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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에서 섹슈얼리티 묘사의 통사적 맥락과 동시대적 고민

반복된 관습처럼 기호화한 섹슈얼리티를 담은 작품들에

새로운 독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대의 섹슈얼리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베껴온 클리셰인가?

아니면 주류를 전복하는 힘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지금(여기), 만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만화를 살펴보는 건 좋은 통찰을 얻게 한다. 2015921

시작된 <뷰티풀 군바리>(글 설이, 그림 윤성원)에 대한 연재 중단 청원에서는 이 작품의 연재가 중단되어야 할 이유로

맥락 없이 성적 연상을 유도해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각을 강화하는 행위를 꼽았다. 연재중단 청원뿐만 아니라

청원 전후로 지면에서 <뷰티풀 군바리>에 대한 비판이 있기도 했다. 특정 만화를 둘러싼 논의로는 가장

격렬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문제의 지점을 요약해 보면, 여성이 군대에 간다는 설정, 군 생활에서 벌어지는

폭력,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묘사하는 스타일 로 나눌 수 있다. 문제의 지점에 대해 일부는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일부는 그게 뭐가 문제냐라고 생각했다. 2015년 논쟁 이후 <뷰티풀 군바리>는 여전히 연재 중이고, 요일 인기

순위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다. 한 작품을 보고 형성된, 완전히 상반된 반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소지니(misogyny) 문제라고 끝내버리면 다양한 스펙트럼이 사라지고 OX 문제가 되어버린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기 위해 지금까지 만화를 살펴보는 통사적 맥락의 접근을 시도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만화에서 섹슈얼리티 묘사의 통사적 맥락과 동시대적 고민이라는 화두는 이후 추가되는 후속 연구를 통해

풍성해질 것이다. 일본 만화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정리할 때 참조한 <에로망가 스터디-쾌락 장치로서의 만화 입문>,

<에로 망가 표현사>가 저작권 계약 후 출간될 예정이니 책이 나오면 좀 더 풍부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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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에서 섹슈얼리티를 박해천이 한국 중산층을 명명한 작명을 빌려 말하면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만화에서 드러나는 섹슈얼리티는 욕망의 반영인데, 실체가 불분명하다. 욕망의 출처가 모호하다. 한국 만화에서

섹슈얼리티는 일본 만화를 대상으로 한 금지와 전유(appropriation)를 통해 뒤섞인 혼종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섹슈얼리티는 주로 외설로 불렸는데, 외설은 사회를 파괴하는 범죄로 다뤄졌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은 문화 전반 검열 기조의 하나로 유지되었다. 예를 들어 196973일 서울지검은

음란성 범죄 특별 단속반을 구성해 15일간에 걸친 외설물 단속에 나선다. 영화, 논픽션, 소설, 월간지 등을 단속했다.

715일에는 영화 <내시>의 신상옥, <벽속의 여자>의 박종호 감독이 입건된다. 정사 장면을 묘사했다는

이유였다. 섹슈얼리티 묘사를 허용하면 군사독재의 권위적인 지배 구조에 균열이 갈 것으로 생각했다. 혹 그런 고차원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사회는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니 당연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을 체제 유지 차원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 정신은 달랐다. 1960년대 세계사적 조류에서 섹슈얼리티는 카운터 컬처의 하나로 강력하게 분출되었다.

유럽에서 벌어진 68혁명, 미국에서 벌어진 히피 운동, 일본의 전공투 운동까지 1960년대는 사회적, 계급적 저항이

주로 청년층을 중심으로 문화적으로 폭발했던 시기였다. “유럽 젊은이들의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과 사회 변혁의

의지는 다양한 예술 장르, 특히 영화에 크게 각인되어 유럽과 미국, 일본의 감독들은 성적 일탈과 저항을

정치적 혁명과 동일시하는 작품들을 다수 연출했다” ‘미풍양속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섹슈얼리티가 전복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문화에서는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고, 현실에서는 기생관광과 같은 형태를

장려한 혼란의 시대에 만화에서 섹슈얼리티는 일본 만화를 전유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문화를 교류수입의 형태가 아니라 원본을 감추고 전유했다. 만화의 경우 수많은 작품 중에서

