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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뽀삐

비평

<19년 뽀삐>
인간과 동물, 이중의 서사가 만드는 울림
 

 

성상민
 

 

<19년 뽀삐>는 마영신 작가의 첫 번째 웹툰인 동시에 처음으로 동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성장 만화이다.
 


 

<19년 뽀삐>는 마영신이 그간 그려왔던 만화와 약간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어른, 혹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그려온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요소를 통해 청소년과 어른이라는 두 집단을 모두 포괄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뽀삐’라는 강아지 캐릭터를 통해 처음으로 동물의 이야기를 그리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인간의 서사와 동물의 서사가 이중으로 놓여 동시에 흐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의 작품들에서도 단선적이지 않은 서사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은 많이 보였다. 전작 <엄마들>에서 주인공 주변의 캐릭터들 역시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면서 군상극과 같은 전개를 보여주었고, <벨트 위 벨트 아래>에서는 서술 트릭을 통해 독자들이 작중 캐릭터의 행동과 특징을 섣부르게 단정 짓지 못하게 했었다.

 





마영신이 2011년 <한겨레 hook>에 연재했던 <벨트 위 벨트 아래>의 단행본 표지. 마영신의 작품 대다수는 사람들의 일상을 깊게 다뤘고, 2010년 이후 작품부터는 다양한 서술적 장치를 통해 작품의 깊이를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작품이 주로 사람들의 일상을 깊게 다루는 것과 연관 있을 것이다. 그는 일상을 다루지만 단순히 휴머니즘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때로는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인물들을 미화하지 않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마영신은 그렇게 한 꺼풀 포장을 벗겨낸 민낯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가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특징은 장편 연재만화에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요소다. 극적인 미화를 최대한 줄이며 드러내는 인물들의 삶은, 독자들에게 있어 이미 현실에서 수도 없이 지켜본 지겨운 모습들일 수 있다. 또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서사는 작품의 흐름이나 구조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작가 역시 밀착된 리얼리즘 묘사의 한계를 인식했던 것일까. 2010년 이후로 마영신이 발표한 작품 상당수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사를 조금씩 비틀면서 독자들이 쉽게 전개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작품 내적으로는 비틀린 서사를 작품의 주제와 연결지으며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 장치로 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19년 뽀삐>의 이중 서사는 어떤 식으로 쓰이고,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동물 같은 인간, 인간 같은 동물
 
<19년 뽀삐>는 두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하나는 제목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강아지 ‘뽀삐’이며, 다른 하나는 뽀삐의 주인인 병걸이다. 그리고 작품의 초점 대부분은 병걸에게 맞춰져 있다. <19년 뽀삐>는 기본적으로 청소년이었던 병결이 조금씩 자라며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 성장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걸의 성장담 사이에 뽀삐의 이야기를 채우며 극의 구조를 짜 맞춘다.
 
병걸이와 뽀삐는 병걸이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는 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지만, 이 두 주인공은 애초부터 종족이 같지 않기에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때로는 극의 전개를 위하여 직감적으로 상대편의 처지를 파악하는 듯한 묘사가 가끔 나오지만, 이러한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붙어 다니면서도 떨어져 있는 두 주인공의 세계는 작품에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병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서사, 뽀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동물의 서사는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발생하지만 이 두 개의 서사는 분리된 상태로 흐른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서사는 계속 교차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마냥 독립적이지 않은 이 두 흐름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두 서사를 비교하고 대조하며 바라보게 만든다.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작중의 인간이 무척이나 동물적이고, 동물은 무척이나 인간 같다는 점이다.

 




병걸은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찾아가 폭력을 행사하며 복수 한다. 다른 인간들의 모습도 욕구와 본능에 충실하긴 마찬가지다. <19년 뽀삐>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동물 같다.



 

먼저 인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인간 주인공 병걸은 태어날 때부터 왼쪽 귀가 없는 장애인이다. 그로 인해 병걸은 계속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고 소외되고 만다. 심지어는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던 친구들마저 어느 순간 자신을 귀가 없다는 이유로 놀려 상처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병걸은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자신을 놀린 친구들을 밤중에 찾아가 마구 차고 때리며 복수 한다. 괴롭힘과 복수 사이에 대화와 같이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은 관찰되지 않는다. 병걸은 뽀삐와 함께 있을 때를 제외하면 마음의 문을 닫고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모습은 병걸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병걸의 친구였던 치호는 병걸이 자신의 이름을 장난스럽게 말했다는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 앞장서서 병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 주영마저도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병걸과 다른 친구에게 책임을 몰며 어려움만 모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주인 없는 개를 망치로 때려 잡아 보신탕을 해먹으려는 개장수, 병걸의 낮은 학력과 장애를 이유로 딸과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여자 친구 주정의 부모님들 역시 비슷하다. 작중의 인간들 대부분은 이기적이며 본능으로 가득한 속살을 겉치레로 숨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직접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표출하는 병걸이 더 진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동물들에게서는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면모가 관찰된다. 뽀삐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개들은 서로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마구 얻어맞는 병걸을 구하기 위해 다른 개들과 함께 달려드는 뽀삐처럼 서로를 돕는다. 이해에 앞서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인간들과 달리 동물들은 최대한 서로의 입장을 듣고 파악하려 애쓴다.
 
물론 아무데서나 똥을 싸고 짝짓기를 하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사소한 이유로 상대를 차별하고 관계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리는 작중의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만나고 이해할 때
 
이렇게 인간과 동물의 특성이 뒤집어진 세계의 중심에는 병걸이 서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병걸 역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일면이 있지만, 그러한 행동의 배경에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차별하는 동물 같은 인간의 세계가 있다.
 
무척이나 폭력적이며 때로는 잔인한 세상에서 병걸은 뽀삐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심정적인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성장한다. 반면 뽀삐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무척이나 행동력이 강하고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지만 병걸의 앞에서는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이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병걸의 단짝이 된다.
 
<19년 뽀삐>는 그렇게 19년에 걸친 병걸과 뽀삐의 교류를 그리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단순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면수심’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 겉모습만 사람이지 속은 동물보다도 못한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동시에 <19년 뽀삐>는 인간이 어떻게 동물을 바라보며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 속의 동물들은 작중에 등장하는 동물들처럼 인간 같지는 않아도, 단순히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9년 뽀삐>는 인간인 병걸과 동물인 뽀삐의 오랜 만남과 관계를 통하여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이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하는지를 말한다.
 



 

물론 누군가는 <19년 뽀삐>에서 그려진 동물들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속내를 밀착해 그려내는 마영신의 장기는 <19년 뽀삐>의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지만, 정작 <19년 뽀삐>의 동물들은 인간들보단 한 발짝 떨어져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어도, 인간들을 바라보는 깊이와 비교하면 분명 동물들을 바라보는 깊이는 상대적으로 얕다. 어찌하여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마치 <19년 뽀삐>의 결말부에서 친구가 그린 만화의 뽀삐처럼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려 해도 결국 ‘인간이 바라본 동물’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분명 <19년 뽀삐>는 인간과 동물, 양자의 모습과 관계를 함께 그리며 앞으로의 갈 길을 모색하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동시에 마영신이 앞으로 그릴 작품의 색채가 더욱 다채로워질 것을 예고하는 만화이기도 하다. 앞으로 그가 그려나갈 리얼리즘 만화의 향방을 궁금하게 만드는 단초가, 바로 <19년 뽀삐>다.




 

YOUR MANAⒸ성상민

 
 

<19년 뽀삐>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