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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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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와 오세영()의 젊은 한때. 취재 여행 중



부박한 만화판을 걸어오며 우린 서로 외롭기 짝이 없었다.

나는 너를 만나며 한 길로 꿈을 꾸는 동무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떠오른다. 누구나 자신의 생을 통해 누군가를 만나고 유대하며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오세영은 그런 사람이다. 내 오랜 친구였고 생의 동행자였다. 오세영은 두 해 전에

우리 곁을 떠났다. 나이도 아직은 시퍼랬거니와 특별히 건강이 위태로운 사정이 아니라서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문득, 이 가을에 지난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다시 오세영을 만난다. 두 해 전 오월이었다.

세영의 아내로부터 연락을 받고 차를 몰아 병원으로 달렸다. 세영이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입에

달고 의식불명인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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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이 먼저 와 있고, 뒤이어 김광성이 도착했다. 손을 쥐니 팔뚝이 싸늘했다. 가슴은 불덩어리. 심장 계측기의

그래프가 널뛰기했다. “평소 건강이 실하진 않았지만 큰 탈은 없었어요. 어제 119를 부르더니 병원에 실려 와

의식을 잃었어요. 폐에 물이 찼대요.” 세영 아내의 설명이었다.

 

새벽 4

우리는 세영이를 남겨두고 병원을 나섰다. 광성은 인천으로 가고 재동은 노량진에 내리고 나는 차를 몰아

동부간선도로를 달렸다. 세영이는 아직 혼수상태. 잠을 자듯 호흡이 거칠었다. 저러다 기어이 깨어나기를 빌었다.

 

저녁

후배와 저녁 식사를 하다 세영의 아내로부터 세영이가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 정말로 갔구나.

201655. 저녁 7.

 

오월의 초목이 주변 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즈넉한 용인 평온의 숲. 이곳에서 상례와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어지간한 거리임에도 만화판 동료들이 많이 왔다.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찾아왔다. 후배들이 먼저 와 있었다.

상홍이는 전날부터 밤을 새우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두호 선생이 일찍 다녀가셨다고 한다. 세영아,

네 초상을 바라보니 기가 막히더구나. 젊기 짝이 없는 네가 선배와 선생님들을 두고 먼저 떠나버렸으니.

네 영정 앞에서 절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숨을 헐떡이던 모습이 지나갔다. 입에서 폐로 연결된 숨줄은 굵기만 하더라.

그 순간 너는 귀가 열려 있었을까? 혼수상태에서도 귀는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 텐데.

 

아마도 너는 나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1980년 전후에 만났으니 35년이 넘었다. 부박한 만화판을

걸어오며 우린 서로 외롭기 짝이 없었다. 나는 너를 만나며 한 길로 꿈을 꾸는 동무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을 말하고, 다짐도 같이했다. 부박했음에도 만화판을 사랑했다.

제도권 이력으로 보자면 너나 나나 한 줌도 되지 않는 함량이었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부단했으니,

오로지 만화의 길을 종교처럼 붙잡고 걸어왔다. 너는 우직한 품성으로 영리한 자들이 해내지 못하는 성취를 향해 걷고

걸었고, 때로는 절룩거리며 기어서 왔다. 뒤 끝에 이른 것이 만화의 뼈대인 기초역량이었다. 만화란 그림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야 비로소 내용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것이었다. 네 데생력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로 아시아에선

최고봉이었다. 아시아의 경지라면 세계의 경지일 것이다. 너는 기량을 마스터하며 알맹이를 탐했으니 기능주의를

넘어서 내용의 진정을 좇아 일가를 이룬 장인이었다. 빼어낸 그림 위에 생의 스토리를 보이며 내 만화 여기 있소!” 하였다.

그러던 네가 정작 자신을 다스릴 줄 모르는 바보였을 줄이야. 출판사와 계약을 해도 어물쩍 실책을 저지르고,

자신의 역량으로 남의 이름을 세우기 일쑤고, 약졸들의 일을 돕기도 했던 너였다. 분명 똘똘한 사람은 아니었다.

네 관리에 야무지지 못해서 그 피로에 끌려다니다 스스로 녹아버렸다. 재능을 길러 너를 키워온 것이 시간이지만,

몸을 갉아 먹는 것 또한 지난한 생의 시간이었다.

 

세영아

네가 운구차에 실려 화장장에 도착해 네 마른 육신이 화장구 속으로 옮겨지는 순간 네 딸들의 통곡이 터졌다.

생을 부대끼며 고락을 함께했던 네 아내도 온몸이 기울더라. 화염 속으로 네가 들어가 문이 닫히자 평소 너의

기량을 따르던 정현이가 흔들렸고, 후배들과 동료들이 고개를 떨구었다.

 

두어 시간 뒤

너는 유골로 돌아왔다. 한 무더기의 유해로 분골된 네 몸이 흰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두 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너는 봉안당에 안치되었다. 용인 평온의 숲 공작자리 1-4104. 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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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과 함께 세영이의 원고를 비롯한 유품을 정리하였다. 후일의 추모전들을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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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만화판 친구들끼리 만나는 자리, 세영이는 건강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 옆에 기석이가

다가와 앉으며 세영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세영이는 말이 없었다. 나는 세영이는 갔는데

여기에 있네. 기석이는 세영이가 죽은 것도 모르고 인사를 하네라고 생각했다. 세영이는 멀쩡하고 생생하게

우리 곁에 와 있었다. 꿈에서라도 나타나준 세영이가 고마웠다.

한참을 지나서, 사십구재를 치렀다.

 

오세영의 유품들은 화실로 쓰던 집에 있다. 출판사의 배려로 작가의 생전에 모아진 원고와 유산은 가족의

관리 아래 있게 되었다. 오세영 작가가 살던 집을 오세영 만화의 집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서울의

강북엔 동화 작가 윤극영의 집이 있고, 김수영 문학관이 있다. 한 시대를 지내며 성취해 온 예술가의 유산을

후세대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 문화입국이다. 오세영은 만화가로 자신의 탑을 세우고, 토지를 비롯한 여러 한국 문학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희재 | 만화가. 1980년 만화 <명인>으로 데뷔 후 <골목대장 악동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아이코 악동이> <간판스타> 등을 그렸으며

1988년 바른만화연구회를 결성한 이후 만화 윤리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해왔다. 그리고 오세영의 오랜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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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부자의 그림일기> <고흐와 담배> 한 장면



*<지금, 만화> 제1호~제5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PDF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