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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선택

비평

판도라의 선택
차별받는 자가 품위를 지키는 법

 

 

 로카

 

판도라는 예쁜 것들을 싫어한다. 갖지 못한 것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19세기 미국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 피부가 노랗고 못생긴 여자아이인 판도라가 있다. 미국 귀족 남자와 프랑스의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썩 귀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아이는 위의 세 문장에서 연상될 법한 수동적이며 비극적인 운명의 일로를 걷지 않는다.

현재까지 연재된 분량은 18화에 불과하다. 뭔가 판단하기엔 이르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레진코믹스 제 2회 세계만화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유도리 작가의 <판도라의 선택> 이야기다.




 

"귀여운 아이에게는 당연히 키스해야지!"




이 시기의 작은 미국 마을은 당연히 인종차별적이며 성차별적인 공간이다.

판도라의 집안의 노인들은 판도라의 볼에 키스하기에 앞서 살색이 지저분하니 얼굴을 닦아 보자고 한다.

동네의 의사 남자는 부인을 때리고, 이를 보고 자란 어린 남자아이는 판도라에게 네가 내 부인이었다면 못된 말을 할 때마다 때려 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판도라는 이들 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21세기 한국과 먼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판도라의 이야기는 한국인 여자인 내게도 낯설지 않다. 




차별당한 경험은 낯설지 않다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로고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를 시작으로, 2016년 한 해간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그 언제보다도 동시다발적으로, 많이, 긍정적으로, 뜨겁게 언급했다.

관심사를 공유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여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로 태어난 순간 겪게 되는,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겪은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고무적인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여성 개인이 겪은 고통스런 이야기들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익숙하다는 점이, 또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 고통스러웠다.

그간 모든 메인스트림의 서사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영화, 만화, 문학, 이 모든 것의 중심적 서사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이었으며 어떻게 여성의 역할을 주인공 남성의 이야기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고 축소시켰는지,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지웠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판도라는 마음껏,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도라와도 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다. 또한 차별받는 상황 안에서 판도라가 꾸는 꿈을 우리 역시 꿀 수 있다.




 

판도라의 어머니 베로니카는 아이를 낳고 죽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다.





2016년 한 해는 내가 특히 한국의 웹툰에서 <판도라의 선택>과 같은 작품을 보고 싶어한 해고, 또 이런 작품이 필요한 해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판도라의 선택>이 차별받는 유색인종 여성의 이야기인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위에 적었듯 우리 여성 당사자들에게 차별과 폭력은 공통된 경험이다. 여성혐오는 우리 모두의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모두가 이에 익숙해 차별당하는 본인조차 누군가 말하기 전에는 차별과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처음 이야기할 때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가상의 서사를 만들 때는 더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작품은 분명 현실의 어떤 부분을 재현한다. 재현은 현실을 그대로 복제해 오는 것과 다르다.

이야기의 창조는 선택의 과정이다. 현실의 어떤 요소를 반영할지, 그것들을 어떻게 배치해 어떻게 보이게 할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을 거친 이야기가 작품이 된다.






서사 속에서 피해자가 품위를 지키는 방법

'남자를 등쳐먹는 사악한 여자'로서의 베로니카




소수자가 일방적으로 차별받는 경험만을 전하는 것은 피해자를 완전히 선하고 순결한 위치에 둘 위험이 있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순결한 피해자'상은 오직 순결한 이들만 피해자가 되고, 완전히 선한 사람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말은 남자들을 당황하고 분노하게 하며, 아내로서의 여자를 웃게 한다. 저 대사 뒤 여자가 웃는 컷은 이 만화의 최고 장면 중 하나다.




판도라에게는 차별받을 수많은 이유가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살지만, 판도라는 선하고 순결한 피해자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차별을 이야기하기 위해 택하기 쉬운 두 가지 서사 형태가 있다.

첫째는 가망없이 영원히 고통받는 주인공을 이용하여 독자가 그를 동정하는 동시에 그에 스스로를 이입하게 만드는 학대 전시 서사다.

둘째는 사악한 악당이 순결한 피해자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과정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된 원동력인 '사이다' 서사다.

이런 서사가 '사이다'라 불리는 이유는, 앞의 과정에서 피해자에 이입한 독자는 '고구마'가 목에 막힌 기분에 괴로워하나 결국 악당이 악행의 대가를 치르는 순간 독자도 마침내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달콤한 복수의 순간,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이 이야기를 보는 모두가 말하고 싶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발화되지 않던 바로 그 한 마디를 던짐으로써 모두에게 '사이다'적 쾌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판도라의 선택>은 이런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판도라의 선택>은 아주 품위있고 사려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인간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임을 명확히 한다.




'사교계의 검은 악마'라 불리던 창녀, 판도라의 어머니인 베로니카는 유일한 자산이던 육체 일부를 잃고 판도라의 아버지와 사랑 없이 결혼했다.

그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는 결혼 생활을 지속하다가 아이를 낳고 죽는다. 이는 베로니카의 선택이었다.

베로니카가 아이를 남기고 죽은 것은 작중에서 희생이 아닌 복수로 묘사된다. 베로니카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인은 자신뿐인 삶을 산 것이다.

썩 도덕적이지 않으며 지닌 것 없는 인간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살며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마저 자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비극적이며 궁극적인 품위다.





어린 판도라에게 아버지는 일방적인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판도라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길 원한다.




또한 작가는 주변 인물들 및 그들이 맺는 관계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인다.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고, 증오하고, 사랑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지 않게 묘사한다.

일례로 판도라가 미워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판도라보다 약하고 멍청하며 아름답다. 작중 세계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입체적인 것이 되고, 믿을 만하며 믿고 싶은 세계가 된다.

판도라의 아버지의 유약하고 무해한 캐릭터성은 판도라의 세계를 지나치게 비극적이지 않게 유지하는 안전장치로 작동하는 셈이다. 

사실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는 친절하면서도 입체적인 세계는 우리가 전통적 이야기에서 언제나 보고 싶어하고 믿고 싶어하던 바로 그것이 아닌가?





'나쁜 피해자'도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


판도라는 선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현실의 일부를 재현하는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이 믿을 만한 진실이라면, <판도라의 선택>이 전하는 진실은 우리에게 부당한 세계를 계속 살아나가게 하는 희망과 의지일 것이다.

우리가 약하더라도, 혹은 비이성적이고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주어진 상황 아래서 선택을 하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는 품위있는 종류의 희망과 의지다.

따라서 나는 판도라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또 나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판도라가 앞으로 하게 될 선택을 기다린다. 판도라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자신을 잃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 선택의 끝에 판도라가 쟁취하는 것이 어머니 베로니카가 겪은 비극보다 나은 미래기를 바란다. 더불어 모든 순결하거나 선하지 않은 소수자들이 2017년에 더 나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YOUR MANAⒸ로카

 
 
 

<판도라의 선택>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