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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좋습니까?>와 <남의 부인>, 결혼 제도는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나


결혼 제도가 대한민국 민법에 명시되어 있다면, 가치관은 부부를 둘러싼

광범위한 사람들의 언행 속에 기재되어 있다.



나는 25살에 결혼했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선 첫 번째 결혼이었다. 같은 회사에 재직하던 여자

선배들은 매일같이 내게 결혼을 재고해보라고 조언했다. 선배들은 우리나라 결혼 제도 안에서

여성은 무조건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결혼은 늦게 하는 것이 승자’라고 강조했

다. 그러나 그땐 그런 말들이 귀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당시 나는 권위적인 아버지한테서 독

립하고 싶어 안달했다. 매일같이 자취방을 알아보다 아버지에게 들켜 호되게 혼나는 일을 반복

했다. 집에서 나가는 것만이 간절했던 내게, 때마침 남자친구가 내밀었던 ‘결혼’ 카드는 매력적

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연재됐던 웹툰 <하면 좋습니까?>에서는 주인공 연이 남자친구 성재의 프러포즈 이후 결

혼을 할지 말지를 두고 친구, 연인, 가족 등과 두루 의논하며 결혼의 장단을 고민하는데, 내게는

그럴만한 사람도 여유도 없었던 셈이다. 나와 친하게 교류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결혼한 사람

은 없었고, 지금 상태를 유지하자니 매일 폭발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독립하든 결혼하든 빨리 집

에서 나가야 했다. ‘결혼은 타이밍’이라는 명언은 딱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그 타이밍이라는 것은 나에게나 유효했지,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될 만한 사유는 아니었으

므로 나는 주위에 결혼 소식을 전할 때마다 혼전임신은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요즘 시대에 혼

전임신이 별거냐며, 사실대로 말하라는 얘기는 우리 밥상의 김치처럼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시

간을 두고 보면 알겠지, 하는 음흉한 웃음들 속에서 나는 늘 죄 없는 내 복부지방을 탓해야 했다.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리는 건 사람들이 내게 간섭해도 좋다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간섭받아도 괜찮은, 아니 간섭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결혼식이 다가오는데 왜 아직도 살을 못 뺐냐, 정말 임신한 거 아니냐, 피부 관리는 안 하냐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결혼식이 지난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살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아줌마라고 너무 방심한 거 아냐?”라며 놀림감으로 삼거나, 피곤한 내색을 보이면

“역시 신혼은 신혼이지?”라는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결혼한 새댁의 이미지를 강요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이라는 제도는 결혼에 직간

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역할극을 강요한다. 예컨대 <하면 좋습니까?>에서 연이 성

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성재의 집안에 (원래 없던) ‘김장 데이’가 생겨

나는 것처럼 말이다. ‘김장 데이’는 자녀들과 화목하게 잘 어울리는 시부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성재 부모가 꺼내든 카드다. 연 역시도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며

느리로서의 정체성을 입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설거지는 안 해도 과일 정도는 깎는, 다소

소극적인 며느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무리 주변에 결혼한 사람이 없었더라도, 결혼하고 나면 이러한 역할극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쯤은 나 역시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이 역할극을 관람하고 독려하는 사람들이 무대 밖에

이렇게 많이 포진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회사 상사들의 도 넘은 참견뿐만 아니라, 사적인

모임에서 듣는 “신혼이니까 오기 힘들지?”, “신혼인데 남편은 어쩌고?”라는 말 역시 내가

아내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를 복기하게 했다.


결혼 제도는 이성이 일대일의 관계로 혼인을 신고하고, 이후 아이를 낳아 호적에 올릴 수 있는 행

정적인 처리방침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사회에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를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가치관의 영역 역시도 특정한 모습으로 정해져 있다. 결혼 제도가 대한

민국 민법에 명시되어 있다면, 가치관은 부부를 둘러싼 광범위한 사람들의 언행 속에 기재되어

있다. 물론 그 언행들이 <하면 좋습니까?>의 친구들처럼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결혼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주고, 파트너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정서적

여유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조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네이트판이나 미즈넷 등에서도 우리가

