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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괜찮지만은 않은 삶에 대처하는 ‘일상툰’의 자세

일상툰’이 우울증에 대한 설득력 있는 보고서인 것은,

솔직하게 그려내는 삶의 모습 속에 삶 본연의

외로움과 고통이 자연스럽게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일상툰’이라는 장르를 좋아합니다.

‘일상툰’을 읽다 보면, 어릴 때 동네 언니네 방에 처음 놀러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나보다 세 살

위였던 그 언니의 방에는 레이스 이불이 덮인 하얀 침대가 있었습니다. 내가 갖고 싶어 하던 바비

인형과 인형의 집도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었고요. 책가방을 걸어 놓을 수 있는 책상에는 교과서와

함께 언니가 좋아하는 동화책 그리고 당시 유행했던 무서운 이야기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쁜 방울이 달린 머리 고무줄들도 놓여 있었습니다. 동생들과 쓰던 내 방과 비슷하지만 다른

물건들이 있는 공간. 생활의 세세한 결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언니 방에 있으면, 언니와 골목에서

놀 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동네 언니라는 관계에서 한 단계를 넘어,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속속들이 알게 되고 진짜 가까워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낯설고, 설레고, 그러면서도 따뜻했던

그 기분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나와 비슷한, 그러면서도 다른 한 사람의 생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의 생활

공간에 놀러 가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솔직하게 풀어내는 작가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외로움이

달래지기도 하고, 사람들은 다 비슷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 이 작가는 이걸 이렇게 받아들이고

해결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작가가 친구나 아는 언니, 아는 동생처럼 편안하고

친근합니다. 어느샌가 그 삶을 걱정하거나 응원하게 됩니다.


현이 작가의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은 예전부터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추천도

많이 했던 작품입니다. 자신의 소심함, 이상함, 야함, 함께 하고 싶지만, 또 혼자가 되고픈 심정을

솔직하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한 초기 에피소드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막상 만나면 어색하고 낯설어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하고서야 재미있는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술자리를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요.

그중에는 섬세하고 민감한 감정과 스트레스를 술을 통해 둔화시키고 싶은 것, 또 취한 후에 마음의

빗장을 열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툰’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불안이나

초라함, 슬픔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보는 이들한테 통쾌함과 함께 깊은 공감을 끌어냅니다.

이런 점이 매우 와 닿았지만, 한편으론 현이 작가의 여리고 독특한 내면이 괜찮을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즌 2에서 작가의 우울증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를 만났을 때는 오히려

안심되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우울을 그대로 마주하면서 그간 겪어온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작품을 읽어온 독자들과 함께 걷는 큰 걸음으로 느껴졌습니다.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시즌 2의 에피소드 49화, 50화(‘안녕, 우울증’ 1, 2편)는 밀레니얼 세대가

겪는 우울증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이자 수기입니다. 20~30대 여성들이 겪는 우울증과 자존감의

문제를 이렇게 피부에 와 닿게, 그리고 살아있는 말로 표현하는 콘텐츠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특히

친구와의 대화나 작가의 내레이션으로 쏟아내는 말은 우울증이 우리를 갉아먹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해 전달합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마음의 공장은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있었는데 나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와 같은 독백. “모르겠어요, 언제나 아무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은 것 같아요. 슬프고 너무 외로워요. 제가 멍청해서 그런가 봐요. 별것도 아닌 것에

소심하고 잘하는 것도 없고. 지금 하고 있는 직장도 사람들도 다 떠날 거예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라는 대사.“하기 싫어 아무것도. 잠만 자고 싶고 모두가 나를 몰랐으면 좋겠어. 누구도 내게

상처를 주려고 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상처받아. 상처받으면 나는 너무 아파라는 대사.

그런 남은 나를 걱정하거나 한심하다고 귀찮다고 짜증 난다고 욕하겠지. 그런 그들에게는 업이 쌓이겠지,

그러니까 난 쓸모없어와 같은 대사. 작가는 고질적인 우울증을 떨쳐내기 위해 여러 가지 행동을 합니다.

이를테면 자신을 칭찬하기, 정신과 의원 방문하기, 자기개발서 읽기, 동영상 강의 찾아보기, 많이 걷기,

일기 쓰기, 감정 바라보기 등을 하는데, 이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우울증의 발병 원인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개인의 기질적 민감성이나 취약성, 심리적인 요인,

그리고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들이 상호작용하여 우울증을 지속시키고 악화시킵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맞서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으로 삶의 다양한 부분을 돌보아야 하며, 본인 외에 주변과

사회의 지지와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혼자 애쓰던 작가가 자살 생각을 친구에게 털어놓고,

친구와 대화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느낌을 찾아내는 50화의 결말은 의미 있고 감동적입니다.

