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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성들의 운동장 되찾기


여성들의 체육 환경 개선을 발판으로 하여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가 점점 늘어나기를,

현실과 창작 서사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시작하기

가장 먼저, 시작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 누구든 운동을 이어나가려면 일단 시작을 해야 하니까. <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주인공 이가야가 태권도장 화랑관에 가보았던 건 무단결근을 했던 날이

었다. 인간관계도 일도 잘 안 되는 것 같던 어느 시기에 가야는 돌파구를 찾듯 도장에 나가기 시작

했다. <샤카>의 주인공 주다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폭력적인 취객이 행패를 부리는 걸

근처 주짓수 도장의 사범님이 막아준 것을 계기로 도장에 나가게 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것이었

지만 다은 역시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헤어진 다음

날, 달리기>의 한태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들이 출구를 찾는 방법으로 운동을 시작한 건 정말로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운동이 인

생의 문제에 직접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활기와 잠시 머리를 비울 수 있

는 시간은 준다. 내 시작도 세 사람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딱 일 년쯤 지난 시점이

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육아에 약간 익숙해질 때쯤 체력이 바닥을 찍었다. 출산으로 충격을 세게 받

은 몸은 그때까지도 덜그럭덜그럭했다. 뭔가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 앞 헬스장에서 퍼

스널 트레이닝을 받은 게 운동 경력의 시작이다. 아기와 떨어져서 몸을 움직이고 느긋하게 씻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상황만 되면 운동을 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눕고 싶을 땐 주짓수>의 작가이자 주인공인 도다는 주짓수를 시작할 때, 자기처럼 운동도 못 하

고 힘도 없으면 주짓수를 잘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많은 여자가 자기의 신체 능력을 의심한

다. 여자는 약하고, 남자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말을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여자

의 운동이란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한 것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여자의 ‘운동 능력’

은 가치 없거나 개발할 필요 없는 것으로 취급당해왔다.


나도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 신체가 가진 능력을 몰랐고, 의심했다. 하지만 의심은 즐거움 너

머로 곧 사라졌다. 근력 운동에 재미를 붙인 뒤 집에서 먼 곳까지 바벨과 케틀벨 운동을 배우러 다

녔다. 그러다 선생님들의 권유로 역도를 배우고 역도 동호인 대회에도 나가봤다. 요가를 2년쯤 배

웠고, 주짓수에도 발을 들였다. 운동은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즐거움

을 주었다.


2 몸 쓰는 일을 즐거워하기

가야는 체력이 약해 도장에 들어가자마자 따로 체력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한국인이라 왠지 도복 입

은 모습마저 정통성 있어 보인다는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줄넘기 30번 만에 힘들어 헉헉댔

다. 대련 때는 발차기 해오는 상대가 두려워 주저앉았다. 태권도는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그

만둘까 생각했다. 도다도 수업 전 워밍업조차 힘들었다. 늘 뒤처졌던 학창시절 체력장의 악몽이 떠

올랐다. 태수는 달리기를 시작한 첫날 목표치만큼 뛰지도 못하고 편의점에서 폭식한 뒤 친구 서바

람에게 "아무래도 난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나로 말하자면, 종목을 옮겨갈 때마다 이런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역도는 그만둘 때까지 잘한

적이 없었다. 무거운 바벨을 단번에 머리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순간에는 정말로 겁이 났다. 요가

를 시작했을 땐 그야말로 되는 게 없었다. 그때 이미 운동 경력이 상당했는데도 요가 선생님이 “

몸을 쓸 줄 모르시네요”라고 말씀하셨다. 주짓수는 다치는 게 무서웠고, 처음 할 때는 스파링 2분

도 못 견뎌 헉헉댔다.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라면 정말 기운 빠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야도, 태수도, 바람도, 도다도,

나도, 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화랑관 관장님은 가야에게 “조급해할 것 없어요. 흰 띠는 흰 띠답게,

자연스럽게 천천히 해나가면 되는 거예요”라고 조언했다. 거의 평생을 달려온 달리기 베테랑 바람

은 태수에게 “소질이 있어야 달려? 소질이 없으면 달리면 안 되는 거야?”라고 되물었다.


