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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

덴마
<덴마>의 여자들 -무엇이 그녀들을 힘들게 하는가?
 
 
 

 

 

에티앙

 
 
 

<덴마>는 어떤 만화인가?
 
SF 대서사시. <덴마>에 흔히 따라오는 수식어다. 그런 찬사에 걸맞게 <덴마>는 6년이 넘는 연재 기간 동안 노련한 솜씨로 각양각색의 삶을 그려왔다. 주로 남자들의 삶을.
 
 
 

<덴마>의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 왔는가?
 
<덴마>는 원래 그런 만화였다. 여자 몸을 농담거리로 소비하고, 늘씬하고 순종적인 여자만을 매력 있게 묘사하며, 그런 여자들이 가부장적인 남성에게 극적으로 구원받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만화였다는 말이다.
 
양영순 작가는 데뷔 이래 유구하게 그런 만화를 그려왔다.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천일야화>에서조차 세라자드는 젊고 순결한 몸으로 왕을 내조하며, 아들을 통해 남편의 야망을 실현하는 주변의 존재로 남는다.
 

 

 

 

 비교적 최근 에피소드에 등장하는‘여’전사들.

 
 
 

 

어둠 세계의 실력자에게 유일한 약점은 어리고 나약한‘여’동생이다. 

 

 
 


하지만 <덴마>는 더 이상 그런 만화가 아니게 되었다. 작품 초기에 등장하던 연약한 여동생과 고통 받는 창녀가 사라지고, 한눈에 봐도 ‘남성적인’, '부치 같은' 여성 인물들이 빈자리를 메우게 됐다.
 
작가의 여성관이 변했기 때문인지, 갑작스레 이슈가 된 페미니즘과 그에 따른 독자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다. 사람 마음이란 건 결국 자기 자신도 모르는 거니까, 누군가의 정치적 선택이 얼마나 순수한가는 그저 영원히, 아무도 모를 문제이다.
 
그런데 그걸 굳이 알아내는 게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 됐다. 여성혐오라고 낙인찍힌 작품은 인터넷 트롤링과 소비자 보이콧의 대상이 된다.
 
‘강남미인’을 유행시킨 만화가 마인드C, 로리타 콘셉트의 화보를 주로 찍는 사진작가 로타 외에도 많은 작가와 작업물이 비판의 목소리에 더해진 인격 모독과 악성 루머 유포에 시달려야 했다.
 

 

<덴마>의 여자들은 어떻게 살기를 요구 받는가?
 
<덴마>와 양영순 작가의 과거 작품들 역시 언제든지, 얼마든지 도마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판국은 바뀌어, 뒤늦게 등장한 ‘강인한 여성(아마도 레즈비언)’ 인물들 덕분에, <덴마>는 여성 인권 친화적 세계관으로 궤도를 튼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말로? 여자 주인공의 직업이 창녀 대신 소설가가 되면 남녀가 평등한 만화인가? <덴마>가 성적 불평등을 영속화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창녀를 묘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녀를 ‘그렇게’ 묘사했기 때문일까?
 
<덴마>의 창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는 남자에게 젠더 폭력(강제적 키스와 스토킹)을 당한다. 그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창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녀 대신 후장을 따먹힌다.
 
그리고 창녀는 자신을 위해 남성성을 포기한(그것이야말로 남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희생이므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매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원인과 과정들은 사라진다.
 
 
 
 
 

‘헌신적 여성’이라는 가부장적 성 역할을 충족함으로써 그녀의 매춘은 당위성을 얻는다.
그녀가 창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이고도 절실한 이유: 누이로서의 사랑.

 


 
 
그녀는 사실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기에게 억지로 키스하던 남자가 자기의 몸을 돈으로 산 남자와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녀는 섹스에 큰 정신적 가치를 두지 않아서 매춘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덴마>의 창녀는 몸으로 시각적 자극을 제공하되 정신적으로는 끝까지 ‘헌신적인 누나’의 위치를 점하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 설정은 남자의 희생이 보다 낭만적으로 느껴지게끔 돕는 서사적 장치이기도 하다.
 
