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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와 <고교생활기록부>, 웹툰 트레이싱 논란 속에서 고민해야 할 지점들

중요한 건, 해당 작품이 순수하게작가의 머릿속과 손끝으로만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여러 시각 이미지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했느냐, 또한 침해했다면 얼마나 침해했느냐는 것이다.

  

 

지난 3, 네이버웹툰에 수년째 연재 중이던 학원 액션물 <대가리>가 해당 장르의 클래식인 <>

여러 장면을 트레이싱(그림 위에 투명한 종이 놓고 베끼는 것)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연재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8월에도 김성모 작가의 신작 <고교생활기록부>가 일본 스포츠 만화 <슬램덩크>의 몇몇

장면을 트레이싱한 것이 드러나 4회 만에 연재 중단된 바 있다. 당시 네이버 측은 모니터링과 검수를

강화해 유사한 상황을 막겠다고 했지만, 다시 한번 <대가리> 트레이싱 건이 벌어지며 과연 이것을 플랫폼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는 문제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다. 작가의 창작 윤리에만

맡기는 것도 불안하지만, 바로 그 창작 윤리에서도 어디까지가 참고이고, 어디까지가 저작권 침해 혹은

표절인지 제대로 합의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과거 <세 개의 시간>을 그린 노란구미 작가는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사진 자료를 트레이싱했단 이유로

강한 비난을 받은 뒤 해당 장면을 모두 수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작가의 창의성과 노력이 들어간 창작물을

트레이싱한 것과 일반 사진을 트레이싱한 것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것이 온당할까? 당장 트레이싱

개념에 포함된 베낀다라는 술어가 창작 윤리에 어긋난다고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술어는 각각의 사례마다

참조하다’, ‘활용하다같은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 창작을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철저히 외롭고 천재적인

개인의 내적 활동으로만 규정하지 않는 이상(이것은 산업화한 모든 창작 활동에서 기각된 개념이다), 만화 창작

역시 현시대를 둘러싼 수많은 이미지 정보로부터 영향을 받고 활용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작가의 창작 윤리를

판단할 때 중요한 건, 해당 작품이 순수하게작가의 머릿속과 손끝으로만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시각 이미지를

활용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했느냐, 또한 침해했다면 얼마나 침해했느냐는 것이다. 순수 대

비순수의 이분법으로는 이 복잡한 사안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슈에 대한 주요 쟁점과 맥락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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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액션 장르 <대가리>(글 그림 정종택. 네이버웹툰 연재)

<>(글 그림 임재원. <코믹 챔프> 연재)을 트레이싱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 팬 카페의 비교컷.

 

 

<대가리><고고생활기록부>는 표절인가?

포털에 대가리를 검색하면 자동 완성되는 검색어 중 하나는 대가리 표절이다. 표절이란 표현은 <대가리>

<고교생활기록부> 트레이싱 이슈를 소개하는 기사들의 헤드 카피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우선 표절을

아주 협소한 범위, 즉 표절 시비가 일어난 작품의 원저작권자가 이에 대한 표절 소송을 걸고 법적으로 표절이란

판결이 나는 것으로만 본다면, 이 두 작품의 경우는 표절이라 볼 수 없다. <슬랩덩크>의 이노우에 다케히코나

<>의 임재원이 자신의 저작권을 도용당했다고 소송을 걸어 승소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좁은 범위의 표절 개념으론 실제 표절에 따르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어렵다. 가령 대중음악계에서 가수 이승철은

자신의 곡 소리쳐가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문제가 커지기 전에 원저작자에게 저작권을 일부 넘겨주고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법적 판결로서는 표절이 아니지만, 소송까지 갔다면 표절로 받아들여졌을 법한 사례다.

그렇다면 정확히 표절은 무엇이며, 저작권 침해와 어떻게 다른가?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는 책 <사진으로 보는 저작권, 초상권, 상표권 기타 등등>에서

표절은 남의 저작물이 자신의 저작물인 것처럼 속이는 것이고, 저작권 침해는 남의 저작물을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다만 이번 <대가리> 사태처럼 언론에서 대중가요나 드라마 등에 관해 저작권

침해와 표절을 구별 없이 마구 써도 별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보통 저작권 침해와 표절이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령 <대가리> 정종택 작가가 원작가 허락 없이 <>의 여러 액션 신을 트레이싱한 것은 그 자체로

저작권 침해인 동시에, 해당 액션 신의 구도나 연출을 본인이 만든 것처럼 글 그림 크레디트를 표기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표절의 혐의가 있다. 하지만 동일한 기준이 <고교생활기록부>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모든 트레이싱이 저작권 침해는 아니다?

