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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누구의, 무엇을 위한, 어떤 전복인가?_BL의 가능성에 대한 소고

우려하는 것은 BL이라는 대중 장르가 전복이나

특정한 질서에 대한 저항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이는 한계점이다.


질문은 무의식중에 어떤 프레임이나 전제를 드러내곤 한다. 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

든 답을 하는 순간, 우리는 정작 질문의 대상에 대한 어떤 프레임이나 전제, 시점을 공유하게 된다

는 것이다. <BL은 아직도 전복의 전망을 남겨놓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이

질문 자체가 이미 특정한 맥락을 전제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풀어 써보도록 하자. BL이 ‘아직도’ 전복(subversion)의 전망을 남겨놓았느냐는 말은 현재는

어떻든 간에 적어도 과거, BL은 ‘전복적’이었다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다. 동시에 이 질문은 ‘아직

도’라는 부사를 통해 이 전제-BL이 전복적이었다는-에 대해 현재도 과연 그러하냐는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나아가 ‘전망을 남겨놓는다’라는 것은 이와 연결되어 사실은 그런 전망이 이미 불투명

하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이유로 우리는 역시 2015년 이후 한국의 전 사회문화적 영역

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2015)>, 그리고 페미니즘적 각성에 기반을 둔 기존

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판을 떠올릴 수 있다. BL 또한 이런 흐름에서 예외일 순 없는

데, 최근 인터넷과 SNS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BL(탈비엘)’이 바로 그것이다.


탈BL의 논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게이와 게이 섹스를 혐오하는 견해다. BL은 게이

를 신비화함으로써 여성들이 게이에 환상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둘째, BL의 공

수관계(오메가 버스 등을 포함)는 기본적으로 이성애적 삽입 섹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현

실의 남녀 권력 관계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셋째, BL은 남성 캐릭터만 등장하거나 여성 캐릭

터를 악마화함으로써 남성숭배를 강화하고 진정한 ‘여성 서사’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이 세 논

리가 현재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탈BL의 주된 논리로서, 셋째 논리는 최근 전 세계 문화산업

에서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적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 나아가 한국의 문화콘텐츠

에서 남성 간의 브로맨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한 작품이 제작되고 흥행했다는 점과 연결되어 BL

이 이런 흐름을 강화하는 문제적인 장르라는 점을 탈BL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판하고 있다.

이 각각의 논리에 대해서 필자는 별도의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

내용은 생략한다. (<페미니즘의 시대, BL의 의미를 다시 묻다 - 탈BL 담론의 분석> 2019, <여성문

학연구> 47호를 참조) 각각의 논리 자체는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전부터 BL에 대한

비판으로서 회자하여 오던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2020년을 앞둔 지금 이 시점, 왜 이 비

판들이 주목받고 BL의 전복적인 성격이 다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가 개인적으로는 더 흥

미로운 지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BL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비판- 2010년대의 다양한 독립출판물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듯이-은 비당사자로서 성소수자인 게이의 표상을 이용하고 이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는 것이다. 구조적인 차별과 정상성에 대한 집착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게이들의 현

실을 무시하고 당사자가 아닌 여성들이 이를 향유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 제기가 바로 그것이

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최근 김경태 등 게이 정체성을 지닌 관련 연구자들이 야오이를

통한 영화비평을 시도하는 등, 당사자성을 넘어서 더욱 다양한 퀴어의 표상을 생산하는 장르로서

BL의 의미를 평가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앞의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바, BL이 지닌 전복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

이 상당히 널리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BL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

이든 ‘남성 동성애’를 다룬다는 소재적인 면과 함께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한다는 내용적인 면

에서 BL이 보수적인 사회질서에 대해 전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그 의의를 인

정하고 있었다. 탈BL이 놀라웠던 이유는 그런 BL이 이제는 전복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고 정면으

로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탈BL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BL이 어느새 여

성들에게는 이미 당연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장의 주요한 콘텐츠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처음의 문제로 되돌아 가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BL은 전복적일 수도 있

고, 전복적이지 않을 수 있다. 한국 동인 문화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BL은 분명히 전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BL은 분명히 현시대와 사회의 산물로서 다른 콘텐츠들과 동일하게 그

내부에 다양한 ‘빻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BL이 전복적인가 아니냐는 논의는 그 외부

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BL에서 전복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고 이

의미가 높게 평가됐다는 말은 BL이 전복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동일한 명제가 아니다. 그러나

2019년의 한국사회에서 이 말은 마치 동일한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정리하자면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BL이라는 대중 장르가 전복이나 특정한 질서에 대한 저항에

서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이는 한계점이다. 분명히 BL이 전후 일본 사회, 그리

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퍼져 나가면서 그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이렇게 사회문화적 기능과 의미를 강조하는 논의에서는 정작 BL을 창작하고 소비하는 사람들

이 추구하는,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를 통해 얻는 쾌락과 BL이라는 상업주의 또는 동인

장르를 지탱하는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BL이라는 장르를 근원에서 만들어낸- 과연 어

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삭제되거나 결여됐다. 그래서 평면적으로만 다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아

이러니하게도 이런 욕망과 쾌락이 사라지는 순간 BL은 그 소구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무엇보

다 BL은 그를 창작하는 작가, 나아가 그를 소비하는 대중의 욕망과 쾌락을 반영하는 대중 장르이

기 때문이다.


요시나가 후미는 대담집 <그 사람과 여기서만의 수다>에서 BL과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으로서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82쪽) BL은 “현재 남녀의 존재 방

식에 무의식적으로라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읽는 것”이지만 BL 독자들 중 순수하게 BL을 좋

아하는 사람들은 BL과 페미니즘을 바로 연결짓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독자들이

과연 페미니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나아가 요시나가 후미는 이렇게 말한다.


“저 페미니스트는 아닌데요,라고 하면서 회사의 불만을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페미니즘이잖아.”


이것이야말로 “BL에 전복의 가능성이 남아있는가”라는 질문에 앞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지점이

다. BL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즉 문법이나 표현, 주제, 표상하는 집단과의 관계 등은 각각 변화

하는 사회와 시대상과 필연적으로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BL은 그 요소들의 단순한

조합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성을 차별 하는] 회사에 불만을 말하는 것’

이 페미니즘이라면 BL 또한 그 내부의 다양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이성애 규범 사회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많은 여성 대중

이 여전히 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명확한 사회문화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BL이 때때로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체제 유지적인 욕망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소수자(약

자)인 여성이 주류인 창작자와 독자가 이를 통해 표현하고 충족할 수 있는 욕망과 쾌락을 소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문화콘텐츠의 창작과 소비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지닌 집단으로서 동인녀와

후조시에게 BL은 다양한 남성 중심적 서사를 자신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재전유한다. 뿐만 아

니라 비당사자성과 당사자성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타자에 대한 폭넓은 상상력과 성실한 이해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로로서 기능한다. BL 작가인 요시나가 후미가 소녀만화 작품 <오오쿠>와 청년

만화 작품 <어제 뭐 먹었어?>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장르로서의 BL을 넘어 현재 진행 중인 표현 양

식으로서 BL이 지닌 가능성이자 정치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로 작품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작품이 그 단어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참조: <야오이의 주인공은 게이일까요> 퀴어영화 연구자 인터뷰

http://www.ildaro.com/ 검색어 ‘야오이’


김효진 | 서울대 일본연구소 조교수. 한일 양국의 여성만화를 중심으로

오타쿠, 후조시, 동인지문화와 한일문화교류 연구를 하고 있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