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구경> (글 그림 정재윤, 독립출판 후 절판. 헤엄출판사 재출간 예정)
내가 외국 생활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외국 생활은
마찬가지로 여유가 없다.
키가 어른의 정강이만큼 자랐을 때부터 나 자신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며 살았다. 그런 내가
가장 치욕스럽다고 느끼던 순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들이 내 겨드랑이에 두 손을 집어넣고 키보다
높이 번쩍 들어올릴 때였다. 저들끼리는 하지 않는 행동을 왜 내게만 무례하게 하는지 궁금했지만, 얼굴만
붉힌 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었다. 정재윤 작가의 만화 <서울구경>의 표지는 “서울구경 한번 시켜줄까~”
하면서 아이의 머리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높이 들어올리는, 왜 하는지 모를 어른들의 장난 짓거리에
잔뜩 구겨진 아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대체 왜 그렇게 괴롭게 서울을 구경해야 하는 걸까?
‘나는 서울구경 하고 싶지 않았어.’
표지에서 커다란 손에 짓눌려 八자 눈썹이 된 아이는 <서울구경>에 등장하는 3명의 주인공 중 가장 나이가
어린 XX다. 만화 초반에 알 수 있는 정보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XX와 형 W, 두 형제의 부모님이
‘우째 저래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형제의 말투를 보아 그들 생활 반경이 경상도
어디쯤이라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W는 초등학생인 XX를 돌보기 위해 ‘핵교’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 마음도
접어두고 일찍 귀가한다. XX는 설거지도, 세탁기 돌리는 것도, 준비물 준비도 다 해놓고 ‘테레비’를 보고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테레비’만 보고 있었더라면 뭐라 한 소리하면서 유일한 보호자 티를 낼
생각이었던 W는 그런 XX에게 ‘엄청나게 사랑하는 마음과, 엄청나게 거치적거려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낀다.
XX는 “핫도그 먹고 공부방 가자”는 3학년 ‘형아’를 따라서 간 공부방에 재미를 붙여 매일 재미있게 공부하고,
종종 공부방 ‘쌤’과 쌤의 딸 M과 저녁밥까지 먹고 돌아온다. 그렇게 쭉 재미있게 공부한 결과, 중3이 된
XX는 방에 펼쳐놓으면 장판이 안 보이게 뒤덮을 만큼의 상장과, ‘00가족’ 대상으로 한 장학제도로
‘서울에 있는 대단한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학교장 추천을 받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W는 공부방 ‘쌤’ 딸(a.k.a. 동네 최고 가십걸) M과 연애를 하며, 택배 일을 시작으로
체력을 많이 쓰는 일을 하며 생활을 꾸려나간다. W와 M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에 갈 생각이 없다는
XX를 은근히 설득하지만, XX는 영 뜻이 서지 않는다.
XX가 상상하는 서울 생활은 매우 현실적이다. W가 “멋지다 카드라”는 서울 야경은 “만날 밤늦게까지 일하는
서울 사람들이 있어서” 존재하며, M의 “이쁜 아-들도 많다 카더라”는 꼬드김엔 서울엔 ‘그만큼 잘생긴
아-들도 많을’ 거라는 게 XX의 대답이다.
서울 출생 및 서울 생활 당사자인 나는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을 어째서 XX가 이토록 자세하게 상상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쉼 없이 오르는 월세 덕에 1, 2년마다 예정된 이사. 집주인들과의 눈치 싸움. 결합 상품과
렌털 상품에 둘러싸인 생활.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도 ‘내 것이 없어’ 빌려 쓰는 생활을 전전하는데 지금부터
외국에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XX가 상상하는 서울 생활은 내가 외국 생활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여유 없는 서울 생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외국 생활은 마찬가지로 여유가 없다. 와이파이가 갑자기 먹통이 되거나, 변기 물이 내려가지 않고
차오르는 장면. 자정이 넘어 도착한 집 앞에서 열쇠를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 장면을 자꾸만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책 후반부에 나오는 김철수 빵집 김철수 아저씨의 모습은 무척 위안이 되고 그런
장래를 꿈꾸는 XX에게 공감이 된다. 서울에 있는 대단한 고등학교를 꿈꾸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래야
그나마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주변의 설득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저 멋진 야경과 ‘이쁘고 잘생긴
아-들’이 걸어 다니는 서울을 잠깐 구경해봤을 뿐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준
XX가 참 고마웠다. <서울구경> 표지 뒷면에 그려진 XX의 뒤통수를 보며 인기 크리에이터 승헌쓰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불러주던 ‘예민한 고양이송’을 떠올렸다.
고양이 소리내 봐 시러 니나 내세요~
고양이 노래해 봐 시러 니나 하세요~
싹바가지 나는 싹바가지 그니까 니 갈 길이나 가세요~ ◆
이랑 | 영화와 음악, 그림 그리는 일을 전부 직업으로 삼고 있다. 정규 앨범
<욘욘슨>, <신의 놀이>와 단편영화 <변해야 한다>, <유도리> 등을 발표했고,
<이랑 네컷 만화>,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