한국화시키기에 적당한 작품을 골라 다시 그렸다. <타이거마스크(タイガーマスク)>(1968)<타이거마스크>(1970)가 될 때

교통사고로 주인공이 죽는 엔딩은 군입대 엔딩으로 애국적 전복과정을 거친다.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ー)>(1968)

<도전자 허리케인>(1973)이 될 때, 주인공의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상대방 복서의 국적은 한국인에서

태국인으로 뒤바뀐다. 수많은 일본 만화 중에서 한국에 전유된 작품들을 보면, 주로 로봇, SF, 스포츠

같은 장르물에 집중된다. 특히 자국의 문화적 특성이 강한 개그물이나 진지한 고민을 담은 작품들은 배제되었다.

 

군사독재 정부는 거의 모든 문화 영역에서 섹슈얼리티를 극도로 억압했다. 하지만 서구에서 불어온 변화는

숨길 수 없었다. 우리는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을 친 공산권이 아니라 엄연히 자유주의 서방권 블록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 말 한국이 지향했던 서구로부터 도착한 성 해방의 조류는 문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박유희의 지적처럼 풍부한 논란과 토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화는 섹슈얼리티 묘사에 대한 자율적인 논의가

금지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예술을 위해서 벗긴다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논리 구조를 만들었다. 만화는 어땠을까?

 

2

한국 만화에서 섹슈얼리티 묘사는 <선데이서울>로 대표되는 주간 잡지에 처음 등장한다. 1964년 한국일보사는

<주간한국>을 창간한다. <주간한국>40만 부를 돌파, 1968년 본지 <한국일보>의 발행 부수를 넘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다.1968년 언론사의 주간지 창간 붐이 불며 <주간중앙>, <선데이서울>, <주간경향>, <주간여성> 등이

창간된다. 주간 잡지는 처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대중오락 잡지를 표방한 주간지는 곧장 음란, 외설 논란에 시달렸다.

대학생들은 주간지를 불태우면서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간지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가 연재되었고,

매체의 성격에 맞춰 자연스럽게 만화에도 섹슈얼리티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1974<선데이서울>

연재를 시작한 박수동의 <고인돌>, 그리고 같은 해 <주간여성>에 연재를 시작한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가 있다.

<고인돌>은 당시 명랑만화라 불렸던 약화체 스타일의 작품이었고, <사랑의 낙서>는 극화체 스타일이었다.

 

<고인돌>이 남녀의 에로틱한 상황을 2페이지에 은유적으로 풀어냈다면, <사랑의 낙서>는 청춘 남녀의 연애 에피소드를

담았다. 당시 주간 잡지가 음란, 외설 논란에 시달릴 정도로 섹슈얼리티 묘사에 적극적이었지만, 만화는 기사나 화보,

소설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은유적인 묘사를 했다.

 

1972<일간스포츠><임꺽정>(고우영)이 연재되며 성인만화에 대한 어른들의 욕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후속작 <수호지>의 인기는 전작을 뛰어넘었고, 연재분은 197350쪽 분량에 4×6배판 사이즈, 정가 60원의

가판용 만화로 제작, 판매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1974년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가 가판용 만화에 합세,

1974년 상반기에 모두 10여 종이 나왔다. 고우영 <수호지>는 무려 50만 부가 판매되었다.

어른들의 만화라는

새로운 화두는 당대의 만화가, 출판업자들을 자극했다. 60년대말 에로영화 유행이나 주간 잡지의 성공을 보면

만화의 성공 공식도 단순했다. 1974년 박부길은 부길 프로덕션을 설립해 <김일성의 침실>을 출간했다. 미풍양속을

지키는 것보다 앞선 가치는 반공이었다. 만화는 김일성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서 주로 폭력과 성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고 갔다. 절망이나 퇴폐가 용공이 되던 시기에 반공을 위한 섹슈얼리티는 역설적으로 승인되었다.

1960년대 일본 만화를 전문적으로 베껴 그리던 향수 만화 팀은 1974년 향수 프로덕션에서 <여간첩 마타하리>

출간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프랑스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던 마타하리 앞에 여간첩이라는 다분히

반공적인 수식어를 붙였다. 폭력도 반공의 옷을 입고 정당화되었다. 1974<의리, 정의, 항일, 반공의 기수 김두한>(김창호),

<113 수사본부 야간열차>(김광섭 글, 한진 그림) 등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19771월 성인만화에 퇴폐적인 내용이

실려있다는 이유로 일제 단속 실행 후 성인만화 윤리 실천요강이 폐기되고, 성인 만화 심의제가 폐지되었다. 아예

성인만화를 심의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 이때부터 만화는 오로지 아동, 청소년용으로만 출간되어야 했다.

