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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봄, 그 계절을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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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기 위한 몇 가지 메모

 

 

아직 결말을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 몇 개의 메모를 남기고, 몇 개의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비평문이지만 비평문이 아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결말은 중요치 않았다.

 

1.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0년대 저항 시인으로 문학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시인 이상화가 묻는다. 과연 우리에게도 봄은 올 것인가.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에게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빛을 찾는다는 것은 현재 어둠 속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봄을 기다린다는 말은 지금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를 살고 있던 이상화에게 겨울은 길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추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계절이

돌아오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2.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시인 이상화의 동명 시의 제목을 그대로 빌렸다. 변용이나 작자만의

재해석 없이 제목 그대로를 가져다 썼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 이상화의 시에서 받은 영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빼앗긴 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봄마저 빼앗긴 건 아닌지 자조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하고자 한 것일까?

 

은 돌아올 것이다. 물론 아직 연재 중인 것을 고려할 때 이런 확신에 찬 말은 위험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윤회>라는 1화의 소제목 때문이다. 작가는 삶과 죽음을 돌고 도는 운명의 쳇바퀴를

의미하는 윤회라는 말 속에서 봄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3.

하이데거는 스스로 존재하면서 그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자현존재라고 말한다. 현존재는 시간의 흐름

안에 자신을 맡기고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로 가져온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선형 위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맞물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게 존재라는 것은 시간성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미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앞지르는 현존재는 현재와 미래를 함께하는 것이다.

 

4.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꿈속에서 엄마를 찾아온

해송이는 윤회의 길에 들어선 존재이다. 엄마의 꿈대로라면 해송이는 과거의 죄를 다 치르고 현재를 살게 되었다.

과거에 저질렀던 죗값을 모두 치렀기 때문에 현생의 엄마를 만나게 된 것이다. 꿈속에서 만난 이는 앞으로 찾아올

아이의 이름을 해송이라고 지어준다. 어떤 업보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택받은 아이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꿈속에서 분명 남자아이로 보였던 해송이는 여자아이로 태어난다. 남자아이를 기다렸던

시어머니는 원래 해송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름을 빼앗는다. 부처님이 점지해 준 해송이란 이름의 아이는 남자아이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째가 태어난다. 남자아이였다. 첫째 아이에게 꼭 지어주라고 했던 해송이라는

이름은 둘째의 것이 되었다.

 

5.

이름을 빼앗겼다. 할머니는 오로지 둘째인 사내아이 해송이만을 귀하게 여겼다. ‘숙이라는 흔한 이름을 갖게 된

원래 해송이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다. 아니, 버려진 게 맞는 것일까? 그림에 소질이 있어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짝꿍 미자는 아들 형제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취직해야만 했다. 숙이가 부러워하는 지민이는 곱게

자란 아가씨인 거 같지만 실상 오빠에게 쏟아지는 사랑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시 여자아이들의 삶은 그냥 태어난

순간부터 그리 살도록 설계된 것은 아닐까? 엄마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6.

따지고 보면 이야기의 악역을 맡은 할머니의 인생도 그랬다. 남편과 아이를 위한 삶. 해송이를 유독 싫어하는 할머니는

해송이가 그렇게 살지 않게 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진행 중인

서사 속에서 어떠한 것도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해송이라는

이름은 해송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느냐고 묻는 제목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봄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해송이가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짜 해송이는 아빠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세상을 본다. 동생을 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어를 배우고 미래의 시간을 기다린다.

 

저도 주말마다 영어 알려주세요.”

 

남동생과 주말마다 공부하는 아빠에게 해송이는 말한다. 동생을 돌보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공부와 영어를 잘 해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할머니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허락한다. 이제 진짜

해송이도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해송이에게 단순히 공부하는 행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그리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할머니의 구박은 계속되고, 숙이는 아빠에게 여전히 관심 밖의 존재이다. 하지만

숙이-그러니까 원래 해송이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헤쳐 나가는 진짜 해송이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해송이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7.

사주를 보러 간 점집에서 해송이라는 이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쉬지 않고 헤엄치는 물고기”. 놀기를 더 좋아하는

남동생보다는 첫째 해송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큰 의미를 받아들일 만큼의 그릇이 되지 않는 남동생에게서

해송이는 어떻게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빼앗긴 이름조차 해송이를 해송이로 만들고자 한

부처의 생각은 아니었을까.

 

강정화 | 만화비평가. 현재 고려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근대의 문학과 미술을 연구하며, 한편으로 재야의 웹덕으로 덕력을 키워왔다.

이만하면 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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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글 그림 공명 버프툰 연재)

이름을 빼앗길 때 숙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도 빼앗겼다.

빼앗긴 것을 다시 찾게 되는 날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 걸음조차 고통스럽다.

우리가 겪어냈던 시대의 아픔,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