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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만화, 그리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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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희자 <네 자매> 1권 표지

내 인생 만화의 출발점.

 

 

인생의 만화는 지금도 많지만, 앞으로 살아가며 더 많은 만화를

내 인생의 만화 목록에 넣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다.

 

 

인생이 너무 길다. 너무 오래 살았다. ‘인생의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을 떠올릴 때면 그 오랜 세월이

실감 난다. 인천 동암 을림이 언니네 집 근처 만화방에서 보았던 엄희자의 <네 자매>가 나를 만화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그것을 인생의 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어느 날 밤 가지고 온 <요괴인간> 속의 벰,

베라, 베로를 내 인생의 캐릭터로 꼽아야 할까? “만화란 이런 것이다!”라며 보란 듯 나를 강타했던 <캔디 캔디>

영향력을 그에 뒤처진다고 할 수 있나? 유년기가 아니었어도 내게 영향을 준 만화는 많았다. 수많은 제목이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가 다시 끌어내려진다. 어쩌랴. 너무 오래 산 탓이다.

 

그 목록에서 영 끌어내릴 수 없는 이름 중 하나가 <안젤리크>. 온갖 미남미녀들의 연애사에 정신 못

차리던 어린 시절, 어쩌다 동전이라도 몇 개 생기면 쪼르르 만화방으로 달려가던 시절에 <안젤리크>

만났다. 종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던 천사 같은 미녀 안젤리크 드 상세.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형형한 검은 미남 조프리 드 페이락 후작. 그리고 묘한 아름다움으로 말 그대로 치명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안젤리크의 첫사랑 필립. 어린 시절의 소꿉동무이자 따뜻함 그 자체인 니콜라.

나는 그들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래 머물렀다. 내가 연애를 못 하는 이유는 그 초 꽃미남들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하라 토시에라는 작가 이름은 기억 못 해도, <안젤리크>는 내 인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꽤 만화 덕후였다는 이들을 만나도 <안젤리크>를 아는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설마 내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책이란 말인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유리가면>에도, <베르사유의 장미>에도 <올훼스의

>에도 한 시절을 바치며 열광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안젤리크>를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한두 명

아는 이들을 만나면 비밀결사의 암호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모를 리가 없지. 지금도 눈에 선한

그 깎은 듯한 미남미녀들을 내가 만들어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이후 알아낸 것이지만 <안젤리크>는 프랑스의 부부 소설가인 세르잔느 골롱이 1956년에 출간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어두운 내용이다. 만화 버전은 훨씬

낭만적이고 간결하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 사랑이 무엇인지 뒤늦게야 알게 되는 필립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하고 올라오는 슬픔의 덩어리가 있다. 오래되었지만 생생한 감각이다. 주인공인 안젤리크는 됐고.

마음껏 사랑을 주고받고 세 번이나 결혼했잖아.

 

이후 만화동호회에서 만난 지인이 <내 사랑 라벨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만화 전편을 보내주었다. 마치 전설

속의 존재라도 재회한 것처럼 기뻤지만, 잘 보관해두었을 뿐 다시 들춰보게 되지는 않더라. 인생의 만화라기보다는

그 시절의 만화인 셈이다. 그 시절의 경험이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좌우하기는 했지만.

 

몽키 펀치의 <루팡3><안젤리크>와는 장르가 무척 다르지만, 내게 미친 영향력의 크기는 비슷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숨어들곤 했던 지하 만화방에서 이 책을 만났다. 어느 등장인물도 안젤리크의 꽃미남에 비교할 만한

외모를 갖지 못했지만, 반전과 유머는 충분히 홀릴만 했다. 그러다 보니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도 잘생겨

보이더라. <루팡3>는 내가 처음으로 사서 소장한 만화이기도 하다. 그때의 빈약한 내 책장에서

<루팡3>는 발군의 존재감을 자랑했다.

 

그 후로도 나는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어도 결정적 균열을 주는 작품들을 만났다. 제이슨의 <헤이,

웨잇>이 그랬고, 후루야 우사마루의 <파레포리>가 그랬고, 크레이그 톰슨의 <하비비>가 그랬다. 각각의 작품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를 후벼파냈다. 그 과정을 거쳤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었던 작품이 무엇이건 그것 또한 내 인생의 만화다. 박수동의 <고인돌>? 그 작품의 충격을 잊지 않았다.

고우영의 <삼국지>? 그럼그럼. 빼놓을 수 없지. 황미나의 <아뉴스데이>? 목이 멘다. 마쓰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999>? 그걸로 책까지 썼잖아.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산다는 건

인생의 만화목록을 늘리는 일일 것이다. 차근차근, 기쁘게.

 

박사 | 매번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행운을 누려왔다.

읽는 것, 읽어주는 것, 읽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을 실감한다.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은하철도 999 너의 별에 데려다줄게> 등의 책을 쓰고

신문연재와 방송 출연으로 사람들과 접점을 넓혀왔다.

2013년부터는 매달 박사의 책 듣는 밤을 열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