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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경>, 시러 니나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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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경> (글 그림 정재윤, 독립출판 후 절판. 헤엄출판사 재출간 예정)

   

 

내가 외국 생활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외국 생활은

마찬가지로 여유가 없다.

 

 

키가 어른의 정강이만큼 자랐을 때부터 나 자신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며 살았다. 그런 내가

가장 치욕스럽다고 느끼던 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이 내 겨드랑이에 두 손을 집어넣고 키보다

높이 번쩍 들어올릴 때였다. 저들끼리는 하지 않는 행동을 왜 내게만 무례하게 하는지 궁금했지만, 얼굴만

붉힌 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었다. 정재윤 작가의 만화 <서울구경>의 표지는 서울구경 한번 시켜줄까~”

하면서 아이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높이 들어올리는, 왜 하는지 모를 어른들의 장난 짓거리에

잔뜩 구겨진 아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대체 왜 그렇게 괴롭게 서울을 구경해야 하는 걸까?

 

나는 서울구경 하고 싶지 않았어.’

표지에서 커다란 손에 짓눌려 자 눈썹이 된 아이는 <서울구경>에 등장하는 3명의 주인공 중 가장 나이가

어린 XX. 만화 초반에 알 수 있는 정보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XX와 형 W, 두 형제의 부모님이

우째 저래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형제의 말투를 보아 그들 생활 반경이 경상도

어디쯤이라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W는 초등학생인 XX를 돌보기 위해 핵교친구들이랑 놀고 싶은 마음도

접어두고 일찍 귀가한다. XX는 설거지도, 세탁기 돌리는 것도, 준비물 준비도 다 해놓고 테레비를 보고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테레비만 보고 있었더라면 뭐라 한 소리하면서 유일한 보호자 티를 낼

생각이었던 W는 그런 XX에게 엄청나게 사랑하는 마음과, 엄청나게 거치적거려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XX핫도그 먹고 공부방 가자3학년 형아를 따라서 간 공부방에 재미를 붙여 매일 재미있게 공부하고,

종종 공부방 과 쌤의 딸 M과 저녁밥까지 먹고 돌아온다. 그렇게 쭉 재미있게 공부한 결과, 3이 된

XX는 방에 펼쳐놓으면 장판이 안 보이게 뒤덮을 만큼의 상장과, ‘00가족대상으로 한 장학제도로

서울에 있는 대단한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학교장 추천을 받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W는 공부방 (a.k.a. 동네 최고 가십걸) M과 연애를 하며, 택배 일을 시작으로

체력을 많이 쓰는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나간다. WM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에 갈 생각이 없다는

XX를 은근히 설득하지만, XX는 영 뜻이 서지 않는다.

 

XX가 상상하는 서울 생활은 매우 현실적이다. W멋지다 카드라는 서울 야경은 만날 밤늦게까지 일하는

서울 사람들이 있어서존재하며, M이쁜 아-들도 많다 카더라는 꼬드김엔 서울엔 그만큼 잘생긴

-들도 많을거라는 게 XX의 대답이다.

 

서울 출생 및 서울 생활 당사자인 나는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을 어째서 XX가 이토록 자세하게 상상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쉼 없이 오르는 월세 덕에 1, 2년마다 예정된 이사. 집주인들과의 눈치 싸움. 결합 상품과

렌털 상품에 둘러싸인 생활.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도 내 것이 없어빌려 쓰는 생활을 전전하는데 지금부터

외국에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XX가 상상하는 서울 생활은 내가 외국 생활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외국 생활은 마찬가지로 여유가 없다. 와이파이가 갑자기 먹통이 되거나, 변기 물이 내려가지 않고

차오르는 장면. 자정이 넘어 도착한 집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 장면을 자꾸만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책 후반부에 나오는 김철수 빵집 김철수 아저씨의 모습은 무척 위안이 되고 그런

장래를 꿈꾸는 XX에게 공감이 된다. 서울에 있는 대단한 고등학교를 꿈꾸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래야

그나마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주변의 설득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저 멋진 야경과 이쁘고 잘생긴

-이 걸어 다니는 서울을 잠깐 구경해봤을 뿐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준

XX가 참 고마웠다. <서울구경> 표지 뒷면에 그려진 XX의 뒤통수를 보며 인기 크리에이터 승헌쓰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불러주던 예민한 고양이송을 떠올렸다.

 

고양이 소리내 봐 시러 니나 내세요~

고양이 노래해 봐 시러 니나 하세요~

싹바가지 나는 싹바가지 그니까 니 갈 길이나 가세요~

 

이랑 | 영화와 음악, 그림 그리는 일을 전부 직업으로 삼고 있다. 정규 앨범

<욘욘슨>, <신의 놀이>와 단편영화 <변해야 한다>, <유도리> 등을 발표했고,

<이랑 네컷 만화>,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를 썼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