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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만화를 그린다는 것, 다수에게 만화를 가르친다는 것

나의 아마추어 작가 생활, 많은 독자와 소통할 수 있었던 나의 세 작품,

그 경험들의 아주 조그만 파편이라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만화가다. 약 20년 동안은 아마추어 만화가였다가 5년 전에 전업 만화가로 데뷔했다. 학창

생활 대부분은 그림만 그리며 지냈다. 국어 시간에도 수학 시간에도 자율학습 시간에도 몰래몰

래 만화만 그렸고 어머니가 보내준 독서실에서도 자정까지 만화를 그렸다. 그러라고 보내준 독

서실이 아니었을 텐데. 결국은 만화로 먹고사니까 독서실 값은 쾌적한 만화 제작의 투자 비용으

로 잘 쓰였다고 볼 수 있다.


만화 그리기, 현실을 벗어나는 즐거움

만화를 그리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좋았다. 현실에선 아무것도 못 하는 꼬맹이였지만 만

화에서는 멋진 직업인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나라에도 갈 수 있고, 시대를 거슬러 어떤 세계에 갈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린 견고한 만화 속의 세상에서 내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등장인물들만 초

대하여 그 속에서 왕처럼 살았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가족들, 친구들에게 마음

을 온전히 열지 않았다. 만화가 혼자 그리는 작업이다 보니 만화 세상에서 잠시 떠나 현실에 돌

아오면, 항상 나는 조금 외로웠다. 그래서 현실의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오

랫동안 마법이나 시간여행을 믿고, 항상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둥둥 떠다니면서 살

았던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의 애니메이션 영화사 인턴으로 3개월, 직원으로 1년, 프리랜서로 찔끔찔끔 몇 년,

게임 회사 직원으로 6년, 웹툰 작가로 5년. 성인이 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사회생활을 했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을 하기도 하고 일이 몰릴 때는 서너 개씩 동시에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커

다란 현실의 파도에 휩쓸려서 내가 쌓아놓은 다채로운 만화와 상상의 세계에서는 점점 멀어졌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인이 되고 말았다. 코흘리개 만화 덕후가 갑자기 성인이 되어 세금을 신경

쓰고, 매달 집세와 카드값을 내고, 연금 보험을 알아보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10년 동안은 정말 개미처럼 일만 했다. 이렇게 일만 하다가 죽겠구나, 라고 생각하던 시점에 회사

에서 마침 팀을 해산하면서 퇴직금을 챙겨주며 나를 내쫓아주었다. 그때 나는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작업한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라는 작품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마침 회사를 떠나게 되

어서 전업 작가로 전환하게 될 기막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업무에 지친 사회인이었던 나는 이렇

게 생각했다. 어쩌면 학창시절처럼 만화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미국

생활을 잠시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막상 전업 작가로 일하다 보니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기 싫을 때도 해야 하고, 연출이

막힐 때도 억지로 쥐어짜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다시 만화를 그리는 일은 정말이지 즐거

웠다. 이번엔 혼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색칠을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좋은 조력자, 동료 작가님들

과 담당자님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내 만화를 봐주는 독자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첫

작품인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완결 뒤에 <계룡선녀전>을 완결 짓고, 곧 <헤어진 다음날, 달

리기>도 세상에 내보냈다. 3편의 작품을 완결하고 나니 다 큰 자식 3명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쓸

쓸함을 느꼈다(다 키워봤자 소용없어). 그리고 어떻게 인연이 기가 막히게 닿았는지, 2019년 3월

부터 나는 청강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에서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만화를 가르치기 전, 섣불리 뿌듯해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늘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내가 혼자서 만화를 독학하던 시절, 옆에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늘 만화가 외로운 작업

이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아마추어 만화가에게 한 사람이라도 조언자가 있었더라면…! 누군가

내 작품을 봐주고 공감해주고 부족한 점을 지적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세상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조언자나 동반자가 필요하다면 그 조언가가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아마추어 만화가에게 얼마나 힘이 될까, 라며 시작하기도 전에 섣불리 뿌듯해했다.

하지만 청강대학교 초빙 교수로서의 첫 강의가 시작되고 나는 세상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가르

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막상 시작하니 뭘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했던

것처럼 ‘여러분, 하찮은 이 현실로부터 도피해서 자신의 욕망이 가득 담긴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으로 풍덩 빠지세요’라고 가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뭐라도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

적인 팁을 가르쳐줘야 할 텐데 이것 참… 어렵다 어려워. 밖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나

는 3월 한 달 내내 ‘나 같은 바보가 교수가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다녔다.


