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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왕>과 <복학왕> 사이, 동시대 학원물 속 ‘인싸’에 대한 욕망과 재현의 문제

현실 반영이 반성적 전유를 거치지 못할 때 텍스트의 핍진성은

자칫 사회적 통념에 대한 재생산 및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전 패션왕이 될 남자입니다고등학생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수년 뒤, 소년은 어느 지잡대

평범한 복학생이 된다. 기안84의 두 작품 <패션왕><복학왕> 사이, 주인공 우기명의 10대 후반에서 20

초중반을 연결하는 어떤 구간은 마치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처럼 불분명하다. <패션왕>은 학교에서

소위 좀 노는 인싸(인사이더를 줄인 신조어)’의 세계에 진입하려 애쓰고 또 어느 정도 성공했던 소년 우기명의

이야기를 상당히 길고 디테일하게 담아냈다. 하지만 우기명이 어쩌다 패션왕의 꿈을 포기하고 미래에 대한 의지를

잃은 채 복학생의 삶에 만족하게 됐는지에 대해선 딱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이 불분명한 구간을 채우고

또한 독자를 납득시키는 것은 서사적 개연성이 아닌, 우기명이란 인물 안에 체화된 체념에 대한 핍진성(逼眞性)이다.

핍진성이란 텍스트의 인물과 행위가 마치 진짜 같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다. 패션 센스로

교내 인싸에 편입되지만 여전히 콤플렉스를 갖고 겉도는 우기명은, 실제 평범한 10대가 그러하듯 삶의 우연

앞에 우왕좌왕하며 휩쓸리듯 미래로 이동한다. 잘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체념의 정서는

우기명이라는 캐릭터의 일관성을 이루며 복학왕이 된 그의 구질구질한 현재를 어렵지 않게 납득시킨다.

 

과거 <패션왕> 연재 당시 인터뷰에서 기안84가 이야기했듯 고등학교 때 일진이라고 잘 나가봐야 미래가 막막

것은 10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경험적인 사실이며, 또한 동시대의 10대들에게도 막연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다.

10대 후반을 입시에 투자해 대학에 입학하면 무난히 입사해서 어떻게든 자기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어떤

황금기가 끝났다는 체념의 정서는 일종의 공기처럼 떠돌고 있다. <복학왕>에서 힌트를 얻어 <복학왕의 사회학>

쓴 사회학자 최종렬은 자신이 가르치는 지방대생들이 경쟁에 뛰어들어봐야 성공하기 극히 힘들다는 것을 현실에서

매일 체감 중이다라고도 말한다. 연재 당시 최고의 메가 히트작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패션왕> 이후,

좀 더 정확히는 <패션왕><복학왕> 사이 등장한 여러 인기 학원물로부터 <패션왕>의 영향을 읽어내게 되는

건 이 지점이다. 패션왕을 꿈꿨지만 복학왕이 된 우기명의 사례에서 인싸가 되고 싶은 욕망은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차라리 곧 닥칠 성인으로서의 현실을 외면하고 단기적으로나마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것은 체념적이기에 순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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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지상주의>(글 그림 박태준, 네이버웹툰 연재)의 주인공 박형석(가운데)

결국 교내 일진 및 인싸에 편입되어 외모지상주의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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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왕><복학왕> (글 그림 기안84, 네이버 웹툰 연재)

주인공 우기명은 패션왕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지방대의 평범한 복학생이 된다.

 

 

미래에 대한 체념과 인싸가 되고 싶은 욕망 사이에 선 아이들

좀 노는 실업계 고등학생들의 연애와 일상 에피소드를 리얼하게 담아낸 <연애혁명>, 메이크오버를 통한 인싸

진입기인 <여신강림>, 아예 몸을 바꾸는 방식으로 인싸가 되는 <외모지상주의> 등은 각기 다른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인싸가 되려는 주인공의 욕망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이미 잘 나가는 일진 한태성이 주인공인

<프리드로우>조차 서사의 상당 부분이 아싸’(아웃사이더를 줄인 신조어) 만화부원들이 한태성과 구하린이

속한 인싸로 편입되는 과정에 할애된다.

 

이는 과거 학원물에서의 힘의 연합을 통한 정의 구현이나(<>), 사회적 부조리에 반항하는 청춘의 집합(<비트>)과는

다르다. 현재 인기 학원물의 주인공은 구조적 부조리에 대항하기 위해 일탈의 공동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위계를 내면화하고 아싸’ (아웃사이더를 줄인 신조어)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 인싸가 되고자 한다. 

