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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마감해! 밤에는 마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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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의 힘을 믿는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벌어지는 그 힘을. 


삐걱삐걱.

좁은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비로소 화실이다.

그곳은 초라한 다락방. 하지만 데생과 유화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는 작은 미술관이자 작업

실이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하얀 석고상. 거친 붓들과 지저분한 팔레트. 낡은 이젤 위에서 조금

씩 완성되어가던 그림. 낮게 흐르는 음악. 선생님이 늘 드시던 시큼한 술 냄새까지 오감을 자극

하던 그곳. 이름조차 하필이면 ‘겨울 화실’이었을까? 화실도, 선생님도, 학생도 겨울처럼 곤궁했

다. 걸려 있는 그림도 후미진 골목길이나 낮은 지붕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산동네처럼 신산한 풍

경이 많았다. 정말 그림까지 가난했다. 화실 미대 입시생은 딸랑 3명. 생라면은 일용할 양식, 수

채화 정물이던 명태나 과일은 비상 간식이다. 정물들은 늘 뒷부분이 휑했다. 야심한 밤에 조금

씩 파먹다보니 그만.


“선생님, 도예과 나오면 뭐 해요?”

“뭐 하긴? 길가에 도자기 쌓아놓고 파는 거 본 적 있지? 그런 거 하는 거야.”

“네? 그 사람들, 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에요?”

“크하하하하.”

유쾌한 웃음이 빵빵 터졌다. 선생님의 위트 덕분에 화실은 항상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입시에 대

한 불안감도 크게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세 친구는 웃고 즐기다 모두 소망하던 미대에 갔

다. 늘 엉뚱한 질문을 하던 친구는 지금 도예과 교수고, 또 한 친구는 어린이 미술원장이다. 그리

고 나? 나는 만화잡지 편집장을 하다 출판사 사장이 되어 책을 만든다. 지금도 문득 그 다락방 공

간을 떠올리면, 수십 년이 지났어도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그립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우리

만의 아지트에서 느낀 행복한 기억은 이렇게 평생을 간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수십 년 만에 그런 아지트를 만들 기회가 생겼다. 우리 거북이북스에서 제안

한 만화비평 웹진 <유어마나>가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원사업에 덜컥 선정된 것. 좀 ‘있어 보이려

고’ 온라인 만화 웹진과 오프라인 만화 공간을 연계하는 사업 기획을 마지막에 추가했는데, 꼼짝

없이 국가 기관과의 약속을 이행해야 했다.


맞아. 꿈만 꾸면 무엇하리. 기회가 왔을 때 작게라도 시작해보자. 그래야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를

낼 수 있으니. 오프라인 공간의 콘셉트를 ‘독립만화’로 잡는 데는 웹진 편집장 선우훈 씨의 도움

이 컸다. 그런데 둥지를 어디에? 선우훈 씨가 홍대를 추천했다. 힙스터들이 모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면서. 홍대에 가면 가슴이 뛴다. 학창 시절의 땀과 눈물, 고뇌와 웃음의 추억이 오버랩되는

그곳. 홍대는 그저 골목을 헤매기만 해도 즐겁다. 버스킹을 하며 꿈꾸는 젊음이 있고, 인디 밴드

들을 만나는 뜨거운 공간이 있고, 독특한 창작 가게에서 몰랐던 예술가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선우훈 씨 덕분에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본 독립만화 시장은 신세계였다. 엄청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오~ 놀라워라. 한 사람을 새롭게 만나니 그와 연관된 젊은 창작자들과의 인연은 저절로 이

어졌다. 개성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작가들을 만나고, 젊은 만화 비평그룹을

만났다. 과자전 팀의 박지성 디자이너한테는 브랜드 디자인을, 소목장 세미 씨한테는 가구 제작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젊은 친구들과 얼떨결에 시작한 ‘유어마나 가게’.


다양한 창작 에너지가 뿜어나오는 젊은 독립 만화가의 작품 전시를 열한 차례 열었다. 함께 임대

한 옥탑방은 대학생들의 문화 팟캐스트 녹음실로도 제공했다. 수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가진

SNS 스타 만화가들은 현실 공간에서 독자들을 만났다. 이렇게 유어마나 가게는 독특한 책과 굿

즈를 파는 편집숍으로, 또 해외 독립만화가들도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작은 공간은 곧 한계에 부

딪혔다. 진열하는 책이나 굿즈의 수량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찾아온 독자들이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너무 짧았다. 소소한 행복을 주던 공간은 적자라는 부담도 함께 주었다. 어쩌지? 임대차

계약 2년을 종료하면서 나는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낮에는 마감해! 밤에는 마담해!”