학교에서 쓰는 용어도 새로웠다. 입시 충원, 업적 평가, 졸준위, 졸업 사정, 각종 특강, 임용, 전임,

초빙교수 등등. 나는 하나하나 다른 교수님들께 물어봐야 했고 메모하지 않으면 늘 잊어버렸다.

그래서 교수 회의에서도 회의 내용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미국 회사에 입사해서 첫 팀 회의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교수님들은 다들 노련하고, 맡은 일도 많고, 전문가처럼 척척 해내는

데 그에 비해 나는 내가 봐도 한심하고 무능해 보였다.


첫 수업 시간에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을 보자니, 갑자기 내가 이 학생들에 대

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 학생들이 뭘 모르고, 뭘 알고, 뭘

배우고 싶고, 뭘 알고 싶은지 개개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 채 일단 교단에 올랐다. 이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일 텐데, 나는 그들을 집단으로 생각하고 ‘막연히 이렇게 하면 되겠지’ 지

레짐작하고 있었다. 개개인 작가들의 집단을 막연히 ‘아마추어 시절의 나’처럼 하나로 뭉뚱그려

생각했다. 내가 예전의 나에게 이야기하듯 가르치려 했었는데, 그들은 내가 아니기에 내가 겪은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할 터였다. 나와는 다른 고민과 다른 스타일을 가진 작가 지망생들인 것이

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이 생소하고 어색하게 다가왔다. 이런 나를 보고 따라올 준비를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학기 초반밖에 안 됐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수업 초반에는 내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학생들 개개인을 알아 가려고 일대일 상담을 진행했

다. 상담하니까 개개인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으나, 학생 수가 너무 많다 보니 몇 명하

고 나면 아주 벅찼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배에선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나고 머

리에 쥐도 나고 힘들었다. 그렇게 첫 한 달 동안 한껏 힘쓰며 노력했더니 4월이 되자 기진맥진해

졌다. 그때 나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내가 뭘 믿고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까?


“돌배 작가님, 그렇게 하면 지쳐요.” 어느 날 한 선배 교수님이 나한테 말해주셨다. 난 몇몇 선배

교수님들께 조언을 구했고 고맙게도 많은 교수님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과제를 제출받는

효율적인 방법, 예측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난감한 요청에 대응하는 방법, 학생들에게 동기

부여 하는 법, 수업 시간에 상담은 15명 이하로 할 것, 나에게도 쉬는 시간을 주고 너무 욕심부리

지 말 것 등. 그리고 모든 학생을 만족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조

언을 얻었다. 좋은 선배 교수님들의 도움 덕분에 그럭저럭 한 학기를 해나가는 중이지만, 이번 기

회를 빌려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한참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수업 시간에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학생들, 그리고 질문에 크게 대답해주고 상담

에 성실히 임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내가 학생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기분이 들어 즐겁다. 하지

만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하거나, 결석자가 많거나, 자고 있거나, 아무 말 없이 교실을 떠나는 학

생이 있으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불안하다. 그래도 어린 시절, 만화를 그리면서 현실에서 도피

하면서 행복한 나라로 여행했던 나의 경험,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었고 어떤 경험이든 할 수 있

었던 나의 아마추어 작가 생활, 많은 독자와 소통할 수 있었던 나의 세 작품, 그 경험들의 아주 조

그만 파편이라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만화를 그리는 것은 어떨 때는 아주 즐겁고 어떨 때는 아주 고통스럽다. 만화를 가르치는 것 역시

학생들이 반응해주고 나에게서 뭔가를 배워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행복하지만, 어떨 때는 아

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는 생각에 낙담한다.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가슴 두

근거리는 경험이지만 그 세계에서 나는 혹독하게 다듬어지고 수많은 부침을 겪으며 완결까지 절

뚝거리면서 걸어간다. 마침내 완결되어 세상에 내놓았을 때는 보람차고 아쉽고 쓸쓸하고 뿌듯하

다. 가르치는 것도 어쩌면 이리 똑같을까. 아직 한 한기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만화가로서의 나는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미래의 나는 어떤

교육자가 되어있을까? 그리고 나는 새벽에 쓴 이 에세이를 <지금, 만화>에 투고하고 밤마다

‘이불킥’을 하지는 않을까? ◆


돌배 | 만화가.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으로 데뷔해 <계룡선녀전><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를 그렸다.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