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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도련님, 하양지 월드의 남자들

비평

춤추는 도련님
하양지 월드의 남자들

 

 최봉수


*<춤추는 도련님>의 스포일러 및 결말을 포함합니다.
 
하양지 작가는 실존하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작중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유형의 인물들이다.

유미주의적인 도련님이거나 ‘모에’한 예술가랄까. 이들은 하양지 작가의 작품 세계, 즉 '하양지 월드'에서나 간신히 생존할 수 있는 희귀종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최근작 <춤추는 도련님>의 ‘도련님’ 즉, ‘김중만’은 하양지 월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김중만’이라는 인물의 핵심은, 여리고 유약한 소년과 풍파를 겪고 은둔한 노인, 그 둘의 결합으로 드러나는 어떤 어긋남에 있다.

<춤추는 도련님>은 한 인물의 ‘어긋남’을 흥미롭게 묘사해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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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도련님>의 여주인공 ‘한용주’의 눈에 보이는 ‘김중만’의 뒷모습. 아직 ‘김중만’의 과거를 모르는 시점.
 



이런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을까 생각해보면, 하양지가 초기작부터 쌓아온 인물군의 퇴적층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김중만’은 이 지층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그는 하양지 월드 내에서 과도기적 캐릭터 혹은 하나의 마침표가 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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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도련님>은 은사의 부탁으로 시골에 내려간 ‘한용주’가 옆집 이웃이자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성미의 ‘김중만’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담담한 시골 로맨스 물이다.

 


‘도련님’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일상을 따라가 보자.

'도련님' 김중만은 그리그의 페르귄트 1곡 <아침>을 들으며 깨어난다. 비누는 러쉬의 ‘푸른 산호초’를 써야 하고, 즐겨듣는 음악은 비틀즈, 담배는 쎄뇨리타 블루.

브랜드는 알 수 없지만 손목시계도 수집하는 모양이다. 재즈를 틀어 놓고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즐기며 카페 분위기를 내는 모습도 보인다.

한용주는 도련님과 친해지기 위해 취향을 공유하는 척하지만 도련님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의 취향은 그 자체가 폐쇄적인 벽이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다. 트라우마라는 이름의 감옥이다. 그의 취향 추구는 감옥 안에서의 유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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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음악에 곧바로 미소를 짓는 ‘김중만’. 취향의 목록만 살펴봤을 때 유미주의적이라고 수식할 만큼 유별나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 충분히 국내 웹툰계에서 드문 캐릭터다.

 


한편, 하양지 작가의 초기작인 <딸기밭>의 ‘이만수’는 진짜 도련님이다. 19세기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귀족의 거대한 저택을 연상시키는 집에서 집사와 메이드들의 시중을 받는 데다가 개인 셰프, 개인 미용사까지 두고 있다.

다소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부의 척도에서 따지면 ‘도련님’은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그러나 ‘이만수’의 세계에는 취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누리는 것은 계급의 산물에 더 가깝다.

이 계급성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아버지의 지배 아래 가두는 족쇄이기도 하다. 제한적 자유가 주어지는 감옥과 같은 것이다.

차라리 ‘이만수’에게 의미부여가 되는 것들은 ‘정유영’이 좋아하는 ‘부키몽 캐릭터 인형’이나 ‘두 손바닥 새우 피자’다.



 

<딸기밭>(하양지, 봄툰)의 이만수. 재벌 2세이자 착하고 잘 생겼으며 공부를 잘 하는 완벽한 고등학생이다.




‘이만수’가 ‘정유영’과 함께 집을 떠나듯이, ‘김중만’도 ‘한용주’와 관계를 맺어나가면서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다만, 표면적으로 동일해 보이지만 ‘이만수’와 ‘김중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소년적 노인의 예술가적 모에함
 
작가의 전작 <우리는 시간 문제>에 잠깐 등장한 영화감독 ‘이새우’는 ‘김중만’과 궤를 같이하는 인물이다. 무해한 소년성을 가진 대중예술종사자 노인.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태도를 종종 보이지만, 예민한 감수성으로 ‘배수현’과 ‘우유진’을 깊이 있게 관찰한다. 그의 관찰기는 <우리는 시간 문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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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 문제> ‘이새우’의 관찰기 중. “아득한 기분이 드는 이상한 광경이었다.”고 쓴다.

 



‘이새우’는 단편적인 인물이고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 주인공에 대한 제삼자의 재조명이 필요한 타이밍에 적절한 무대와 시점을 제공하는 역할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단순히 기능적인 인물이라기엔 어떤 밀도와 입체성이 감지된다. <달콤한 애드립>의 ‘김대희’처럼 감수성 예민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예술가 노인이라는 설정이 더해져 묘한 복합성을 갖춘다.



 

<달콤한 애드립>(하양지, 레진 코믹스)의 김대희. 문예창작과 학생이자, 시에 재능을 보이는 감수성 예민한 미청년이다.


<우리는 시간 문제>(하양지, 레진코믹스)의 이새우. 명망있는 영화감독이나, 7년 째 신작을 내지 못 한 상태로 시나리오를 집필 중이다.




‘이새우’의 관찰기가 ‘배수현’과 ‘우유진’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어쨌든 ‘이새우’는 한 화 전체의 나레이션을 담당했다.

이 사실을 고려한다면, 작가가 해당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구체적인 내력을 그리고 있었으리라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새우’에 대한 인물 탐구가 ‘김중만’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쯤에서 ‘김중만’의 삶을 '절망의 늪으로 가라앉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살펴보자.
 
