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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은 만화인가 ④

매체 비평ㅣ웹툰은 만화인가 ④

 

웹툰의 세계 표준문법과 스토리보드

손지상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만화는 매체 별로 독특한 문법이 있다.

ㄴ. 만화의 문법은 ‘뜨거운 매체’인 영화의 편집 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ㄷ. 이시카와 준이 주장한 ‘만화력’은 그중에서도 영화의 몽타주 이론에 영향을 받은 일
본식 출판만화 문법을 가리킨다.

ㄹ. 프랑스의 방드 데시네와 미국의 그래픽 노블은 각각 자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이시카와의 ‘만화력’은 적용되기 어렵다.

ㅁ. 텔레비전과 컴퓨터 화면은 모두 ‘차가운 매체’로, 이에 의존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웹툰은 ‘차가운’ 특성을 가진다.

 


세계 표준문법, 웹툰


출판만화의 Z자 시선이동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일본 만화는 본래 I자 배열이 주를 이루었다.
 
일본 만화비평가 나츠메 후사노스케는 <데즈카 오사무의 모험>에서 데즈카 오사무가 I자 배열에서 Z자 배열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데즈카는 기존의 만화에 없던 ’스토리’와 ‘드라마’를 도입하기 위해, 다시 말해 만화를 ‘차갑게 보는 것’에서 ‘뜨겁게 읽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몽타주를 도입하면서 배열을 바꾼 것이다.


 

 
 

일본의 스마트폰 만화 플랫폼 주식회사 후모아는 한 콘퍼런스에서 이미 한국의 웹툰식 스크롤 다운이 세계표준 문법이며, 일본의 출판만화 노화우가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던 웹툰의 I자 배열을 새로이 주목하는 이유는, 외국에서조차 웹툰을 컴퓨터 화면 문법의 표준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표준 문법’이라고까지 불리는 웹툰의 연출 문법은 아직 경험에 의존하는 단계이다. '문법’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론적 형식화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I자 배열의 문법에 대한 실마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토리보드를 살펴보자.

 


스토리보드는 영상의 설계도

스토리보드는 크게 이미지보드와 스토리보드로 나뉜다. 이미지보드란 이야기의 대략적인 얼개를 시각화한다. 반면 스토리보드는 본격적으로 영상을 설계하는 목적으로 제작한다.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픽사의 이미지보드. 픽사는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고 이미지보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편집하여 스토리를 구성한다.




미국 만화의 '패널'과 일본 만화의 '컷'의 차이는 스토리보드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미국의 스토리보드는 그래픽 노블과 마찬가지로 ‘패널’ 안에 대사와 연기, 카메라의 움직임 등이 모두 들어가 있다. 두 매체 모두 ‘스토리’를 ‘판(=보드, 패널)’에 옮긴 것이라는 개념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1993)의 스토리보드. 영상의 다이내미즘(변화가 두드러지는 순간)보다 스토리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화살표 등을 사용해 사건을 설명하는데 치중한다.


 

 


반면 일본은 스토리보드를 '콘테' 혹은 '에콘테'라 부른다. 우리나라 만화계에서 사용하는 ‘콘티’와 유래가 같은데, 영화의 ‘콘티뉴이티 스크립트’에서 나온 말이다.

본래 영화계의 ‘콘티뉴이티 스크립트’란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마스터 신 스크립트’ 이전에 사용하던 양식이다. 제작 스태프가 어떻게 영상을 만들 것인지를 알리는 기술문서의 성격이 강해, 미국의 이미지보드나 스토리보드와 달리 스토리를 전달하는 목적이 적다.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1979)의 스토리보드. 토미노 요시유키는 배우의 연기나 스토리 흐름보다, 영상의 다이내미즘을 연출하는 것을 더 중시하다. 따라서 그림보다 지시문 등이 더 많이 기재되어 있다.

 
 
 


일본의 에콘테는 영상의 흐름이나 편집 등 영상의 다이내미즘을 중심으로 한다. 정보량도 적고 개별 칸 보다 칸이 만드는 게슈탈트를 더 중시한다.

미국식 스토리보드는 스토리를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뜨거운’ 매체다. 반면 일본식 에콘테는 ‘보는’ 목적으로 만드는 ‘차가운’ 매체다.

따라서 ‘차가운’ 웹툰의 문법과 비교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일본의 에콘테 방식이 더 적합하고 할 수 있다. 스토리보드를 에콘테로 한정하여 이후 논의를 진행한다.



스토리보드의 표준모델, 미야자키 하야오

스토리보드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선라이즈의 토미노 요시유키다.

미야자키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제작하며, 젊은 제작진을 위해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법, 읽는 법, 레이아웃으로 짜는 법 등 교육용 교재를 스토리보드 형식으로 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업계에서 그의 스토리보드 형식은 표준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 스토리보드. 그림 옆에 상세한 지시사항과 대사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웹툰과 유사한 독서경험을 선사한다.

 

 


미야자키의 스토리보드를 살펴보면, 컷의 나눔은 대사나 화면상의 중요한 움직임 등 ‘새로운 정보’가 있을 때마다 이루어진다. 

