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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의 ~야한 만화가 좋다~ㅣ②<래빗홀>(하양지,영모)

리타의 ~야한 만화가 좋다~ㅣ②<래빗홀>(하양지,영모)
우리를 전염시키는 비천함, <래빗홀>



 

 이연숙(리타)

 

*완결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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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홀>은 성실하고 매력적인 입주 가정부의 ‘은밀한 비밀’에 대한 만화다. ‘성적으로 방종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정부인 ‘희연’의 시선을 착실히 따라갈수록, 그녀가 어딘가 대단히 비틀려있으며 파괴적인 욕망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희연’의 시선에 의해 집안에 거주하는 모든 인물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포획된다. 이 여자, 도대체 청소를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섹스를 하러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러나 ‘희연’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이 집 안에서 누구도 그녀에게 유혹 ‘당하는’ 것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가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포식자이고 정복자이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삶의 기쁨

‘희연’이 봉사하고 있는 대저택에 사는 인물들은 모두 ‘희연’이 가정부라는 이유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열등하거나 비천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희연’은 이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오로지 ‘희연’만이 그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으며, 그들의 권위를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다.

‘동선’에게 가부장인 ‘건태’와의 관계를 의심당한 직후, 곧바로 이어진 반격에서 그의 무력감을 확인하고 ‘희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굴욕감에 달아오른 얼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흥분돼. 이를 어쩌지? 쟤랑도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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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정원사를 시선으로 희롱하기
 



‘희연’은 자신의 욕망이 독자에게 폭로되는 순간조차 수치를 모른다. ‘희연’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야말로, 대저택과 그곳에 거주하는 품위 있는 인물들에게 모욕을 줄 수 있는 순간이다.

따라서 <래빗홀>에서의 섹스신은 적나라한 포르노이면서 동시에 ‘희연’과 ‘대저택’의 서열이 역전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희연’은 ‘여성’이자 (계급적으로는) ‘노동자’인 자신이 누군가를 욕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섹스를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희연’은 섹스가 ‘좋아서’ 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택에서 일하는 정원사와 섹스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래빗홀>은 ‘희연’이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우리를 전염시키는 비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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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레마>의 방문자, 테렌스 스탬프. 심각하게 잘생겼다.
 


 


매혹적이고 정체 모를 가정부가 한 부르주아 가정을 ‘파탄’ 낸다는 설정은, 파졸리니의 영화 <테오레마>(1968)를 떠올리게 한다.

<테오레마>가 아주 매혹적인 방문자로 인해, (심지어 그 방문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부르주아 가정이 ‘알아서’ 붕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자본주의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방문자는 가정부를 비롯해 차례로 아들, 부인, 딸, 가부장을 홀린다. 방문자가 떠나기 전, 가부장은 자신의 취약성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나를 유혹했지. 나는 자네가 나를 유혹하도록 내버려 뒀어.”
 
재미있는 것은 테렌스 스탬프가 부르주아 가정의 구성원들의 유혹에 응답하기만 해도 그들의 영혼은 심문당하고 파면당해, 결국 ‘너 없이는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부르주아는 심각할 정도로 자의식이 없어 보인다. 왜일까? <래빗홀>의 ‘희연’은, 부르주아 가족에게 리볼버를 겨눈 채 ‘복수의 대리자’로서 그 이유를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당신들이 지금 이 꼴인 건 머리가 나빠서도 운이 없어서도 아냐. 날 그저, 우습게 봐서 때문이지.”


 




<래빗홀>의 식사 장면(좌), <테오레마>의 식사 장면(우). 이 장면 이후 일가족이 완전히 망가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미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무렇게나 죽여질 수 있는 존재는 공기 중에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기에 균열 사이를 쉽게 파고든다.

희연은 “이미 해체된 가족은 공략이 쉽다”고 했지만, 실상 그것은 ‘비천한’ 존재인 ‘희연’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을 임무다. 어떻게 가정부 따위가 감히 당신들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건태’는 ‘희연’의 앞에서 흥얼거리며 ‘아내가 죽으면 재산은 내 것’이라며 천박하게 노래를 부르며 번쩍거리는 리볼버를 닦았고, ‘동선’은 ‘희연’에게 동정심을 사고 싶어 아버지의 악행을 술술 불었다.

‘동희’는 ‘희연’에게 사악한 꿍꿍이가 있으리라 의심하긴 했지만, 차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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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희’는 ‘희연’을 만진 순간부터, 이미 그녀의 비천함에 전염됐다.


 

사실 세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희연’을 우습게 보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육체적 신성함에 눈이 멀어있다는 것이다.

섹스 도중 ‘동희’가 ‘희연’에게 계속해서 ‘너는 우리를 못 건드려’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녀가 눈이 멀어있고 ‘희연’에게 이미 정복당해 있음을 부정하기 위한 반향으로서 드러날 뿐이다.

접촉의 행위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전염의 가능성으로 인해 ‘동희’가 아무리 애를 쓰고 ‘희연’을 부자유스러운 상태로 몰아넣는다고 한들, ‘동희’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가장 목적 없는 복수


여기에 같은 계급으로서 어떤 공감도 표현하지 않은 채 ‘희연’은 그저 “맙소사...”하고 반응할 뿐이다. 마치 화분쯤이야 몇 번 더 맞으면 어떻냐는 듯이 말이다.

“우리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말이죠. 이런 걸 넘기면 또 화분을 맞고 살게 돼요. 이제 그런 건 지긋지긋해요...”

파졸리니가 프롤레타리아인 가정부를 종국에는 가장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래빗홀>에서도 일가를 ‘몰살’ 시키는 것이 결국 분노한 육체노동자라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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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정원사가 맞다. 화분에 맞아서 상처를 많이 받았음.
 

 

그렇다면 <래빗홀>은 누구를 위한 복수극인가? 마지막 화에서 ‘희연’은 가부장인 ‘건태’의 비명을 들으며 마치 극장에서 퇴장하는 관객과도 같은 발걸음으로 그 집에서 빠져나온다. ‘희연’에게 복수를 부탁했던 부르주아 가정의 ‘안주인’인 ‘오마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희연씨 사람은 증오가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던 그녀는 분명히 ‘희연’에게 복수를 대신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여성들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대를 이은 원한’. (가부장인 ‘건태’로 인해 ‘남성적이지 못한’ 남성인 ‘동선’이나 딸인 ‘동희’ 모두 억압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희연’은 빠져나온다. 그녀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있다. ‘희연’은 단지 방관자, 대리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한 가정의 생애가 저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정말... 감동적입니다." 마지막 화에서 ‘희연’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인간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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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and...Peace...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희연’이 폭력적인 가부장인 ‘건태’의 악행을 역겨워했을지는 몰라도 ‘오마리’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동선’이나 ‘동희’같은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동정했을지언정 인간적인 연민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희연’은 거의 사보타주를 하는 예술가에 가까운 태도로, 당당히 왕과 왕비를 유혹한 후 왕궁에 불을 지른다.

아마도 ‘희연’은 앞으로도 자유로울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그녀가 다른 이들의 감정의 연쇄에 휘말려 들어갔다면, 지금처럼 가볍게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까.

 
 

YOUR MANAⒸ리타
 



<래빗홀>(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