‘김중만’은 전성기 시절 국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1세대 아이돌 그룹 ‘윷놀이’의 리더였다. 그러나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그에게 TV 연예계는 적응하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점차 활동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결국 동생처럼 아끼던 그룹 멤버 ‘이성의’의 죽음으로 완전히 무너진다. 이후 은퇴를 선언하고 칩거생활에 들어간다.
 
‘김중만’에 대한 사연이 밝혀지면서, 첫인상의 괴팍한 노인이라는 외피 너머의 것들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그 자리를 채우는 핵심이자 근간은 하양지 세계 특유의 감도 높은 감수성이다.
 
은둔 생활의 지속이 불가능해지자 아예 세간의 궁금증을 잠식시키고자 적당한 TV쇼에 나오기로 한 후, ‘김중만’이 산책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잠시 자신에 대해 쏟아질 부정적 반응을 상상하다가 급기야 눈물을 흘린다.

이어지는 회상은 그게 단순한 자기연민보다는 좀 더 복잡한 심경임을 짐작하게 한다.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하게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할 때 느끼는 아픔과 무상함, 오랜 시간의 흐름 덕에 생긴 초연함 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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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도련님>의 김중만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 가족 드라마를 위한 신파로 소비되지 않는 노인의 눈물이 생경하다.





‘김중만’의 외모에 드러나는 소년성이 잘 녹아나는 것도 하양지 작가의 그림체 덕이다. 하양지 작가는, 정확한 비례와 외형 특징을 토대로 삼기보다는(물론 최소한의 특징은 설정하지만) 그 인물의 인상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어제와 다른 남자들
 
처음 이 글에 대한 착안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춤추는 도련님>은 연재 중반부였다. 당시 떠올린 글의 톤은 다소 달랐다.

<춤추는 도련님>의 ‘김중만’은 전형적인 하양지 특유의 인물 유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반만 맞았고 반은 틀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김중만’은 무해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또, 굳건한 자기 세계가 함락당한 뒤 새로이 둘 만의 작은 세계를 만든다. 이 점에서 역시나 ‘김중만’은 하양지 월드의 거주자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가. 일단 처음으로 눈에 띈 차이가 있다. ‘한용주’와 ‘김중만’ 간의 육체적 관계다.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연출되었음에도, ‘이만수’나 ‘김대희’가 성적으로 철저히 탈색된 존재라는 점을 비춰봤을 때 확실히 생경하다.

“어제랑 똑같은 포즈로 뭐해요들?”

“어제랑 달라요.”

“맞아, 어제랑 달라.”


해당 에피소드의 마지막 대화는 ‘한용주’와 ‘김중만’의 관계뿐만 아니라, 마치 하양지 월드 전체의 인물 관계까지 아우르는 말처럼 들린다.
 
다음으로는 ‘김중만’이 보이는 변화의 적극성이다. 상대적으로, <딸기밭>의 ‘이만수’나 <달콤한 애드림>의 ‘김대희’가 마지막까지 스스로 변하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과 대비된다. 
 
처음부터 ‘이만수’는 자신을 가두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마지막에는 그 세계에서 한정적이나마 벗어난다. 본질적인 인물의 목표는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결말의 여행은 자신의 변화가 아닌 ‘정유영’이 이끈 결과다.

한편, ‘김대희’는 ‘최성애’ 덕에 숲 공포증을 극복한다. 그 덕에 낭독회에서 발표할 시까지 변했음을 유추할 수 있지만, 이 과정은 암시적이고 단편적으로 묘사된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 ‘김대희’의 인간적 변화는 없다. 바꿔야 할 결점이 딱히 없기도 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자신을 바꿔야 할 당위를 요구받지 않는다.
 
반면, ‘김중만’은 자기 주변 세계의 유지만을 원하는 사람에서 훨씬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간다. 살인범(오해였지만)과 싸우는 모습 같은 부분만 말하는 게 아니다.

완결 전 에피소드, 영하 기온에서의 산책을 데이트 삼으며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도련님에게 맞춘 것”이라는 ‘한용주’의 말에 ‘김중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에 행동으로 답하듯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음 화에서 ‘김중만’은 혼자 택시를 타고 읍내로 나가 작은 선물까지 사온다.
 
물론 ‘김중만’의 변화는 곁에 있어 준 ‘한용주’가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점만 놓고 보면 이전까지의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더라도 마지막 화에서 감행한 ‘스스로의 노력’은 작지만 큰 차이라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몇 년 동안 옆에서 보살핀 ‘덕승 씨’가 ‘김중만’이 거의 보통 사람 같다고 느끼고, 심지어 트라우마의 상징이던 자동차 탑승거부증도 극복했다면, ‘김중만’은 더 이상 도련님이 아니지 않은가? ‘도련님’에서 졸업해 ‘김중만’으로의 새 삶이 시작되는 셈이다.
 
‘김중만’의 성장은 하양지가 묘사하는 주인공의 변화 가능성과 폭을 넓혀준다. 하양지 월드의 다음 남자는 어떤 사람이 될지 몰라도, 여전히 하양지의 사람이고 또 전혀 다른 사람일 것이다.

마치 '어제랑 똑같은 포즈'지만 사실은 어제랑 다르듯이.
 

 

YOUR MANAⒸ최봉수
 

<춤추는 도련님>(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