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스크랩]
고우영의 <수호지>, 미리 맛본 어른의 세계

b018da61eccf71b8f4fd96cba811a2ce.jpg

<수호지> (글 그림 고우영. 자료 제공 고우영화실)


  

<대야망>에서 <임꺽정> 그리고 <수호지>로 이어지는 나의 고우영 만화 순례는, 곧 아이에서 너무 빨리 사춘기

소녀가 되어 미리 어른의 세계를 훔쳐보는, 비밀스러운 쾌감을 선사한 셈이다.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하기까지 살았던 동대문구 전농동의 동네 풍경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스물 몇 개쯤의

돌계단 아래 나지막이 자리했던 외할머니 집과 몇 미터 떨어져 있던 부엌과 방 두 개가 붙어있던 고모할머니 집,

그리고 조금 더 떨어져 있었던 단칸 셋방 우리 집. 우리는 친척끼리 그렇게 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나는 그 작은 동네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세상모르고 살았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으로 초등학교

6년을 외가에서 자란 오빠와는 조금 서먹서먹하게 지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마루가 있고, 대학에 다니는

외삼촌 방엔 책들이 가득했던, 외할머니의 집을 매일 드나드는 건 나의 일과였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있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내, 고무신을 닦아 마루 밑에 얌전히 세워 놓았다. 그러고는 오빠의 책꽂이에 쌓여있던

<어깨동무><새소년> 속 만화들에 온통 정신이 팔린 채 코를 박고 읽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해가 졌다.

1964년 창간된 <어깨동무>를 비롯해 <새소년>, <소년중앙>은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당대의

어린이 잡지였다. 길창덕의 <꺼벙이>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명랑만화와 일본 만화의 존재를 그 잡지들로

알게 됐는데, 그러다 드디어 고우영의 <대야망>을 만났다. 1970년 여덟 살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우리 집은 전농동에서 중랑교, 면목동으로 이사 다니며 도시의 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중학생이 된

오빠와 함께 살게 된 그때, 나는 외가의 소담한 풍요와 이별했다. 어린이 잡지는커녕 동화책 한 권 제대로

없었던 우리 집이 그렇게 삭막해 보일 수 없었다. 대신 아버지가 퇴근 무렵 매일 사 들고 오는 <일간스포츠>

읽는 게 생의 낙이었다. 고우영의 <수호지>가 매일 연재되고 있었으니까.

 

1973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수호지>25컷 분량의 내용을 신문 절반 크기로 빽빽하게 실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신문을 사 들고 오는 일을 깜빡하면, 동네 어귀 버스 정류장 옆 신문 가판대로 내달렸다. <대야망>에서

<임꺽정> 그리고 <수호지>로 이어지는 나의 고우영 만화 순례는, 곧 아이에서 너무 빨리 사춘기 소녀가

되어 미리 어른의 세계를 훔쳐보는, 비밀스러운 쾌감을 선사한 셈이다. 왜 아니겠는가. 본격 성인 만화를

표방한 <수호지>가 보여주는 고우영 서사의 박력과 해학과 농밀한 자극들은, 무료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사춘기 소녀를 무엇보다 기쁘게 했으니.

 

108명의 호걸이 양산박에 모여 부패한 조정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수호지>는 노지심, 송강, 무송, 무대,

반금련, 서문경 등 실로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고우영은 수많은 캐릭터와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적 배경과

연재 당시의 사회 문화적 이슈까지를 끼워 넣어 재구성하고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냈다. 작가 스스로 직접

만화 속으로 들어와 스포츠 중계하듯 상황을 설명하고 개입하기도 했다. 인물들의분노나 활극 장면은 찍어

누르는 듯 힘찬 그림체로 박력이 넘쳤고, 유머러스한 장면들은 설렁설렁 간결하고도 단순하게 묘사해

여유가 흘렀다.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세밀화와 양식화된 단순한 그림체를 오가는 먹과 잉크와 펜의 자유로운

사용은 실로 천재의 재능이었다.

 

거지 소녀 반금련이 천하 미색으로 자라 서문경과 불륜에 빠져 떡장수 남편 무대를 독살하는 부분이나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동생 무송이 두 남녀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은 뼈와 살과 피가 튀는 잔혹 묘사로

오금을 저리게 했다. 커다란 뻐드렁니에 주근깨 뺨, 반 토막만 한 키의 무대는 특히 <수호지>의 시그니처

캐릭터였다. 고우영은 착하고 나약한 인물이 주는 연민의 정서를 서늘하게 묘사하는데 빼어났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고우영의 만화를 보며 아이에서 소녀로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그의 신문

연재만화가 한 일간신문의 판매 부수를 수십 배 뛰게 했고, 스포츠연예신문에 그의 성인만화 연재물이 최초로

실린 것이 독점적 지위로 횡포를 부렸던 대본소 만화 시스템에서 벗어나 한국 만화 생태계를 바꾸는

일대 사건이었음은 뒤늦게 안 사실이다. 외압에 의해 <수호지>271회를 끝으로 중단됐다는 사실도 어린 시절엔 몰랐다.

 

내 생각에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200542566세의 나이였다. 2008년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고우영 만화 네버 엔딩 스토리>전을 혼자 찾아갔다. 그의 생전 작품들과 작업의 자취를

새삼 확인하고, 그를 기리는 문화예술가들의 작업물을 둘러보고 나와서 건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물질의 가난 속에서도 고우영의 만화 덕분에 어린 영혼이 풍요로웠던 나의 유년을 뒤돌아보며,

천재 만화가를 그리워하며, 오래오래 서 있었다.

 

심재명 | 영화사 명필름 대표.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