지긋지긋하게 되살아나는 우울을 조절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과

사회와의 연결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의 경험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편, 제목부터 역설적인 일상툰도 있습니다. 바로 버내노 작가의 <괜찮아yo>입니다. <괜찮아

yo>의 ‘우울이라는 이름의 약탈자’ 에피소드는 재발한 우울증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암 투병과

우울증을 겪어낸 작가한테 다시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자신에게도 큰 충격이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상황에 좌절하지 않고, 과거의 우울감, 자신의 성격과 방어기제, 먹는

약물과 대처법, 주변 친구들의 반응을 담담하게 작품으로 그려냅니다.


작가는 밝고 활발한 이미지의 분위기 메이커이고 한 집안의 장녀입니다. 쿨한 척, 센 척하면서

반장과 과대표를 도맡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많고, 낯을 가리고, 염세적이고, 스트레스에

취약합니다. 그런 내면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의 대비를 고백한 장면은 솔직해서 더 슬픕니다.

작가는 자라면서 자연스레 주어진 위치 때문에 자신의 고민이나 속마음을 잘 말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계기로 약해져 가면우울증(스마일마스크 증후군)에 걸리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것은 사실 많은 맏이, 또는 맏이 역할의 자식들 모습이 아닐까요? 저 또한 비슷한 성격의

장녀로서, 작가의 고백에 마음이 뜨끔할 정도로 공감했습니다.


속내를 친구한테 털어놓았는데 그 친구도 힘든 상황이라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는 이야기, 연인이

이것저것 기분 전환용 활동을 제안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야기는 우울증에

공감하고 돕는 일의 현실적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다행인 것은 작가가 ‘우울증을 완치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로 스스로 부담을 주는 대신 자신만의 즐거움을 통해 우울감을 조절하고 공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점 빼기 기계를 사용하거나 미키 마우스 코스튬을 사는 등 엉뚱하지만 재밌는

경험과 작은 성취를 통해, 작가는 하루하루의 우울을 밀어내고 살아가는 기쁨을 되찾아갑니다.

여기에, 작가의 욕구를 잘 이해하는 연인이 늘 꿈꿔오던 여행을 제안하며 또 한동안의 ‘살아갈

이유’를 선물하는 것으로 에피소드는 끝을 맺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울증을 완벽하게 다스릴 정답이나 한방에 완치시킬 도깨비방망이는 없다는 것,

그리고 치료와 함께 자신의 유치한 욕구와 마음을 알아주고 충족시켜 주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슬그머니 보여줍니다. 열심히 살아온 끝에 우울증이 생겼고 그 또한 삶이듯이, 우울증을 겪고

이겨내는 과정 또한 소중한 삶의 시간이라는 것을요.


‘일상툰’이 우울증에 대한 설득력 있는 보고서인 것은, 솔직하게 그려내는 삶의 모습 속에 삶 본연의

외로움과 고통이 자연스럽게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농담을 하거나, 자신의 약한 면을 유머러스하게 공개합니다. 현이 작가는 ‘지옥 같던 이 세상에

던져져도 나한테 재밌는 상황이 펼쳐진다. 모두가 힘들지만 웃는 건 안 힘들다’고 합니다. 이러한

용기와 스스로를 이해하고 아끼는 마음과 행동이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는 진솔한 공감과 응원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작가들은 웹툰계의 찰리 채플린이 아닐까 싶습니다. 채플린이 그려냈던 사람들의

초상이나 사회의 모습에서도 왠지 모를 슬픔과 아픔이 느껴졌었죠. 채플린은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다시 웃어내면서 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는 말을 남겼죠. 생활

속에서 웃음을 잘 찾아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물리적 또는 심리적 현실에서 웃음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많았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땐 인생에 대해 말하고, 그리고 싶은 것이

많아지겠지요.


심한 우울 상태일 때는 복잡하고 어려운 글을 읽고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일상툰’

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들이 우울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임상에서 우울과 싸우는 의사로서 웹툰 작가들이 이런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인

고통의 이야기를 많이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작가들의 마음 건강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삶의 일부로서의 ‘우울증의 경과와 회복’을 그리는 ‘일상툰’의 항우울 효과에 대해, 더 많은 논의와

적용이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 


안주연 | 정신건강의학과 마인드맨션의원 원장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