앞서 노란구미 작가의 사례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해당 사례와 <대가리> 사례, <고교생활기록부> 사례를

모두 트레이싱이라는 이유로 동일한 수준의 도덕적 비판을 하긴 어렵다. 어떤 원본을 베끼는 행위라는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원본이 저작권을 지닌 저작물로 볼 수 있는지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저작물은 개념적으로

독자적으로 창작한 표현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창작적 노력이나 창작자의 개성이 포함되지 않은 원본에

대해서도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적어도 현재 법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노란구미 작가의 사진

트레이싱을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로 보기 애매한 건 그래서다. 해당 사진 안에 피사체 배치나 앵글 설정 등

창작자의 개성이 명백히 드러난 경우가 아니라면 해당 사진은 저작권법으로 보호하기 어렵다. 심지어 한국

대법원 판결에서는 프로 사진작가가 돈을 받고 찍은 햄 제품 광고 사진조차 피사체인 햄 제품 자체만을

충실하게 표현하여 광고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에 저작권법으로 보호할 만한 원고의

어떤 창작적 노력이나 개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슬램덩크>의 몇몇 장면을 트레이싱한 <고교생활기록부>는 어떨까? 우선 <슬램덩크>가 명백한

저작물이라는 점에서 <세 개의 시간> 사건과 동일하게 보긴 어렵다. 하지만 <대가리>의 경우와 똑같다고

볼 수도 없다. <대가리>의 경우 <>과 흡사한 학원 액션 작품으로서, 원작과 거의 동일한 효과를 기대하며

액션 신을 트레이싱했다. 또한 <>은 인체 구도나 동작의 역동성 등 한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독자성을

지닌 창작물이기 때문에 해당 트레이싱은 원작자의 개성과 노력을 대가와 허락 없이 도용한 것이 맞다. 그에

반해 <고교생활기록부>는 경우 스포츠 장르인 <슬램덩크>와는 전혀 다른 학원 액션물이며, 트레이싱한 부분

역시 이노우에 작가의 그림체와 구도를 베꼈지만, 원작 컷들의 의미와 효과, 느낌까지 도용한 것은 아니다.

뜬금없이 주인공 강건마가 농구를 하겠다며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동일한 연출과 그림체로 덩크를 한다면

원작의 창작적 노력을 도둑질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적어도 공개된 회차까지만 보면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때문에 원작의 그림체를 베꼈다는 점에서 명백히 저작권 침해이자 도의적 잘못이 있지만, 원작의 독창성까지

표절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다만 역시 일본 만화인 <로쿠데나시 블루스> 액션 장면을 트레이싱했다는

혐의는 <대가리> 경우만큼 문제적이다.

 

개그 만화에서의 <슬램덩크> 패러디와 <고교생활기록부>는 어떻게 다른가?

사실 <슬램덩크>에서의 여러 장면이 개그 만화에서 패러디되는 것을 떠올리면 <고교생활기록부>의 경우가

억울해 보일 수도 있다. 가령 가스파드 작가는 <선천적 얼간이들> ‘근성 외다리편에서 다리를 다치고도

양궁 대회에 출전하려는 작은 형의 집념을 위해 <슬램덩크>의 유명한 농구가 하고 싶어요장면을 인용한다.

심지어 여기선 그림체까지도 똑같이 그린다.

 

<마음의 소리> 역시 살아있는 감기의 밤에서 <슬램덩크>의 농구 장면을 거의 컷 구성까지 똑같이 패러디했다.

왜 이것은 괜찮고 <고교생활기록부>만 문제 되는가? 종종 패러디와 오마주는 저작권 침해가 아니니 괜찮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실제와 다르기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패러디를 저작재산권 제한의

하나로서 법적으로 명시하고, 미국도 다양한 판례로 패러디를 넓게 허용하고 있지만, 한국 저작권법에선

패러디라는 개념을 명시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저작권자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저작물의 공정 이용

대해 정의하고 있다. ‘공정 이용은 저작물의 통상적인 이용 방법과 충돌하지 아니하고,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경우 보도, 비평, 교육, 연구 등을 위해 저작물을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패러디의 허용 역시 이 범주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즉 앞의 패러디는 이것이 <슬램덩크>의 패러디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기에 표절은 절대 아니다.

 

해당 장면이 원작에서 활용되는 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어, 원작과 전혀 다른 재미와 감흥을

주기 때문에 이노우에 작가의 정당한 이익을 해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고교생활기록부>도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용되어 이노우에의 이익을 해쳤다고 보기 어렵지만, 일차적으로 트레이싱을 하고 그 사실을

숨겼다는 도덕적 잘못은 분명하다. 원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더라도 독창적인 그림체를 그대로 도용해,

그것으로써 작화에서의 이득을 보았다는 점에서 저작권에 대한 부당한 탈취로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대가리><고교생활기록부>의 트레이싱이 잘못이라는 처음 전제 그대로 돌아온 것 같다.

하지만 이 논점을 통해 트레이싱=저작권 침해=표절’, 혹은 패러디=문제없음같은 도식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저작권의 범위, 저작권 침해의 범위, 저작권 침해의 허용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가 이뤄져야만

만화가의 창작 윤리의 기준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기준없는 처벌은 혹형주의가 될 뿐이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