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tic
[스크랩]
킬링 스토킹

비평
 

<킬링 스토킹>
나를 키운 그 집


 

허이모

 

*<킬링 스토킹>의 중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토커를 응징하는 정의로운 주인공?



 

‘집’의 이중성 

집.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단란한 가족이 식탁 앞에 모여 담소를 나누며 밥을 먹는 모습? 뛰어노는 아기의 웃는 얼굴? 따뜻함과 안온함?

그러나 집이라는 단어의 둘레에는 식탁에 앉아 훈계를 듣는 모습, 답답함, 울음, 울분, 폭력, 위험에 노출된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여성과 아이의 이미지도 함께 자리잡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이미지를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어떤 가정은 행복하고, 어떤 가정은 불행한 것으로 집의 층위를 둘로 나눈다.

하지만 행복한 집의 모습과 불행한 집의 모습은 대개의 가정에서 동시에, 혹은 아주 작은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 웃으며 식사를 하다가도 분노에 찬 목소리에 치일 수 있다. 아이의 행복은 손찌검과 매질에 단숨에 찢겨 나갈 수 있다. 단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나의 안전이나 자유를 담보로 잡혀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집은 가족의 공간이고, 사적 행복의 장소이다. 동시에 가장 은밀한 폭력이 자행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늘 소개할 <킬링 스토킹>도 행복한 이미지에 가려진 불행한 집의 민낯을 보여주는 하나의 우화일지도 모른다. 



 

스토킹 죽이기(Killing Stalking) - 죽음을 좇는 스토킹(Stalking Killing) 


쿠기 작가의 <킬링 스토킹>은 레진코믹스에서 주최하는 ‘제2회 세계만화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매주 금요일에 연재되고 있다. 이 만화는 첫 컷부터 뚜렷한 이미지를 나열함으로써 하나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재현해낸다. 



 

윤범의 뒤틀린 욕망 




 

주인공 윤범은 소심하고 음흉한 성격 때문에 어디에서나 ‘아웃사이더’이며 ‘왕따’였다. 그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분명히 뒤틀려 있다. 좋아하는 여자 아이의 샤프를 훔치고, 몰래 뒤를 쫓는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애정을 고착시키게 된 상우는 남자다. 밝고 쾌활해서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고, 모두가 싫어하는 자신을 몇 번 구해주기까지 했다.

윤범은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들키지 않으면서 충족시키기 위해 상우를 스토킹하고, 결국은 그의 집 도어락 번호까지 몰래 알아내 무단으로 침입한다. 

여기까지 봤을 땐 윤범이 못된 놈이 분명하다. 그는 음흉하고 음습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상성욕자로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에 더 강렬한 이미지가 뒤따른다. 



 

친절한 줄로만 알았던 상우의 이중성과 팩트 폭력 



 

윤범은 상우의 집에서 두 다리가 부러진 채 고문받은 여성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때마침 집에 돌아온 상우에게 맞아 정신을 잃는다. 이렇게 윤범의 감금 생활이 시작된다. 

상우 역시 전형적이고, 그렇기에 강렬한 이미지의 조합으로 그려진다. 밝고 쾌활한 성격의 이면에는 부모를 죽이고 그 사실을 숨긴 채, 계속해서 여성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문하고 살해한 연쇄살인범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이제 이 만화의 제목이 왜 <킬링 스토킹>인지 답할 수 있다. 살인범과 그를 스토킹하다 죽음을 지척에 두게 된 스토커의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습관의 무서움 

상우는 이전에 죽여오던 여자들과는 달리 윤범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다. 윤범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 이후로 남자는 죽이지 않거든.”(상우의 말, 2화) 대신 윤범이 집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두 다리를 부러뜨린다.

이때부터 언뜻 비치는 상우의 사연은 특이하지만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신을 폭행했고,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부모님을 죽였다.

부모를 죽인 이후에 상우는 가두고 죽이는 것 외에 진솔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직 채 풀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고 여성들에게서 어머니의 조각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자신으로부터 결코 도망가지 못하도록 죽여버린다.

그런데 윤범은 남성이기에 예외이고, 기회를 얻는다. 그의 마른 몸이 남성보다는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 그의 변덕을 자극한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나마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윤범에게 여자의 옷을 입히고, 부엌일을 시키고, 어머니와 자신이 앉았던 앉은뱅이 소반을 준다. 그것을 이제는 자신과 어머니를 때렸던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본다. 



상우의 '사랑해'는 누구를 향한 고백인가? 윤범인가, 아니면 그가 죽인 자신의 어머니인가? 


 

결국, 상우가 윤범을 죽이지 못하고 어머니 노릇을 시키는 것도, 그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의 자리에 가 앉는 것도 다 그 무서운 ‘습관’ 때문인 셈이다. 모든 것은 해 오던 대로 반복된다.

윤범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1화). 상우의 집에서는 폭력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상우의 진심은 항상 폭력으로 드러났고, 윤범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윤범은 탈출 기회를 얻었을 때도 해방을 꿈꾸지 못한다.

윤범의 몸은 예전부터 폭력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길러진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에 굴종하길 반복하는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는, 단언컨대 집이다. 


 

습관의 형성, 선을 넘지 못하도록 길들이기 




 

행복한 결말의 가능성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윤범이 상우의 집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피엔딩일까? 하지만 윤범이 상우에게서 탈출한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애정을 투사한 대상을 몰래 뒤쫓는 행위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화해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상우는 이미 많은 이들을 죽였기에 두 사람이 함께한다는 것은 윤범이 공범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미 상우를 의심하는 순경이 있다. 상우의 범죄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아 이 관계가 곧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나 전모가 드러나는 파국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자신을 의심하는 순경을 경계하는 상우 



 

더욱이 이 이야기의 끝에 행복이 놓일 가능성을 더없이 쪼그라들게 하는 난제는 상우와 윤범의 관계가 폭력을 매개하지 않고 이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윤범은 폭력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관음증적 욕망의 정당성을 얻어왔다. 상우는 분노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을 숨기기 위해 피상적인 선함을 연출하는 것 외에 상대방과 관계 맺는 법을 모른다.

이렇게 두 사람은 각각 폭력을 주고(상우), 받는다(윤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을 성립하게 하는 한 쌍이다. 단순히 폭력의 종식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폭력의 끝이 바로 그 안정적인 관계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다시 보면 <킬링 스토킹>은 폭력의 교환을 통해 성립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우화로-기실 우리가 매 순간 실천하고 있는 바로 그 우화로- 읽을 수 있다.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나아갈지 궁금해지는 까닭은 파멸의 약속이 주는 안온함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 힌트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폭력이라는 습관을 깨 내고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습관이 공간적 형태로 굳어져 있는 상우의 집을 함께 나서는 것이 될 것이다.

14화에서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선다. 이 외출에 어떤 요소들이 개입할지, 그것이 두 사람만의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 흩트려 놓을지, 두 사람은 이 개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읽는 이들도 그 행보를 보고 자신의 습관과 집, 그 안온한 우리 안에서 한 걸음씩 걸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 밖엔 어떤 삶의 가능성이 있을까? 


 

YOUR MANAⒸ허이모

 
 

<킬링 스토킹>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