 

 
 

정형화된 레즈비언의 이미지는 언제나‘남성적’이다.
 
 

 

 
 

그렇다면 짧게 자른 머리의 ‘세 보이는 언니’는 어떻게 그려지는가? 그녀는 분명 평면적인 창녀보다는 층위가 있는 인물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영웅이 시각적으로 성 반전된 남성 대체재일 뿐이다.
 
‘토큰’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국어로 순화하면 승차권이라는 뜻으로, 흔히 주류 서사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제스쳐로서 포함해주는 소수자를 가리킨다. 이런 소수자들은 어디까지나 서사적 장치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아이덴티티가 아니라 정형화된 이미지를 대변한다. 승차권으로서의 빈곤층은 언제나 점심시간에 몰래 수돗물을 마시고, 흑인은 농구와 힙합을 좋아하며, 장애인은 순진하고 이타적이다.
 
토큰 레즈비언 역시 언제나 남자의 언어를 빌린다. 즉 머리가 짧고, 눈매가 사나우며, 말투는 거칠다. 주류적 젠더관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레즈비언들은 결국 남성 기득권의 편견만을 반영하게 된다. 여자의 몸을 욕망하는 여성 주체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레즈비언은 필연적으로 ‘남성적’이리라는 기대를.
 
 
 

무엇이 정말로 여자를 힘들게 하는가?
 
가부장제가 독재해온 역사 속에서 창녀, 페미니스트, 후죠시, 레즈비언은 동음이의어이다. ‘남근의 영향권을 벗어나 능동적으로 성적 자극과 만족을 찾는 여자’,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성을 가볍게 아는 여자’는 남성 기득권의 눈에 전부 한통속이라는 얘기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남자보다 잘나갔던 많은 여자(마리 앙투아네트부터 엘리자베스 여왕까지)가 레즈비언 의혹을 받아왔다. 아니 레즈비언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뭘 ‘의혹’ 씩이나 싶지만, 가부장적 시선으로 볼 때 여성의 자위(고추가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성행위와 성에 대한 담론은 안타까운 자위에 지나지 않으므로)는 수치스러운 낙인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남성 기득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레즈비언과 창녀를 악마 화하는 걸로는 모자라다. 가부장제는 계속해서 창녀와 레즈비언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소비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도덕적, 이성적으로 완벽한 (백인)남성의 자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서구 모더니즘은 끊임없이 ‘자아란 독립적으로 존재 가능한 개념’임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자아가 정말로 독립적이라면 그걸 굳이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열등한 동양과 야만적 아프리카 없이는 청결하고 합리적인 유럽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적 시선은 계속해서 자기 입맛에 맞게 창녀와 레즈비언, 망가진 여자와 강인한 여자를 분류한다.
 
물론 그 분류법은 언제나 상냥함의 가면을 쓴다. 창녀는 게걸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그저 피해자일 뿐이고(게걸스러워서 안 될 이유는 또 뭔지 모르겠으나), 여자도 얼마든지 ‘남자 영웅처럼’ 서부의 총잡이나 마피아 보스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서툴게 만들어진 가면극 속에서 복잡다단한 여성의 현실은 자취를 감춘다.
 
 
 

<덴마>는 여자를 힘들게 하는 만화인가?

<덴마>의 젠더적 성찰은 오히려 다른 곳에, ‘이브’라고 불리는 안드로이드와 실버퀵 기사들의 관계에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대형 운송 업체인 실버퀵은 기사를 조달하기 위해 납치도 불사하는 악덕 업체이다. 노예 계약을 맺은 택배 기사들은 실버퀵의 억압과 인권유린을 감내해야 한다.

 
 
 
 엔터테이너이자 노예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브.
 
