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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디스틱 뷰티

비평

새디스틱 뷰티
지나치게 안전한 쾌락
 


 

허이모 



레진 코믹스에서 연재중인 <새디스틱 뷰티> (글/우연희, 그림/이금산). 자신을 에쎄머(SMer)로 자각하기 시작한 천두나를 중심으로, 대학 선후배(?)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쩌면 평범한(!) 삼각관계 로맨스. 젠더/나이/전문성 등 다양한 층위로 중첩된 권력관계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만화를 자신만 알고 있는 은밀한 성적 흥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만화가 수용되어 온 과정을 되짚을 때 성인 만화를 빼놓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회고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성인 만화의 중요성은 웹툰 시대에도 틀린 말이 아니다.

<레진 코믹스>의 경우만 보더라도 개장 초기 성인 만화(<나쁜 상사>를 필두로 <뼈와 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베이글녀가 되어 있었다> 등)의 흥행은 <레진 코믹스>가 제3의 플랫폼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웹툰 플랫폼 중 성인 만화없이 수익 창출이 가능한 플랫폼은 아마 '네이버 웹툰'과 '다음 만화속세상'뿐일 것이다. 그나마 가장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레진 코믹스>의 경우에도 TOP 10 작품 중 반 이상이 성인 웹툰이니 누가 성인 웹툰의 막강한 시장성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으로 안전한 쾌락

그래도 <레진 코믹스>가 성인 웹툰 시장에서 다른 플랫폼과 달리 차별화된 강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안전한 쾌락’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안전할까? 정치적으로 안전한 쾌락을 만드는 마법의 레시피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기존의 권력관계’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에 약간의 부연을 더해보자. 성인 만화는 꽤 많은 경우, (다는 아니더라도) 남성 주연이 여성 조연을 성적 만족을 위해 소비하는 것으로 그려져 왔다.

이제 남성/여성, 주연/조연을 하나씩 뒤집어 보자. 여성 주연이 남성 조연을 소비한다든가, 남성 주연이 남성 주연을 소비한다든가, 여성 주연이 여성 조연을 소비하면 된다.

<새디스틱 뷰티>(글/우연희, 그림/이금산)는 첫 번째 유형의 모범적 사례다. 주인공인 천두나는 여성이며, 남성인 우해솔과 변민호를 성적으로 소비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안전장치가 부족하다. 이는 어쩌면 성기 중심주의나 삽입 섹스 중심적 사고관으로부터 발원한 문제일 텐데, 성기 삽입 섹스를 할 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섹슈얼리티보다 더 능동적이고 지배적인 정서로 그려내기란 녹록지 않고, 이 지점에서 안전장치는 헐거워진다.

아무리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주체적으로 탐험해나가고 있는 장면을 그리더라도, 기존의 성인 만화의 문법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독자에게 두 만화가 크게 다르게 읽히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쾌락은 불안해진다. 내가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고 있는 포르노’에 쾌락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검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아직 초보 멜섭인 우해솔(좌)과 초보 펨돔인 천두나(우)

 

 


<새디스틱 뷰티>가 마련한 안전장치는 천두나-변민호/우해솔의 관계에 BDSM(Bondage, Discipline, Dominance and Submission, Sadism, and Masochism)이라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경한(그러나 재현된 이미지와 서사로서는 충분히 익숙한) 맥락을 한 겹 더 덮어씌우는 것이다.

천두나는 여성 돔(Dominance)으로서, 남성 섭(Submission)을 길들이는 존재로 그려진다. 여기에 하나의 걸쇠가 더 걸린다. 천두나는 아직 미숙한 돔으로 그려지고 본인도 두 남성을 조교 하는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이나 혼란을 겪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컨대 다소 심한 짓을 했어도 "진심은 그렇지 않았어. 미안해. 그때 그 일은 실수였어."라고 말할 만한 당위를 획득한다. 이로써 독자는 정치적으로 안전한 쾌락을 즐길 수 있다.

천두나가 우해솔이나 변민호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과정은 여성의 남성 지배라는 전복적인 서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다. 또한 BDSM이라는 성적 실천 및 하위문화를 존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숙한 시민의 모습인 양 으스댈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이 웹툰에서 이런 류의 정치적 쾌감을 느꼈음을 부인하진 못하겠다.



쾌락의 부모, 죄책감

그렇지만 어떻게 쾌락이 자신의 부모인 죄책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묶이고 맞고 혼절한 남성의 근육을 눈으로 핥을 때 우리가 잊고 싶어 했던 죄책감을, 이제는 끄집어낼 때가 왔다. ‘성별 역전’으로부터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은 쾌감의 뿌리가 결국은 여성의 억압에 뿌리박혀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애초에 여성이 억압된 현실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전제가 아니라면, 천두나가 두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지배하는 국면을 역전의 드라마로 읽어낼 수 없다. 더욱이, 그러한 전제 없이는 이 극의 진행 과정에서 존재하는 폭력을 정당화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전제 없이는 천두나가 여성 가부장으로서 성적 위치가 전도된 팜므파탈(변민호)과 현모양처(우해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정치적으로 ‘괜찮은’ 것으로 허락할 방도가 없다.



 

이 장면이 정말 ‘문제없어’ 보이는가?



 

천두나는 분명히 두 남성의 의사를 완전히 존중하진 않는다. 그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얘, 쟤는 약한 애잖니? 약하면 좀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진짜로 저러진 못할 거니까’라는 자기합리화를 완전히 떼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성별을 떼놓고 우리가 무얼 즐겼는지 생각해보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때리고, 면박을 주고, 맞은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분해 하고, 수치스러워서 우는 장면을 쾌락의 원천으로 삼았다.

우리를 더 부끄럽게 하는 사실은, 폭력을 ‘괜찮은’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을 생식기와 외모에 배분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젠더의 평등을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부인해야 하는 바로 그 구습에 우리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셈이다.





가스라이팅...?!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겨우 겨자씨만큼 허락받은 나의 쾌락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진정한 젠더 평등을 위한 정치적 운동에 투신이나 하라는 것인가? 나는 정확히 그 반대로 말하고 싶다. 성인 웹툰이 주는 쾌감을 부인할 필요는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된다. 다만, 죄책감을 지나치게 안전하고 매끄러운 서사라는 외피에 쌈 싸먹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조악한 비유이지만 목줄(죄책감)이 없다고 믿는 죄인(쾌감)은 우스워 보일뿐더러, 목줄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달린다면 언젠가 질식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보다는 좀 더 천천히, 우리가 서 있는 지형과 우리의 쾌감의 기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반추가 우리가 폭력과 폭력의 재현을 구분하게 하고, 성적 위치를 뒤바꾸는 실천과 재현의 역동성과 한계를 가늠하게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YOUR MANAⒸ허이모

 
 

<새디스틱 뷰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