인가?
 
 
#1
만화계 사건에는 한 만화가가 또 다른 만화가의 가해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천일야화>를 비롯해 다양한 만화의 스토리나 기획에 참여해 유의미한 흥행을 기록한 작가, 전진석 사건을 보자. 성우 김자연의 계약 해지 논란이 전방위적 이슈가 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화제가 되었던 작가이기에 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전진석와 사제지간이었던 어시스턴드 여성 작가는 전진석 작가에게 물질적으로는 물론 성적으로도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전직석 작가는 남녀 관계였을 밝히며 방어했지만, 떨어진 도덕성을 돌이키기는 힘들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사건 후 제명 처리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이 시기와 맞물려 퍼진 해시 태그, ‘#OOO_내_성폭력’으로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만화계 내부 각종 성폭력 사례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2
이런 폭로 사례는 매년 만화계에서 반복해서 벌어지던 사건이었다. 이미 네이버 웹툰에서 <본초비담>을 연재하던 정철 사건은 문하생에게 가한 비용 미지급과 성희롱 등으로 법정까지 이어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만화가협회에서 정철을 제명했지만, 만화계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미연 방지를 위한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3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00년대 중반 일찍이 일본 만화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던 박무직이 어시스턴트와 문하생에게 각종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져서 큰 파문이 일었었다.

‘화실’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작가와 어시스턴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아쉽다.

만화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 중이지만 수면 아래에서 진행 중인 문제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개인 간의 문제로 치부되어 아무도 해결을 나서지 않는다.
 
 
 

셋째, 만화계 단체나 기관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
 
위의 몇 가지 사례만으로 봐도 어떤 사건이 불거지면, 여론은 사건과 관련된 개인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힐난한다.
 
분명 성우 김자연이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모습을 드러낸 몇몇 작가는 신중치 못한 태도를 드러냈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작가의 권리가 침해받는 상황, 또는 작가가 다른 작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드나드는 통로인 ‘플랫폼’의 책임을 바라보는 이는 없다.
 
만화계 내부에 형성된 구조에 개인보다 쉽게 개입할 수 있는 작가 단체, 공적 지원 기관에 책임 있는 대처를 보이길 원하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물론 작가 단체나 공적 지원 기관이 마냥 잠자코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장장 10년간 논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표준계약서 제정 문제를 2014년 새롭게 출범한 집행부 아래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함께 드디어 표준계약서를 발표했다.
 
2015년에 있던 레진코믹스의 일방적인 고료 지급 기준 변경 문제나 문하생/어시스턴트 착취 문제와 같은 사안에 있어 적극적으로 중재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작가를 제명한 곳도 만화가협회다.
 
여기에 2016년 11월 3일, 제16회 만화의 날 기념식에서 만화가협회는 그간 제보 받은 만화계 내부의 불공정 노동 행위 및 성폭력 사례를 모은 책자를 온/오프라인으로 배포했다. 만화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관들 중에서는 가장 노동, 성폭력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한국 만화가협회가 그간 제보 받은 만화계 내부의 불공정 노동 행위 및 성폭력 사례를 모은 책자. 

 


그러나 만화가협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바로 여기서 그친다. 개별적인 노동, 착취 및 폭력 사안에 대응은 하지만 이후에 어떤 식으로 이를 예방하고 어떠한 로드맵을 구상할 것인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애매하다. 앞서 언급한 만화가협회가 제작한 사례 제보집이 가장 극명한 예시다.
 
분명 사례집은 2016년 현재 만화계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만연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만,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내놓는 결론은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 계약 문제에서는 ‘표준계약서 작성’과 ‘파트너 존중’을, 만화가의 문하생/어시스턴트 대상 폭력에 있어서는 ‘노동의 구조’를 지적하지만, 결국은 경찰에 신고하거나 만화가협회에 연락해 제명 절차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차원의 메시지에서 그친다.
 
가장 슬픈 것은 만화가협회의 이런 어정쩡한 모습이 만화계 관련 단체 중에서는 내부 문제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모습이라는 점이다.
 
우리만화연대는 1992년 만화계 내부의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을 제시하자는 목적으로 창설됐다. 하지만 설립 목적이 무색하게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세월호 참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같은 사안에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일상 사업으로 만화 강좌를 여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대안 제시나 실천은 미비하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올해 5월부터 11월까지 ‘만화창작인력 실태조사’에 나서 지난 11월 3일 만화의 날에 맞춰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시 또한 지난 12월 20일부터 2017년 1월 13일까지 진행하는 ‘문화·예술 불공정 실태조사’에서 만화 · 웹툰을 한 분야로 분류하여 조사 중이다.
 
이제라도 기관들이 나서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어떤 식의 대안 혹은 대책을 내놓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창작자가 먼저다.
 
만화판을 산업적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많아도 만화가의 권리나 책임에 대한 논의는 무척이나 미미했다. 만화계 단체나 만화 지원 기관들이 그간 만화계 내부의 사안들에 대해 이렇다 할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에는 분명 많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마치 2005년 정부가 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하며 문하생이나 어시스턴트를 고용하는 만화가를 ‘개인 사업자’로 분류해 파악하려다 많은 반발 끝에 무산되었던 것처럼,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아진 지금에도 여전히 권리의 문제에 신경을 못 쓰는 지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오래된 ‘침묵’의 근원은 한국 만화 내부에서 ‘웹툰’이 꾸준히 성장하는 만큼 자연스레 파이가 성장하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무런 대가 없이 포털 ‘도전’ 만화에 콘텐츠를 제공하며, 희망고문을 당하는 수많은 신인 만화가들의 상황도 만화산업 논리로 치부한 것이 아닐까?
 
한국 만화를 부활시킨 일등 공신은 웹툰이다. 웹툰은 어느새 한국 만화의 상징이자 한국 문화 전반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꾸준히 성장하리라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상황에서, 기업의 노동조합처럼 결기 있게 나서는 것보다는 노동자(만화가)와 사용자(웹툰 플랫폼, 에이전시)가 서로를 존중하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애당초 만화가협회나 우리만화연대가 서로 입장이나 행동의 모습은 달랐지만, 원고료를 현실화하자는 투쟁이 한 번도 없었던 마당에서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최저 원고료가 올라간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럽지 않을까?
 
하지만 끊임없이 발생하는 웹툰 플랫폼과 작가 사이의 문제는 이러한 고료 상황 개선이 전적으로 웹툰 플랫폼이 베푸는 호의 아닌 호의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인 한계를 내재한다.
 
조금이라도 플랫폼에 불리하다고 생각할 경우, 2015년 레진코믹스가 일방적으로 계약 조건의 개악을 시도하고 무수한 신생 웹툰 플랫폼이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항을 내세운 끝에 문을 닫았던 것처럼 이 묘한 밀월 관계는 언제든지 끝이 날 수 있다.
 
탑툰이 ‘소비자가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동창모임>의 연재를 중단시킨 것은 1960-70년대 한국 만화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합동 출판사의 모습이 결코 먼 과거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한국 게임은 만드는 작품에 대한 생각도, 종사자의 권리에 대한 논의 모두가 부족했다. 지금 게임이 처한 현실이 언제든지 한국 만화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겪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작가들이 그리는 만화 자체에 대한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끝을 모르고 성장 중인 한국 만화의 모습은 어느 순간 허장성세가 될 수도 있다. 창작자가 먼저다.
 


 

YOUR MANAⒸ성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