그렇게 1974년에서 77년까지 3년 동안 짧은 가판용 성인만화 시대가 존재했다.

 

흥미로운 건 가판용 성인만화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모두 극화(劇畵)’라는 점이다. <수호지>는 제목 앞에 극화’,

<김일성의 침실>반공 실록극화’, <의리, 정의, 항일, 반공의 기수 김두한>실록 극화’, <맹룡의 철권>(김창호)

성인 극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극화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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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가쿠칸의 사전에서는 극화에 대해 만화의 형식 중 하나. 스토리를 지닌 만화 중 선이 동적이고, 화면의 원근을

잡는 방법과 배경을 그리는 방법 등이 사실적인 것. 줄거리의 재미와 현실성에 주안을 둔다고 설명한다. 1957

타츠미 요시히로(辰巳ヨシヒロ)가 처음으로 사용한 극화는 밝고, 희망적인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중심의 주류

만화와 달리 어둡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만화들을 포괄한다. 오사카에 근거를 둔 대본 만화 출판사 히노마루

문고에서 활동하던 타츠미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이시가와 후미야즈(石川フミヤス), K 모토미츠(K元美津),

사쿠라이 쇼이치(桜井昌一), 야마모리 스스무(山森ススム), 이토 마사하키(佐藤まさあき), 사이토 타카오(さいとう・たかを),

마츠모토 마사히코(松本正彦) 등이 단편 앤솔로지 <도시의 무지개(都会)>, <그림자북()>(1956) 등에서 활동했다.

1957년 타츠미 요시히로, 마츠모토 마사히코, 사이토 타카오는 도쿄의 센트럴문고에서 단편 앤솔로지 <거리()>

시리즈를 출간하며, 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59년에는 극화 정신에 호응하는 작가들과 극화공방을 결성하며,

좀 더 대안 운동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극화의 물결은 195912월 시라토 산페이(白土三平)<닌자분게이쵸(忍者武芸帳)>(세이린도)을 낳았다.

196210월까지 총 17권 분량의 대본 만화로 출간된 <닌자분게이쵸>는 극화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된

작품이다. 농민 봉기와 계급 사상을 테마로 하였기 때문에, 안보 개정 문제로 시끄럽던 시절의 고등학생, 대학생 사이에

유명해져, ‘극화라는 표현 장르가 오사카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반대하는 전국적인 안보 투쟁이 시작되는 등 1960년대 일본은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정점에 달하던 시대였다.

<닌자분게이쵸>가 발화시킨 극화 붐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건 세이린도(青林堂)에서 1964724일 창간한 만화잡지

<월간만화 가로(月刊漫画 ガロ, 이후 가로)>. 4호부터 시라토 산페이의 신작 <카무이덴( カムイ)>을 연재하며

1966년에는 8만 부를 발행하기에 이른다(창간호의 10배까지 발행 부수가 늘었다).

<가로>에는 대본 만화 출신의 어둡고 격렬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준 젊은 작가 등이

모여들었다. 요괴 만화와 태평양 전쟁 경험담을 담은 만화 등을 발표한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나사식(れじ)>(1968)

츠게 요시하루(つげ義春), <적색 에레지(赤色エレヅ-)>(1970)의 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 <만화가 잔혹 이야기(漫画家残酷物語)>

나가시마 신지(永島慎二), 사만화(私漫画)로 유명한 아베 신이치(安部慎一), 초현실주의 만화를 그린 사사키 마키(マキ),

록밴드 출신으로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한 오쿠헤이라(奥平イラ) 등이 <가로>에서 활동했다.

 

극화는 데즈카 오사무가 추구한 기호적 표현,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스토리 대신 사실적 표현, 격렬한 연출, 세상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실질적으로 극화라는 대안적 용어를 선택한 이들은 반() 데즈카, () 데즈카 만화의

집합이었다. 성장하는 독자들이 자신의 만화에서 극화로 떠나자 데즈카 오사무도 새로운 만화(청년만화)를 발표하고,

이를 위한 전문잡지를 직접 출판한다. 196612만화 엘리트를 위한 만화 전문지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COM>

19671월호로 창간된다.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여명편>을 축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시마 신지 등이 참여했다.

