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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갑놓고나왔다

비평

아 지갑놓고나왔다
어머니라는 욕망, 딸이라는 욕망
 

오혁진


 

"각기 다른 결로 일렁이는 아버지라는 파도가 친다. 만화 속 많은 아버지는 주인공의 근원적 물음이 되어 행동의 동기를 마련하고 몇 가지 선택지를 던져주곤 한다."(선우훈, 아버지를 향한 파도-링크)
가령 윤태호의 작품 <야후>, <이끼>, <미생>의 아버지는, 법과 언어를 지배하는 상징이 되어 주인공인 아들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는다.

만화 속 아버지와 아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으면서 흥미로운 일이다. 작품 내적으로는 작품의 풍부한 결을 드러낼 수 있으며, 작품 외적으로는 부자 관계를 구성하는 사회의 한 측면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의의와 별개로,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 관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그 많은 아버지가 있다면, 그 많은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응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작품 속 그들의 관계는 외면당하고 공백으로 비어 있었다. 여성 작가의 자전적 작품이 주목받는 최근조차, 어머니와 딸의 실체는 아직 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미역의효능 작가의 <아 지갑놓고나왔다>는 붓펜으로 단촐하게 그린 투박한 작화가 특징이다. 미역의효능 작가는 다음에서 주관한 루리웹 공모전을 통해 데뷔했다.

 
 
 
 

선이 만들어낸 세계

성폭력, 낙태, 미혼모. 이 모든 것이 <아 지갑 놓고 나왔다>가 담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 노선희는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끔찍한 기억을 안고 성장한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고민하다 미혼모가 된다. 굉장히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작품을 접해보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그것은 비극을 흘려보내는 캐릭터의 힘과 함께 유려한 ‘붓 선’으로 그린 작화의 특별한 힘에 기인한다. 흰 여백과 단출한 검은 선으로 구성된 그림은 비극적 세계를 정적이고 평온한 세계로 변모시킨다.

그렇다고 <아 지갑 놓고 나왔다>가 소재의 무거움을 외면한 작품은 아니다. 단순하다 못해 추상적이기까지 한 선들은 인물의 텅 비고 쓸쓸한 내면을 나타낸다. 무겁게 짓눌린 선의 흔적은 때때로 주인공의 격양된 감정을 표현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작품의 주제를 직접 형상화한다.

일련의 '선'은 낙태를 상징하는 ‘탯줄’로, 모녀를 이어주는 ‘전화선’으로, 그리고 미혼모의 현실을 분노하는 ‘중첩된 언어’로 재현된다. 밑으로, 밑으로 길게 늘어진 선은 그렇게 인물의 깊은 내면으로 침전해 들어간다.

 

 

 

 


하강하는 선의 이미지는 탯줄과 전화선 그리고 중첩된 언어로 표현되면서 작품 주제(성폭력, 낙태, 미혼모)를 형상화한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아 지갑 놓고 나왔다>는 미혼모 ‘선희’와 교통사고로 귀신이 된 그녀의 딸 ‘노루’의 이야기다. 딸 노루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선희와 다시 환생하여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노루의 이야기가 번갈아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성폭행, 낙태, 미혼모 문제 등이 자연스레 환기된다.

이렇게 연쇄된 사건의 흐름을 따라 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인 경자와 주인공인 선희 그리고 그녀의 딸 노루로 이어지는 수직 관계로 작품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해석을 그려 볼 수 있다.

성폭력, 미혼모와 같이 사건의 원인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각 여성이 직접적으로 대치해야 하는 인물은 바로 그들의 ‘딸’이거나 ‘어머니’다. 즉, ‘모녀 관계’는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며, 여성 문제와 함께 여성의 심리적 공간까지 깊게 파고든다.

 


딸을 욕망하다


주인공 선희와 어머니 경자의 비극은 선희가 9살 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희는 사촌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하지만, 선희 아버지는 자신의 형을 생각해 이 범죄를 조용히 넘기려 한다. 경자는 남편을 포함한 친족과 갈등하다 결국 이혼하고 딸 선희와 단둘이 살게 된다.

경자는 주체적 결단으로 가부장 세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딸을 '성적으로 더럽혀진 여성'으로 생각하며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게다가 가부장 세계에서 이탈한 그녀가 다다른 곳은, 또 다른 아버지의 세계,즉 하나님이 있는 종교의 세계였다.