 

인싸가 되고자 하는 10대의 욕망을 주체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시절을 보낸

윗세대의 오만일 것이다. 수업을 소홀히 하고 매일 PC방과 노래방을 전전하는 <연애혁명>의 주인공들이 한심해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중심의 입시 시스템 안에서 실업계인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희망찬

미래를 구체화할 수 있는지 사회는 크게 관심이 없다. 지방대생의 취업난을 말하는 <복학왕>처럼 노골적이진

않지만, <연애혁명>의 한없이 가벼운 유머엔 미래에 대한 의식적 회피가 깔려 있다. 내일이 없는 듯 노는 것과

정말 내일이 없는 것 사이 어디쯤의 세계. 이곳의 유머엔 딱히 인과가 없다. 단지 쉬지 않는 드립과 철저히

예능 패러디에 가까운 연출이 있을 뿐이다. 재밌는 일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순간을 최대한

가볍게 즐기려는 태도가 있다.

 

<연애혁명> 연재 초기, 당시 30대 초반의 한 인기 웹툰 작가는 왜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끄는지 모르겠다고

(폄하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 몰라서 궁금하다고) 사석에서 말하기도 했는데, 해당 세대가 공유하는 정서의

핍진성은 분명 기성세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기성세대 관점으로 재구성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에 가까운 10대의 모습은 동시대 학원 웹툰의 강점이다. <여신강림>에서 주인공 임주경을 포함한

인물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기과시와 인정 투쟁을 벌이고, 그것이 일종의 권력적 위계로도 이어지는 모습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단순히 동시대적 소재가 반영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인싸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에 따른 복잡한 관계망 안에서 동시대 10대의 현실은 쉽게 낭만화되지 않는다.

  

인싸에 대한 욕망과 주변부적인 것에 대한 혐오

<연애혁명>이나 <랜덤 채팅의 그녀>, <프리드로우> 등의 작품에서 10대들이 쓰는 비속어나 욕을 사용하는 걸

소재주의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마냥 생각 없어 보이고 비호감인 10대의 모습 자체가 일종의

핍진성을 이룬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물론 수위와 빈도에 대해선 계속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앞서 순응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현실 반영이 반성적 전유를 거치지 못할 때 텍스트의 핍진성은 자칫

사회적 통념에 대한 재생산 및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여성주의 매체 <핀치>에 기고한

글에서 “‘아싸인싸모두 중심/주변이라는 위계화된 이분법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류의 욕망이겠으나,

후자는 주류/기득권에 속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경계도 없이 주변부적인 것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승인한다

최근의 인싸문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그의 비판은 동시대 학원물 속 인싸문화에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메이크오버로 여신이 되고 싶은 <여신강림> 주경의 욕망은 분명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성 없이 묘사될 때,

결국 외모지상주의와 여성에 대한 대상화는 서사 안에서 쉽게 정당화된다. 처음엔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였던 <외모지상주의>에서 완벽한 몸을 얻고 인싸에 편입한 박형석은 결국 일진과 인싸

커뮤니티의 중심부에서 주인공이 될 뿐 인싸아싸의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고민하진 않는다. 해당 작품에서

비 서울 지역 학생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거나, 거의 매회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화 하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현실의 10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그대로 묘사한다는 알리바이와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잘못된 통념 역시 작품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첫 화에선 일진의 허세를 코믹하게 풍자했던 <프리드로우>

회를 거듭할수록 폭력과 일진을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일진을 인간쓰레기처럼 묘사하는

<연애혁명>을 앞의 둘과 동일하게 놓긴 어렵지만, 주인공 왕자림을 괴롭히던 노승희가 일진 박하나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에서 많은 독자가 징벌적 쾌감을 느꼈던 순간처럼, 조금이라도 비판적 성찰의 끈을 놓으면 권력과 폭력,

약자 혐오는 쉽게 용인된다.

 

동시대성 반영을 넘어 동시대적인 윤리에의 고민으로

동시대 학원물에 대해 현실 반영과 핍진성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되, 또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재현 윤리의 문제를 직시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지난 1월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발간한

<2018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보고서(웹툰 편)>에서 위에 인용된 작품 거의 모두가 여성혐오 및 차별적

표현으로 지적을 받았다. <복학왕>에선 여성 캐릭터에 대한 데이트 폭력이 비판적 맥락 없이 희화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여신강림>은 여성의 꾸밈 노동을 강요하며, <외모지상주의><프리드로우>는 맥락 없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심지어 해당 플랫폼 최상위권 인기작들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쉽게

정당화하거나 외면할 문제는 아니다. 건축 비평에 대한 폴 골드버거의 의도를 생각하되 그것 때문에 너무 너그럽게

용서하지 말 것이라는 충고는 거의 모든 비평에 적용된다. ‘인싸가 되고 싶은 10대의 욕망을, 그리고 그것을

반영한 작품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욕망의 기저에 깔린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이어지지 않을 때, 작품은 자칫 현실에 대한 자발적인 패배 선언이 될 뿐이다. 우리가 만화적 상상력에

기대하는 것이, 겨우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