이거 라임이 척척 맞는구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유어마나 가게’를 ‘만화살롱 유어마

나’로 간판을 바꿔 이전하여, 새롭게 오픈하는 선택을 했다. 낮에는 출판사에서 치열하게 마감하

고, 밤에는 살롱에서 훈훈하게 마담을 해보자고. 취향이 맞는 이들끼리 오프라인 문화 공간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펼치는 꿈은 ‘유어마나 가게’를 하면서 더 짙어졌다. 세상이 온라인, 디지털로

치달을수록 오프라인, 아날로그에 대한 감성 욕구도 커진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요즘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살롱 문화가 다시 떠오른다. 취향이 비슷한 이들이 모여 차를 마시

며,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며 교류하는 공간. 살롱에서 여러 모임을 기획하고, 살롱을 집단 지

성의 장으로 이끄는 전문가가 바로 마담 아닌가? 현대에 와서 마담의 이미지가 완전히 변색되

었지만, 난 기꺼이 만화살롱의 마담이 되기로 했다. 우리 만화인들에게 창작 에너지가 넘치는 공

간의 경험을 선사하자. 맛있는 커피와 향긋한 티, 시원한 수제 맥주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공간

의 추억을 선사하자.


이번 프로젝트에는 나와 오랜 인연으로 얽혀온 김현국 씨가 합류했다. 만화 편집자 출신이지만

크래프트 맥줏집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 공간을 보는 관점이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간 선택

시 지리적 접근성, 공간의 트임과 높이를 우선했다. 덕분에 홍대와 당인리 발전소 사이, 상수역

3분 거리에 있는 아늑한 반지하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자영업 실전 경험은 여러모로 큰 도

움이 됐다. 역시 경험은 소중한 거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오랜만에 겨울화실 선생님께 다짜고짜 연락을 드린 건, 그 공간을 얻은 직후다. 우리 선생님은 자

신의 이름을 딴, ‘갈청로 디자인 인테리어’ 회사 대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창의적인 사람은 뭘 해

도 창의적이라 이 분야에서도 예술가의 면모를 발휘 중이시다.

“그래. 오랜만이다. 무슨 일 있니?”

“선생님이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만화 아지트를 만드는데, 콘셉트가 빈티지에요. 다 털어낸 다

음, 낡은 가구만 들여놓으면 되겠죠?”

“흐흐. 그건 ‘빈티지’가 아냐. 그냥 ‘빈티’야.”

“네?”

내가 추구하는 게 그냥 ‘빈티’라고? 선생님의 한마디에 바로 깨달음이 왔다. 그래. 맞다! 우리끼리

쓰는 작업실이 아니잖아. 정교한 공간 계획이 필요해! 선생님이 거의 무상으로 도와주셨다. 핸드

메이드 느낌이 듬뿍 나는 분위기 있는 공간으로. 만화살롱 유어마나 영문 로고타입은 지금 읽고

있는 <지금, 만화> 편집 디자이너 윤효정 씨의 솜씨다. 프리 드로잉으로 살롱의 느낌을 유니크하

게 살렸는데, 정말 맘에 들었다. 유머마나 가게 때부터 이어온 스태프들의 도움, 우리 거북이북스

식구들의 수고로움까지 모든 인연은 살롱 오픈에 큰 힘이 됐다.


만화살롱 유어마나는 지난 3월에 시작했는데, 독립 만화가들을 위한 갤러리와 굿즈샵 코너를 좀

더 확장한 게 제일 큰 변화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으니 고객 만족도도 높다. 만화살롱 유어마나

는 언뜻 보면 북카페 같다. 하지만 출판 기념회, 작가와의 만남, 북토크쇼 등 여러 커뮤니티 모임

이 벌어지면 공간은 순식간에 달라진다. 빔프로젝터와 마이크, 스피커가 설치되고, 가구 위치가

바뀌면서 작은 행사장이 되니까. 앞으로도 크고 작은 여러 문화 소모임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공

간의 힘을 믿는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벌어지는 그 힘을.


“여기 정말 좋네요. ‘문 닫을 시간이니 나가라’는 말을 안 해서.”

밤늦도록 <지금, 만화> 운영위원회의가 이어진 날, 한창완 교수가 한마디한다. 아, 내가 마담이

니 이런 이점이 있구나 싶다. <지금, 만화> 편집장 위근우 씨는 만화살롱 유어마나를 취재 공간

으로 활용한다. 만화정보지 취재 장소로 딱 맞다. 우리 거북이북스 식구들은 이 공간을 오피스처

럼 사용한다. 때때로 살롱으로 출근해서 일하는 환경을 바꿔보고, 작가도 만난다. 이게 바로 말로

만 듣던 디지털 노마드인가?


여기까지가 만화살롱 유어마나 탄생기다. 앞으로 이 공간이 또 어떻게 변주될지는 나도 모른다.

분명한 건, 우리의 즐거운 경험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살롱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고, 새로운 걸 배우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간다! 그래. 그래야지. 암. ◆


강인선 | 거북이북스 대표이사이자, 만화살롱 유어마나의 마담.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