나에게는 겁내도 된다고, 못하는 것도 괜찮다고, 포기하지만 말라고 말씀해주시는 좋은 선생님들

이 계셨다. 정말로 그랬다. 괜찮았다. 역도 대회에선 꼴찌였지만, 나는 인상과 용상 동작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요가 수련실 안에서는 잘하는 축에 못 드는지 모르지만 2년간의 수련 덕분에 주

짓수 도장에 나가면 가장 유연한 사람이며, 그동안 해온 여러 근력 운동 덕분에 나보다 체급이 높

은 사람들에게 힘으로 덜 밀릴 수 있다. 가장 좋은 부분은 6년 동안 내 몸을 이리저리 써본 경험과

즐거움이 내 안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잘은 못하지만 하나도 못 했던 시절보단 내

몸의 움직임을 즐길 수 있다. 내 몸을 좀 더 잘 지배하는 기분, 언제나 가볍게 기름칠이 되어 있다

는 자신감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3 운동장 되찾기

이렇게 내 몸을 쓰는 일은 즐거운 것이건만 활발한 신체 활동이 여자들의 몫으로 여겨진 적은 없었

다. 넓은 운동장이 필요한 운동은 더욱 그랬다. 학교 수업시간에 여자들에게는 기껏해야 피구, 훌라

후프 같은 것을 가르쳤고 농구 코트를 사용해볼 일도 축구 골대를 사용해볼 일도 별로 없었다. 그

렇게 넓은 곳을 누비며 땀 흘릴 수 있는 건 남자들이었다.


최근 <조선일보>의 운동 관련 기사에선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권하는 운동은 다르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의 말이 인용됐다. 남학생은 주로 승부욕을 자극하

는 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으니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 운동을 시키고, “여학생은 기질적으로 정

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공감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파워 워킹이나

요가·에어로빅 등을 권장”한단다. 전부 다 틀린 말이라 어디서부터 틀렸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자들이 기질적으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말로 사회가 여성에게 정적이어야 한다고 압

박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학생들이지만 교복의 형태부터 크게 차이 나지 않는가.

‘여자애가 칠칠치 못하게’ 등의 말로 얌전할 것과 예쁠 것을 강요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는 움직이며 땀 흘려야 하는 체육 활동의 장벽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또 남자

들의 승부욕에 비해 여자들의 승부욕이 적은 게 아니라, 여자의 승부욕은 폄하하거나 위험한 것으

로 취급하면서 발휘하지 못하도록 누르는 것이다. 기왕 ‘서울대 교수님’이 여자들에게 알맞은 운

동이라며 언급했고, 나도 2년 정도 경험이 있으니 요가를 예로 들어보자. 요가처럼 난도가 높은 운

동을 할 때 발휘되는 승부욕을 사회는 무엇으로 호명해주는가? 그저 독하다고 하진 않나? 요가처

럼 신체의 기초 능력을 쌓는 것으로 시작해 완성도를 추구해가는 운동의 어려움은 무시하고 ‘여자

가 많이 즐기고 잘하는 운동’이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나? 여초 실내 운동 클래스

정도가 여자들이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어디서도 여자들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문

제는 누가 고려하고 있나?


여자는 운동을 싫어하고 못 한다며 가르치는 종목부터 차별해놓고, 그 선입견을 스스로 강화해가

는 사람들이야말로 여성들, 특히 성장기 여성들의 체육 활동 기회를 축소하고 박탈하는 주범이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가야는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계집애가 태권도는

배워서 뭐하게!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집안일이나 돕지” 조금이라도 격하다고 여겨지는 운동이

라면 당장 여자들은 배울 자격을 의심받는다. 그 종목에 진입하고 나면 여자라고 무턱대고 무시

하는 남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가야도 ‘저런 쬐그만 여자한테 내가 지겠냐’고 생각하는 남자와 대

련한 적 있다.


사실 내가 도복 입는 운동을 시작한 데는, 여자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종목을 열심히 배우는 엄

마를 보면서 딸이 체육 활동에 대한 장벽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여성들에게 모든

종류의 신체 활동이 장려된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

기>의 바람은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동안 동료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그

들을 이끄는 동시에 도움을 받는다. 여성인 바람이 누군가에게 ‘되고 싶은 모습’이자 성취하는 인

물로 그려지는 점이 좋았다. 여성들의 체육 환경 개선을 발판으로 하여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가 점

점 늘어나기를, 현실과 창작 서사가 서로 끌어주고 밀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제 초등

학교에 들어가고 태권도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내 딸과 모든 성장기 여성들이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며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운동을, 여자 친구들과 팀워크를 다지며 상대와 겨루는 운동을 마음껏

해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김정희 | 프리랜서 편집자이자, 운동 시작한 지 만 6년 된 취미 운동인.

바벨 및 케틀벨 운동과 역도를 배웠고, 요즘은 요가와 근력운동을 병행하며 주짓수를 열심히 수련하는 중이다.

주짓수 대회에 나가서 한 판이라도 이기는 것과, 순조롭게 승급해나가는 것이 2019년의 목표.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