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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비평

사화
탐미주의는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오혁진


<사화>(글 다미, 그림 잿슨)는  케이툰에서 연재중인 작품이다.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죽음의 꽃’이라는 뜻이다. 또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매혹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주인공 ‘베누’의 연인 ‘마리’는 연약한 꽃처럼 바스러진다. 베누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이때, 까마귀가 불길한 형체를 드러내며 비극이 시작된다.

까마귀는 제안한다. 꽃 100송이를 가져오면 마리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평범한 꽃이 아니다. 죽음의 꽃, 인간의 영혼이다. 즉, 다른 인간의 영혼을 희생해 연인을 살리려는 악마적 거래다.

베누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설사 까마귀가 악마일지라도, 심지어 자신의 영혼이 파멸될지라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사화>의 작화를 보자. 창백한 피부와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의 주인공, 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힐을 싣고 몽환적으로 춤추는 희생자. 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은 ‘탐미주의’ 만화를 연상시킨다.

탐미주의는 미의 형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정신보다는 감각을, 내용보다는 형식을, 현실보다는 공상을 중시하고, 미(美)를 진(眞)과 선(善) 위에 두며, 때로는 악에서까지 미를 발견한다.1)

여기에 더해 탐미주의 만화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특징을 공유한다. 세밀하고 화려한 선묘, 비어즐리나 에곤 실레의 작품같은 퇴폐적 분위기, 심미적 쾌락주의가 도달하게 되는 현실의 금기까지.


 

탐미주의 만화는 미(美)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세계관의 작품이다. 아름다움의 대상에는 살인, 근친상간 같은 현실의 금기까지 포함한다.




<사화>의 공간은 판타지의 세계다. 탐미주의를 구현한 세계로, 현실의 금기를 넘나든다. 이질적 존재인 베누와 까마귀는 그 자체로 미적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또한 그들은 여성을 파멸시키기 위해 고안된 세계를 창조한다. 에피소드마다 여성의 불행과 고통을 전시하며, 막바지에 그들을 비극적 죽음으로 이끈다.

문제는 탐미주의가 허용한 세계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공 베누와 달리, 희생자인 여성은 현실의 구체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성폭력, 학교 폭력 등의 희생자로 현실의 윤리를 불가피하게 상기시킨다.

여성의 재현 방식은 단순히 텍스트에 국한되지 않고, 여성의 현실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화>는 이같이 탐미주의 장르적 관습과 윤리적 지향성 사이에서 긴장감을 야기한다. 탐미주의 장르에 균열이 발생했다. 더는 정치적으로 안전한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다.

여성의 문제는 기어코 판타지 세계를 비집고 나와, 현실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성 희생자를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여성의 비극 서사를 어떻게 그려내야 하는가.
 

 
비극적 서사의 상상력에 사로잡힌 여성


<사화>의 각 에피소드의 내용은 고통과 좌절을 겪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여성의 ‘비극 서사’다. 이 비극적 서사는 학교 폭력, 여성 혐오, 성 소수자 문제 같은 현실을 기반으로 직조된다.

여성은 폭력의 희생자로, 고통에 짓눌려 있으며 비탄에 잠겨 있다. 그리고 주인공 베누는 이런 희생자 앞에,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악마적 제안을 한다.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가로 영혼을 앗아가겠다고.

희생자는 거부한다. 하지만 상황은 거듭 악화될 뿐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들은 하나의 꽃, 영혼이 되어 사그라진다.




 

<사화>의 여성 희생자는 가련하고 무기력한 존재다. 평면적인 캐릭터로 희생자의 부정적인 정형성을 강화한다.


 


<사화>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달리 여성의 고통을 쾌락적으로, 탐미주의 관습으로 소비한다. 서사는 ‘준비된 불행과 당연한 결말’ 안에서, 까마귀의 대사처럼 ‘고통과 절망이, 그리고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가령 ‘아이비’ 에피소드의 근친상간 희생자는 음산하면서도 퇴폐적인 여성으로 재현된다. 칠흑 같은 긴 생머리에 공허한 눈빛의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같이 위태롭다.

‘뷰글라스’ 에피소드 희생자 역시 종교의 희생자지만, 문제의식은 탈색되고 여성 신체에 가해지는 가학성만이 도드라진다.
 
여기서 논의를 확장해보겠다. 단순히 탐미주의 비판을 넘어 여성 희생자의 재현 문제로. <사화>는 여성 억압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다. 그들의 고통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여성의 억압적 현실이 반드시 비극적 결말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아니 여정의 끝이 설사 비극이라 하더라도, 여성은 마냥 꽃같이 무기력하게 바스러져야 하는 존재인가?