 

1960년대 후반 <가로><COM>은 기존 일본 만화가 채택한 젠더 세그먼트를 해체했다. <COM>에선 대본 만화로

데뷔해 소녀 만화잡지에서 활동하던 야시로 마사코(矢代まさこ), 사회파 작가로 활동한 키무라 미노리(樹村みのり)

여성 작가들도 작품을 발표했다. 짧지만 개성적인 작품을 보여준 오카다 후미코(岡田史子), <바람과 나무의 시()>(1976)

동성애 만화를 개척하고, 여성 작가로 소년잡지에 SF만화 <지구에(地球)>(1977)를 연재한 다케미야

케이코(竹宮惠子) 등은 모두 <COM>에서 데뷔한 작가들이다. 이처럼 <가로><COM>은 기존 만화잡지의 젠더

세그먼트를 해체하고, 다양한 작품을 연재했다. 이 만화를 독자는 물론 만화가 지망생들이 적극적으로 소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런 만화들은1970년대 말 에로극화 잡지와 1980년대 뉴웨이브에 기존 틀을 흔드는 작품들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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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일본에는 ‘3류 극화라고 불린 에로극화 붐이 불었다. 에로극화 붐은 <망가 에로제니카(漫画エロジェニカ)>(1970),

<망가 대쾌락(漫画大快楽)>(1975), <극화 앨리스(劇画アリス)>(1977)를 에로 극화 3대 잡지로 불렀다. 흥미로운 건

당시 에로 잡지가 서점이나 키오스크가 아니라 자판기에서 판매되었다는 사실이다. 3대 에로극화 잡지 중에서

<망가 대쾌락>만 서점이나 키오스크에서 판매되었고, <망가 에로제니카><극화 앨리스>는 모두 자판기용 잡지였다.

 

마치 로망 포르노가 별도의 상영관을 통해 상영되면서 주류질서에서 벗어난 게릴라성, 언더그라운드성을 지녔던 것처럼

에로극화 잡지도 정규 유통망을 벗어난 자판기 판매라는 게릴라성, 언더그라운드성을 지녔던 것이다. 에로극화 붐을

끌어낸 편집자들도 대부분 전공투 세대로 카운터 컬처와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망가 에로제니카>3대 편집장을 맡아 에로극화 붐을 이끌어간 다카토리 에이(高取英)는 일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의 제자였고,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망가 에로제니카>에서는

더티 마쓰모토(ダーティ・松本), 나가시마 후미오(中島史雄), 시미즈 오사무(清水おさむ), 마라소 주니치(村祖 俊一) 등의

작가가 활동했다. <보노보노> 작가인 이가라시 미키오(いがらしみきお)나 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등이 데뷔하기도 했다. <극화 앨리스>에는 가메와다 다케시(亀和田武)가 있었다. SF작가이며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극화 앨리스>에 편집장으로 참여해, 메이저 잡지에서 활동 중인 아즈마 히데오를 스카우트해

<부조리 일기(不条理日記)>를 지면에 연재시킨다.

 

영화판의 로망 포르노처럼 학생운동 종말 이후 게릴라성과 언더그라운드성을 지닌 편집자들에 의해 편집된 에로극화 잡지는

1960년대 극화가 지닌 인간과 사회의 어두움을 계승하고, 이를 에로라는 틀 안에 녹여 놓았다. <망가 에로제니카>

<극화 앨리스>1980, <망가 쾌락천>1981년에 휴간했지만 이들이 보여준 사실적인 섹슈얼리티는 1980년대

뉴웨이브로 이어졌다. 1982년에 창간한 잡지 <망가 부릿코(漫画ブリッコ)>는 소설가이자 편집가이자 만화스토리

작가로 활동하는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2대 편집장을 맡은 1983년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를 연재했다.

특히 <가로><COM>에서 보여준 젠더 세그먼트의 무력화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스타일의 만화를 연재했다.