자주 접하는 것처럼, 대다수의 경우에는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타인의 말이 한 가족에게 긍정적

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한편 이 언행들은 정서적인 차원을 넘어 당사자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압박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만화가 케이툰 연재작 <남의 부인>이다. <남의 부인>은 아내

인희와 남편 호연, 그리고 남편 친구 윤철, 이렇게 삼자가 겪는 갈등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 인희

는 가계를 책임지고 호연은 자신의 꿈을 위해 돈벌이를 접고 집안일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등장

한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되면서 인희는 실적을 내야 한다는 사명감, 승진을 앞둔 압박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복합적인 스트레스로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희가 임

신을 하면서 인희와 호연의 갈등은 더욱더 가파르게 대립한다.


인희가 맞닥뜨리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부부의 경제적 역할을 바꾸어 수행하는 것은 비

교적 자유로워졌으나, 부부가 어떻게 합의했든 이러한 내용이 사회적으로 수용되거나 인정받는

것은 별개라는 문제가 있다. 회사는 인희가 가장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여성 노동자의 근로 환경

을 안정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특히 임산과 출산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인희는 과장 승진 심사

를 앞두고 임신하게 되면서 이를 회사에 극구 숨기려 하지만, 회사 상사의 집요한 의심과 추궁으

로 결국 원치 않았던 타이밍에 임신 사실이 밝혀지고 만다. 임신하면 승진에서 밀려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인희가 계획하고 있던 해외 지사 파견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임신 때문에 맞게 될 입지

의 불안정성 때문에 지금까지 승승장구의 길을 걸어왔던 인희는 극도의 불안으로 떨어지게 된다.


두 번째로, 부부의 역할은 전복되었지만 그렇다고 젠더 규범마저 전복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희는 경제적인 생계를 책임지면서 대신 집안일에선 해방됐지만, 남편의 꿈을 지지하며 적극적

으로 관심 갖는 내조의 역할과 새로 생긴 아기를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모성애 압박에서는

해방되지 못한다. 결국 인희는 경제적인 부담과 더불어 젠더 규범에 따른 아내의 역할마저도 충

실히 수행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부담감으로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하면 좋습니까?>의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결혼 제도 안에서 구체적인 개인들은 ‘괄호 안에’ 들

어간다. 결혼 후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내가 페미니스트이건 아니건 나의 정체성을 가족관계 안

에선 제대로 존중받지도, 스스로 수행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친오빠가 결혼하여 내게 새

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 나는 내가 ‘아가씨’로 불리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었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 전적으로 나의 호칭에 관한 문제였는데도 나는 가족과 싸워야

했다. 내가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람들, 즉 친정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었지만 이

들은 모두 견고한 제도와 가치관으로, 심지어 국립국어원의 표준 언어 예절(가족 호칭)로까지 든

든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나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경숙 씨'로 바꾸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호칭이 ‘가족 같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다면 ‘가족다운' 호칭이란 무

엇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었으나, 차마 그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발칙한 며느리들이 있다. 웹툰 <며느라기

>의 형님 정혜린이 대표 주자다. 혜린은 명절에 시가에 가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이를 흔

들림 없이 유지한다. 이들은 ‘미움받을 용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나 역시 그들

처럼 당당하게 의견을 말하고 싶었으나, 정작 필요한 상황에서는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사실 ‘미움받을 용기’를

무릅써야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곳이라면, ‘미움받을 용기'보다도 ‘섣불리 미워하지 않을 용기’

가 필요한 게 아닐까?


지난 5년간 내가 경험한 바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때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서로의 관계를 객관화할 수 있을 때 예의를 갖추곤 했다. 서로 다른 상황과 입장

에 처해있는데,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페미니스트

인 내가 가족 안에서 그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면서 겪는 내면의 갈등을, 가족 간의 대화와 배려

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걸까? 글쎄, 적어도 지금까지 내 경험에 비추자면 대답은 ‘아니오’다. ◆


조경숙(갱) | <주간경향> ‘만화로 보는 세상’ 칼럼을 연재하며,

박희정 기록활동가와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 시대 여성만화 연구>를 진행했다.

공저서로는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가 있다.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