<사화> 속 희생자는 비극적 서사의 상상력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여성 억압적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기능적 존재다. 여성 학자 정희진이 지적했듯,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전제한다.

이런 피해자화는 마치 모든 피해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한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킨다. 하지만 진실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같은 폭력이라 하더라도 여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각기 다른 강도로 피해를 느낀다.2) 그래서 <사화>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부유한다. 여성의 구체적 내면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하고, 상상할 수 있는 희생자의 모습만을 애써 부여잡는다.
 


어떠한 비극 서사가 되어야 하는가?

<사화>는 에피소드 형식의 작품이다. 자연스레 에피소드마다 수준 차는 존재한다. 분명 좋은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에피소드가 더욱 도드라진다.

여러 에피소드에서, 죽음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차곡차곡 쌓아 가기보다, 극적인 사건을 후반부에 발생시켜 갑작스레 마무리한다.

손쉽게 비극을 향해 나아갈 뿐,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지 못한다. 입체적 심리, 미묘한 인간관계, 복잡한 현실은 매혹적 쾌락 뒤로 물러서 있다.

탐미주의 만화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탐미주의 만화도 그 자체로 여성의 문제를 다룰 가능성은 있다. 강렬한 감정, 극단적 행동 같은 과잉의 양식은 도덕적 비학(祕學)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사회 윤리와 정의가 부재한 현실의 세계. 이 세계에서 베누의 계약은 파멸이라기보다 차라리 개인의 억압을 회복하는 거래에 가깝다. 그들은 초월적인 힘을 통해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아니면 현실 세계를 탈주한다.

결국 어떤 작품이냐가 중요하다. 비극의 강도를 높이는 탐미주의 관습만으로는 문제의식에 도달하기 어렵다. 여성주의 비극 서사는, 그래서, 단순히 여성이 파멸하는 이야기로 그쳐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작품이기 되기 위해서는 비극의 여정을 보다 섬세하게, 보다 사려 깊게 그려내야 한다. 그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여성 억압적 사회구조와 살아 숨 쉬는 여성의 삶을 목도할 수 있다.


 

탐미주의 만화는 종종 윤리적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학교 폭력 에피소드는 방관자이자 가해자인 친구에 대해 온정적 태도로 일관한다.

 


방관자는 안전한가 

만약 이러한 비극 서사의 소실점이 부재하다면, 이 비극은 어떤 풍경을 펼쳐낼까? 이야기 구도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하나의 예로, 모두는 아닐지라도 윤리성이 유예된 어느 지점을 그려내지 않을까. 비극 서사인 <사화>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교 폭력을 다룬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자.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학교 폭력의 희생자다. 마지막 장면, 가해자의 이마에 담뱃불이 지져진다.

가학적 폭력의 순간. 그녀는 소원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지워달라고. 그녀의 선택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왜 가해자가 아닌 그녀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게다가 희생자의 죽음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가해자는 어떠한 죄책감도 없다. 대신 언제나 그랬듯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든다.

정의의 부재는 가해자에 대한 단죄의 실패로만 그치지 않는다. 방관자인 친구에게까지 면죄부를 부여한다. 친구는 중학교 때 폭력을 인지하고도 외면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와서는 주위 압력으로 희생자 이마에 담뱃불을 직접 지진다. 그는 분명 학교 폭력의 구성원이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결코 가해자의 위치에 놓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희생자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그가 진정으로 연민하는 대상은 희생자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게다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건, 심지어 희생자까지 방관자에게 한없이 온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희생자는 죽기 전 방관자에게 말을 남긴다.

"이런 건 더 이상 슬프지 않아.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너에게도 상처가 생긴다는 거야. 미안. 나 때문에 큰 짐을 지게 됐어. 그리고 고마워."

물론 친구도 학원 폭력 구조의 피해자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방관자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말하지만, 적어도 희생자보다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작품의 흐릿한 윤리적 시선과 상관없이, 그는 희생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다.


 
어쩌면 <사화>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다. 탐미주의 장르의 관습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장르의 관습을 무조건 옹호할 수도 없다. 장르란 관습의 누적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누적은 시대의 편견과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사화>도 그렇다. 정형화된 여성 희생자로 관습화된 비극 서사를 구현한 작품이다. 우리는 분명 이보다 더 나은 작품을 바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무력한 여성으로만 환원되는 희생자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또한 희생자에 대한 진실한 이해 없이, 오로지 비극으로만 치닫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좌절된 희생자의 삶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 모순에서야 가려졌던 비극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비극 그 이상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
 

1) 두산백과(링크)
2)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YOUR MANAⒸ오혁진


<사화>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