 
 


 

이브는 그런 기사들의 가사와 비서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배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브들은 주인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외모를 지니게 되며, 태양 빛을 받는 순간 불이 붙어 망가지도록, 또한 슬픔을 표현할 수 없게끔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브의 존재 의의는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의 성 역할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그녀들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영원히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운명이다.

 
 
 
 

주인의 화풀이 대상으로 사용되는 이브(위)와
자기 주인이 죽을 걸 알면서도 침묵하는 또 다른 이브(아래).
 
 

 
 


 

<덴마>는 그녀들의 현실을 간략하게, 그러나 명백하게 보여준다. 실버퀵의 억압 아래에서 살아야만 하는 기사들은 자신의 이브에게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하며, 이브는 내재된 프로그램 이상의 문제의식을 표출하지 못한다.
 
한술 더 떠 가해자인 기사들에게 섬뜩할 정도로 헌신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조차도 실버퀵이 회사 내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이분법적 젠더구조가 인간의 몸과 정신을 장악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여기서 양영순 작가가 젠더 문제를 어디까지 의식했는지 독자는 알 길이 없다. 서사에는 비극이 있을 뿐 정치적 이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젠더 문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배신해서 죄송한데, 그래선 안 된다는 법도 없다. <덴마>는 원래 순정마초들의 냉혹한 세계를 최대한 사탕발림 없이 그려내는 만화였으며, 젠더 문제에 대해 속 깊은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다. 그 안에 나타나는 여성의 역할이 굳이 능동적이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더더욱 없다.
 
<덴마>가 원래 그런 만화였다면 앞으로 그러지 말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양영순의 진짜 여성관이 어떤지, <덴마>가 페미니즘의 이념에 명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인지, 아니 애초에 서사 매체가 이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어떻게 구현해야만 진정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단일한 페미니즘 이념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지,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서사는 어떤 식으로든 이념을 반영하지만, 그렇다고 이념이 서사의 전부일 수는 없다. 이념은 행동의 원동력이며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다. 그러므로 이념은 행동하는 개인, 즉 영웅의 죽음을 위해 존재한다. 이념은 끊임없이 옳음과 그름을 분류하는 작업이다.
 
반면 서사는 존재해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재수 없는 순정마초들은 이제까지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내가 그놈들을 아니꼽게 보건 말건, 그들에게 서사로부터 자취를 감출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사람의 삶이 꼭 영웅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듯이, 그걸 재현해내는 작가 역시 유난히 훌륭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창녀와 여전사가 서사에서 어떤 훌륭한 행동을 하는가가 아니라 작가가 그들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가다.
 
이념이 민중을 계몽하고 독재자를 없애기 위해 존재한다면, 서사는 세라자드의 동생을 위해 존재한다. 세라자드의 동생은 열두 살쯤 된 여자아이로, 굳이 따지자면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지만(강간을 당하진 않았으니)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도 아니다. 그녀는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세라자드처럼 반기를 들지도 못하지만, 또 독재자처럼 횡포를 부릴 수도 없어서, 그냥 시간이나 때운다.
 
서사는 궁극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며, 그래서 더더욱 올바를 필요가 없다. 그저 보여주면 된다. 자기 식대로. 그중 무엇이 올바른가를 선택하는 것, 혹은 선택을 포기하는 것조차 세라자드의 동생이 알아서 할 일이다.
 
<덴마>가 여성인권 친화적인 만화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잔혹한 남자들의 세계’는 분명히 좀 재수 없지만 그런대로 재밌으며, 여성의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다소 불안정한 대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정치적 올바름은 모두가 바라는 옵션일 수 있지만 기본 서비스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덴마>는 페미니즘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훌륭한 만화이다. 어쨌거나 나는 <덴마>에 섹시한 언니들이 많이 나와서 좋은데, 그런 취향이 좀 게걸스럽고 유치하더라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YOUR MANAⒸ에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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