미소녀 스타일의 만화를 그린 가가미 아키라(かがみ あきら), 여성 중심의 섹슈얼리티를 보여준 오자키 쿄코(岡崎京子)

등의 작품을 연재하며 1980년대 뉴웨이브의 한 축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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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이 되며 초창기 10만 부에서 시작한 주간 만화 잡지 부수가 40만 부까지 성장했다. 주간 만화잡지

경쟁에서 뒤처진 <주간 소년매거진(週刊少年マガジン)>(고단샤)은 전통 잡지 만화 출신이 아닌 극화 작가들한테 눈을

돌렸다. 1966년 가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글을 쓰고, 가와사키 노보루(川崎のぼる)가 그림을 그린 <거인의 별(巨人)>

연재되며 돌풍이 시작된다. 1968년 가지와라 잇키의 스토리로 지바 데츠야(ちばてつや)가 그림을 그린 <내일의 죠>에서

돌풍은 태풍이 되고, 1971년 가지와라 잇키의 스토리로 츠지 나오키(なおき)가 그린 <타이거마스크>까지 근성 3부작이

내리 발표된다. 가지와라 잇키의 근성 3부작은 목숨을 건 승부와 아버지의 부재와 같은 극화적 설정이 당대의 청년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만화 독자 연령층을 끌어올렸다. 1960년대 후반 매거진에 연재된 근성 3부작을 통해 만화는

어린이의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보편적인 청년문화로 확장되었다.

 

196881<플레이보이>를 출간하던 슈에이샤는 새로운 만화 잡지 <소년점프(週刊少年ジャンプ)>를 창간한다.

창간 초기에는 격주간지였지만, 196910월부터 주간지로 변경된다. 슈에이샤는 양대 출판사 중 하나인 쇼가쿠칸에서

아동과 오락부문이 독립되어 설립한 출판사로 고단샤와 쇼가쿠칸에 비해 더 상업적인 출판사였다. 후발주자였던

<소년점프>1968년 나가이 고(永井豪)<파렴치학원(ハレンチ学園)>을 연재하며 소년만화에 섹슈얼리티를 도입했다.

기존 만화에서 한번도 다루지 않은 방식으로 성과 폭력을 작품으로 끌어들였다. <파렴치학원>은 웃음을 표면에 내세워

섹슈얼리티 표현 강도를 끌어올렸다. 반복되어 활용된 섹슈얼리티 묘사는 이후 일본 만화에서 쉽게 만나는 클리셰가

되었다. 학교에서 여성 캐릭터(선생이나 학생)의 속옷(브래지어나 팬티)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만화에서 공부나 운동하는 장면만큼 자연스럽게 되었다. 신체검사, 수업, 수학여행의 온천에서는 물론이고 격투가

벌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파렴치학원> 3부에는 미모의 이도류(美貌二刀流)를 사용하는 미야모토 미조(宮本美蔵)

나온다. 여성 캐릭터들이 칼로 싸우면 꼭 먼저 옷을 벗긴다. 이후 실력 좋은 검사가 칼을 휘둘러 여성 캐릭터의

옷을 벗기는 장면은 개그 클리셰처럼 활용된다. <도로론 염라대왕군(ドロロンえんくん)>(1973)은 염라대왕군과

설녀족(雪女族)의 공주 유키코 공주가 지상에 내려와 요괴를 퇴치하는 이야기다. 염라대왕군의 친구 츠토무군(ツトムくん)

주변에 요괴가 나타나면 유키코 공주가 은밀한 곳을 보여주는 미끼가 되고, 위기에 몰릴 때 염라대왕군이 요괴를

잡는 구조가 반복된다. 적대자의 약점을 보이기 위해 여성 캐릭터의 은밀한 곳을 노출하는 행위 역시 이후 소년만화의

클리셰로 자리 잡았다. 한 단계 깊이 들어가면, ‘웃음야함으로 양해받은 전복적 요소들이 대거 존재한다.

사도마조히즘, 동성애, 양성구유, 앰퓨티(amputee), 성적 고문, 패티시즘 등이 나가이 고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클리셰화한 섹슈얼리티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성적 요소들은 나가이 고키드들에 의해 학습되고 80년대 미소녀 캐릭터가

등장하는 에로 만화로 이어졌다.