그러나 단순히 압도적인 필력과 영상의 다이내미즘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연속동작의 분절이 아닌, 캐릭터의 내면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칸을 나눈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스토리보드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도 플롯에 무리가 없는 이유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캐릭터의 내면이나 기억까지 영상으로 옮긴다. 그는 스토리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캐릭터와의 동화’라고 말했다. 캐릭터에 이입해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본의 평론가 카노 세이지는, 그의 캐릭터를 향한 감정이입이 과도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스토리보드 <이옷집 토토로>에서. 애니메이션에서는 단순히 메이의 질문에 “토토로”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나, 스토리보드에서 확인 가능하듯 토토로의 행동에는 내적인 이유가 기재 되어있다. 웹툰과 거의 차이가 없는 독서경험을 전해준다.





그의 스토리보드에서는 ‘영상의 다이내미즘’과 ‘캐릭터 내면의 다이내미즘’이 동조하기에 몽타주와 같은 ‘게슈탈트’가 탄생한다.

실제로 그의 스토리보드는 모두 출판되어있고, 인기도 높다. 본편을 보는 것 이상의 재미를 주면서도 읽을거리로서도 충분히 기능하기 때문이다.

웹툰의 모델이 될 만한 작품은 일본 만화계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계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다. 



스토리보드의 기본원리, 토미노 요시유키

영상 작품은 시나리오 등에 미리 설계된 내면의 다이내미즘을 스토리보드로 옮기는 작업이다. 달리 말하면 작품을 완성하기 이전에, 설계도를 만들기 이전에 캐릭터/플롯/연출 각각의 다이내미즘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협업을 불러오고, 소통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을 정리한 것이<기동전사 건담> 등으로 유명한 토미노 요시유키다. 그는 스토리보드의 교과서 <영상의 원칙:개정판(映像の原則: 改訂版)>(키네마순보)를 발표했다.

이 책은 동서양 고전 연극에서부터, 무성영화 시절 몽타주 이론 등 다양한 편집 이론을 총망라한 기초이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영상을 전달하기 위해 스토리보드를 원리이자 중심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토미노 요시유키의 <영상의 원칙 : 개정판>은 ‘에콘테 지상주의’를 주장하며 스토리보드를 만드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주장한 영상의 다이내미즘과 내면의 다이내미즘을 일치시키는 방법론의 하나로, '하수와 상수'라는 개념이 있다. 


일본 연극계에서는 객석에서 보았을 때 무대의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시모테(下手, 이하 하수)와 카미테(上手, 이하 상수)라고 부른다.

가부키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시각적으로 왼쪽이 아래, 낮은 것, 불안한 것을 의미하며 오른쪽이 위, 강한 것, 당연한 것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영상의 원칙 : 개정판>에서 소개하는 상수와 하수의 원리를 도판으로 요약한 것.

 
 
 


국내 연극계에서도 하수와 상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서양 연극에서도 블로킹(연극, 발레, 영화 등 무대 위에서 배우의 움직임이나 위치를 지정하는 것)을 할 때 ‘스테이지 레프트(=하수)’, ‘스테이지 라이트(=상수)’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토미노는 하수와 상수라는 개념을 통해 영상을 조직해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는 동시에 출판만화와 웹툰의 매체 차이를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출판만화와 웹툰의 시선 흐름 차이

출판만화는 한 페이지를 다 읽고 나면 하단 마지막 칸에서 다음 페이지의 상단 첫 칸으로 시선을 ‘역행’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출판 만화의 경우 칸마다 ‘몽타주’를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독자가 ‘몽타주’를 만들어야 한다. 출판만화는 그만큼 정보의 ‘해석’을 요구하는 ‘뜨거운’ 매체다.

 
 
 

출판만화의 시선이동. Z자 이동을 하면서, 페이지를 이동할 때마다 비약한다. 웹툰에는 없는 시선이동이다.

 
 
 


반면 웹툰에서 ‘역행’하는, 다시 말해 하수에서 상수로 비약하는 시선 이동이 없다. 그런 경우는 페이지를 놓쳤거나, 한화를 다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때뿐이다. 그만큼 ‘차갑고’, 직관적이며, 관성적인 독서경험을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정보의 변화는 역행(비약)이기에, 빠른 시선 흐름을 거스르며 독서를 방해한다. 각 칸마다 기존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연속동작의 분절’과 같은 칸의 배치가 더 요구되는 것이다.

 


웹툰의 ‘차가운’ 만화력을 기대하며

'웹툰은 만화인가?'라는 질문은, 웹툰이 기존의 만화 매체보다 못하다는 웹툰 초창기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웹툰이 기존 만화의 위상을 뛰어 넘은 후에야, 웹툰은 자연스레 만화의 일부로 포섭되었다.

그러나 웹툰이 '만화'의 일부이듯, 출판만화 역시 '만화'의 일부다. 출판만화가 만화와 동일시 되어왔기에 우리는 이 지점을 간과하곤 한다. 웹툰을 새로운 만화로 인식하고, 만화와 출판 만화를 혼동하면서, 매체의 차이를 막연히 짐작만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질문해보자. 웹툰은 만화인가? 웹툰은 만화이며, 출판만화가 아니다. 출판만화도 만화이며, 웹툰이 아니다. 이시카와 준의 만화력은 더 이상 웹툰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웹툰의 만화력을 측정할 수 있는 편집원리를 파헤쳐야 하는 것일까?

기존의 이론들을 좇는 이 글을 통해, 웹툰이 기존의 매체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여전히 이시카와 준의 주장에 대한 대전제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매체마다 적합한 만화력이 있으며, 그에 부합할수록 '좋은 만화'인가? 그 대답은 웹툰의 역사 이후에 가능할 것이다. 웹툰의 차가운 만화력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웹툰은 만화인가 ④ (끝)


 

YOUR MANAⒸ손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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