경자는 아버지 세계의 충실한 대행자가 되어 선희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 한다. 딸에 대한 이런 소유욕은 그녀가 개업한 식당 이름에서 다시금 확인된다. 식당 이름은 ‘선희’와 ‘경자’ 의 첫 글자를 떼어 붙인 ‘선경’이다. 경자는 딸을 위해 이혼했고, 딸을 위해 일했으며, 딸을 위해 기도하지만, 경자의 집은 죄의식과 자기 부인을 강요하는 억압의 공간일 뿐이다.

 

 

 

모녀는 새 보금자리에서 행복을 꿈꾸지만, 그 가게는 죄의식과 자기 부인을 강요하는 억압의 공간이 된다.

 


선희는 어머니 경자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치 않는 임신, 즉 남성의 힘을 빌려서다. 이렇게 선희는 미혼모가 된다. 애정과 상관없이 태어난 딸 노루. 하지만 노루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선희는 노루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노루의 얼굴이 사람 얼굴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선희는 자신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얼굴이 ‘새’처럼 보이는 환각을 겪고 있었다. 딸 노루는 성폭행 사건 이후 처음으로 새의 얼굴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선희는 자신과 닮은,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한 노루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낀다. 애정의 원인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모성애라기보다 차라리 자기애에 가까웠다. 선희는 딸 노루를 자신의 세계에 묶어 두려 한다.

낯선 것들은 전부 추방하고, 경자의 세계보다 더욱 고립된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간다. 하지만 두 사람만이 함께하는 세계는 곧 무너진다. 선희가 어미니 경자의 곁을 떠났듯, 노루 역시 어머니 선희의 곁을 떠나간다.

 

 
 
 
 

선희는 성폭행 사건 이후 사람의 얼굴이 새처럼 보이는 환각을 겪는다. 그것은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고착과 분리, 귀속과 이탈
 

어머니만 딸을 욕망하는 건 아니다. 딸 역시 어머니를 갈망한다. 선희의 경우 어머니를 거부하지만, 그녀의 심층에는 어머니를 향한 애정이 잠재해 있다. 선희는 어머니 경자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탈하고 싶지 않은 마음, 즉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가 자신을 잡아주길 바라며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힘주어 낸다. 그리고 꿈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상실한 어머니 경자를 찾아 헤맨다.

이렇게 어머니와 이탈을 통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어머니와 귀속을 통해 동일시를 열망하는 딸. 이 모순적 감정은 선희의 딸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당과 대면하는 노루를 통해 보다 선명해진다.

무당은 노루가, 앞으로 선희가 낳을 아이의 혼을 뜯어 먹고 결국 선희까지 자살하게 만들 거라 예언한다. 심지어 노루는 이 과정에서 "엄마가 나 말고 다른 애를 낳는 거는 싫어요. 엄마는 내 꺼야. 내 꺼를 남한테 주는게 어디가 좋아?"라며 뒤틀린 집착을 드러낸다.

 

 
 

 

딸 역시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열망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에 왜곡된 욕망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자하는 욕망. 이 욕망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자기 모순적이다. 그래서 무당은 또 다시 가상의 미래를 노루에게 보여준다. 만약 살았다면 언젠간 대면했어야 할 그 순간을.

노루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자신의 주체성을 매몰시키거나, 어머니와 결별하고 원초적 애정의 대상을 상실하거나.

마침내 노루는 결정한다. 완전무결한 애정, 이것은 사실상 ‘움켜잡을 수 없는 텅빈 세계’이기에, 노루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경자를 두고 떠난다. 자신을 배신자라 저주하면서도, 절대 어머니 선희처럼 되지 않을 거라 되뇌며.

 

 

 

딸 노루는 굴절된 모성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어머니 선희로부터 이탈한다.

 

 
 
 

왜 어머니와 딸의 관계일까?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여성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체험의 양식으로서 여성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넘어, 여성 간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기회를 제공한다.

<아 지갑놓고나왔다> 역시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여성의 자매애적 연대를 보여준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선희를 붙잡고 지탱해준 건 바로, 이웃집 아줌마와 그녀의 친구였다.

 <아 지갑놓고나왔다>는 어머니와 딸의 반복되는 고착과 분리로 이야기를 추동한다. 실제 모녀 관계는 이보다는 더 미묘하고, 더 복잡할 것이다. 모녀의 단절이 반드신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서로에게 소외되지 않는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아니면 다른 관점에서 모성의 신화를 전복하고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그려낼 수도 있다. 아직 들려주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드러내고 서사화하는 것은 앞으로의 작품들 몫이 될 것이다.

지갑을 두고 온 딸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머니와 대면하게 될까?

 
 
 

YOUR MANAⒸ오혁진

 
 
 
 
<아 지갑 놓고 나왔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