 

6

군사독재시절 한국에서 섹슈얼리티는 체제 유지 차원에서 통제되었다. 1970년대 주간 잡지와 스포츠신문에

연재된 극화(당시 극화라고 정확하게 불렀다)를 통해 성인만화 붐이 불고, 1974년 가판용 만화에서 섹슈얼리티가

시도되지만 결국 금지되고 만다. 한국 만화로 전유된 일본 만화는 (1)데즈카 오사무의 스토리

만화 (2)대본 만화와

() 또는 비() 데츠카 만화 (3)<가로><COM>을 통한 젠더 세그먼트의 무력화 등 새로운 표현의 실험만화

(4)<파렴치 학원>을 통해 섹슈얼리티 표현으로 확장된 청년만화 (5)에로극화 붐을 통한 극화적 섹슈얼리티의 등장과

전공투 붕괴 이후 카운터 컬처의 이동 (6)앞의 (3),(4),(5)에 영향을 받은 ‘80년대 만화 뉴웨이브로 진행되었다.

 

1960-1970년대 한국 만화는 어린이용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해당 시기 일본 만화도 섹슈얼리티가 없거나 제거된

상태로 전유되었다. 대신 1970년대 등장한 에로극화는 완전히 불법적 영역으로 흘러 들어왔다. 소위 청계천

빨간책으로 불린 불법 성인극화들은 대개 1970년대 에로극화를 베끼거나, 참조해 만든 작품들이다.

일본 만화에서 섹슈얼리티 표현은 일정한 전복성을 갖는다. (3)에서 이야기한 젠더 세그먼트를 무력화한 작품들이나

(4)에서 이야기한 나가이 고의 작품 그리고 (5)에서 이야기한 에로극화붐은 일정하게 당대 무력화된 사회운동을

섹슈얼리티의 충격을 통해 흔들기도 했다. 일본 만화에서 섹슈얼리티는 근대 초기 유럽에서 포르노그래피가 수행했던

카운터컬처 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만화에서는 자생적으로 섹슈얼리티가 만화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결과 한국 만화에서 섹슈얼리티는

역사, 사회,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게 일본 만화의 섹슈얼리티를 전유한 기이한 혼종으로 정착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극화들이 보여준 젠더 파괴나 다채로운 형식 실험에 등장하는 섹슈얼리티, <파렴치학원>이 지닌 안전한

정치를 뒤흔든 파괴적인 전복성, 에로극화가 지닌 언더그라운드의 정서나 게릴라성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팬티나 가슴을

보여주는 클리셰만 1980-1990년대 일본 만화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다. 1980년대 뉴웨이브를 가져왔던 새로운

섹슈얼리티, , ‘소녀성을 거부한 여성 작가들의 과감한 성애 표현이나 극화적 캐릭터가 아닌,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의 맥락은 사라지고 클리셰로 남은 섹슈얼리티만 도입되었다. 코피 흘리고, 팬티 보여주고,

가슴 만지고, 거기에 적합한 앵글을 동원하고, 여성 캐릭터를 파편화해 기호화하고 그걸 반복 생산하며 소비했다.

그 과정에서 독자도 자기중심적으로 코드를 소비했고, 거기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어

수많은 새로운 독자들이 유입된 웹툰에서 반복된 관습처럼 기호화한 섹슈얼리티를 담은 작품들에 새로운

독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

전복의 맥락이 거세된, 그래서 클리셰로만 남은 섹슈얼리티는 가슴 크기(빈유, 거유 등), 출렁거림이나 그걸 강조하는

앵글에 집착하고 소비할 뿐 ?”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대의 섹슈얼리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베껴온 클리셰인가? 아니면 주류를 전복하는 힘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를 위해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는 일본에서 먼저 발화한 섹슈얼리티의 통사적 맥락을 고민하자는 거다.

왜 그 시대에 그 섹슈얼리티가 나오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까? 왜 전공투의 투사들이 자판기용 에로극화 잡지에

들어가 에로극화를 만들었을까? 왜 아즈마 히데오는 로리한 캐릭터들을 불러내 동인지를 만들었을까? 왜 오쓰카

에이지는 여성 작가들의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만화를 연재했을까? 질문에 답을 찾으며 동시에 우리는 전복의

섹슈얼리티를 담은 작품들을 드러내야 한다.

 

박인하 | 만화 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