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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 엑소더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 5:3)
 

 

허이모



아멜은 무리수를 뒀다!

 
 
 
 
 

어느 납작한 해석

 
 

미려한 작화, 입체적인 캐릭터, 필요할 때 적당히 치고 빠지는 연출, 무거운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는 이야기 솜씨, 여기에 차나 커피와 같은 기호품을 활용하는 센스까지,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작가 박지은, 네이버 웹툰)는 한 마디로 굳이 흠을 잡고 싶지 않은 만화였다.

그래서 소위 ‘남덕’들이 이 작품을 소비해 온 방식을 접하고 나선 불쾌함보다도 ‘어이없음’ 혹은 ‘황당함’ 같은 감상이 앞섰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를 ‘캐릭터 쇼’ 정도로 치부하며, 최근의 전개가 진지해져서 마음에 안 든다는 의견에 ‘그럼 애초에 왜 이 작품을 보기 시작한 거지?’라는 의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작화가 미려하고, 작가가 특정 장르의 문법을 패러디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꽤 도톰한 결을 가진 이 웹툰이 ‘쓸데없이’ 진지해져서 재미없다는 식으로만 해석되는 건 씁쓸한 일이다.

이 글의 목표는 매우 소박하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가 ① 예쁜 소녀 캐릭터를 보고 싶은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마법소녀물의 문법을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② 처음부터 무척 심각한 내용을 이야기해왔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읽어내는 결이 조금이라도 더 풍부해지길 소망한다.

 


“보통” 마법소녀...언?! 패러디의 문법 

 


1화에서 주인공 아메리카노 빈즈(이하 ‘아멜’)는 평범한(?) 마법소녀로 보이고 금발로 탈색한 철수는 마법소녀물에 흔히 등장하는 (무능력하지만 어쨌든 마법소녀를 구원하게 될) 남자 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러나 1화 끝부분에서 마법소녀물에 대한 통상적인 독해는 배신당한다. 아멜은 사실 여장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보기 좋게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2화에서부터 이 ‘마법소녀...언’의 사정을 밝힌다.

마법세계에선 여성만이 마력을 다룰 수 있는데 남성인 아멜은 ‘돌연변이’다. 남성인데도 마력을 다룰 수 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여장을 선택한다.

마법세계에선 12세 시점의 마력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그 나이대로 고정시켜두고 변신한다. 아멜과 같이 지구로 파견된 다른 여섯 지방의 마법소녀들도 아멜처럼 12세 모습이다.
 
이들은 마법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황혼새벽회’를 잡아들이기 위해 지구로 향한다.

 

 
 
 

마법소녀인 줄 알았던 아멜이 사실은 남자?!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이처럼 마법소녀와 오토코노코(おとこのこ)라는 두 가지 장르의 교차점 위에 서 있다. 이는 ‘남덕’의 소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후계자들 중 가장 강한 마법소녀(소년)인 아멜은 사실 남자이므로 동일시하기 편하다.
 
또 다른 마법소녀들이 아멜과 같은 12살의 모습으로 변신하니 로리콤 · 소아성애 논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죄책감 없이 소녀들을 대상화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동일시하는 남성 캐릭터와 대상화하는 소녀들이 이성애적 관계로 맺어지지 않는 것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마법세계와 빈즈 가문의 비밀을 파헤치는 최근의 전개가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첫 화부터 기민하게 두 요소를 대립시켜왔다. 마법소녀인 줄 알았던 아멜이 소년으로 밝혀지는 1화의 말미가 모범적 사례다.
 
작가는 마법소녀들을 순진한 소녀로 대상화시키지도 않는다. 로네나 딜마 등 다른 마법소녀들을 주인공보다 더 주체적으로 그릴 뿐더러, 주인공이 모르는 진실을 밝혀내며 전개를 이끌게 한다.
 
이렇게 두 가지 장르를 간섭시킴으로써 두 장르의 문법을 뒤틀고 패러디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패러디인가?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스러운 로네.  그럼에도 아멜이 주인공인 까닭은?

 
 
 
 

금기로부터의 숨바꼭질

 
 

“사회가 정한 ‘보통’을 벗어나 이상행동을 하게 되면 다 이단이야.”
어린 아멜에게 적대 세력인 황혼새벽회를 잡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에스프레소 빈즈(이하 ‘에스프레소’)의 대사다.
 
황혼새벽회가 마법세계를 탈출한 것은 마법세계의 ‘보통’을 벗어난 이상행동이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에스프레소에게 아멜은 자신도 ‘보통’이 아니니 ‘금기’를 범한 이단이 아니냐고 묻는다.
 
아렇게 아멜과 황혼새벽회 사이에는 사회가 정한 ‘보통’을 벗어나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멜은 사회의 ‘보통’이 되길 거부한 황혼새벽회를 징벌하는 마법소녀인데, 그 자신도 ‘보통’으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에 여장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거름으로 쓰기 위해 잡아들이는 황혼새벽회처럼, 자신도 이단이 아니냐는 아멜의 질문.

 

 
 

그렇다면 아멜은 왜 자신과 똑같이 배척받고 있는 황혼새벽회를 잡아들여야만 할까?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의 첫 번째 시즌(1-102화)은 1, 2화에서부터 이미 심어 놓은 일련의 의문에 꾸준히 답해나간다.
 
다시 말해, 작가가 이 사회의 ‘보통’이 무엇이고, 아멜이 ‘보통’인지 아닌지 판단해보라며 독자들에게 아주 진중한 질문을 던진 지 2년도 더 넘었다는 말이다.
 
‘이단’과 ‘보통’에 대한 질문을 고려한다면,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를 예쁘장한 소녀들이 모에 요소를 과시하는 캐릭터 쇼로 보는 것은 실례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아멜이 처음부터 넌짓 제시한 이 질문처럼 작가는 이 웹툰의 풍부한 결을 살릴 수 있는 독해 경로 역시 슬쩍 제시한다.

 

 
 
 
 

중앙의 영지나무를 불태운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는 과연 마법세계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멜은 ‘보통’과 비정상의 경계를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는 자신을 ‘정상’으로 교정하려는 중심화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멜의 신분과 계급,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충돌 및 수렴은,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메리카노 엑소더스>가 퀴어 웹툰이라는 장르의 한 축을 세우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퀴어 정체성을 지닌 작가가 퀴어의 일상에 대해 그리는 것이 퀴어 웹툰’이라는, 매우 협소한 장르의 경계를 확장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에 숨어있는 것이다.
 
장르를 혼종적으로 패러디하는 와중에 생긴, 전형적 장르(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오토코노코, 마법소녀, 히어로, 판타지 등)라는 바위 사이에 놓인 틈 사이에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멜의 복잡한 위치가 어떤 방향으로 해소될지 추측해보기엔 재료가 부족하다. 당사자인 아멜이 어머니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친구의 안전을 보장해주고픈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아멜이 변두리에 놓인 비정상적인 삶들과 함께 하는 ‘퀴어 영웅’으로 거듭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시즌2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YOUR MANAⒸ허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