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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이방인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샌프란시스코 풍경

기고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이방인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샌프란시스코 풍경


 


글 위근우


 

가야와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첫만남

이질적 존재들의 호기심

돌배 작가의 데뷔작 <샌프란시스코 화랑관>(네이버 완결 웹툰)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개의 단어가 함께 붙어있다. 미국의 도시 샌프란시스코와 한반도의 고대 국가 신라의 호국집단 화랑. 이 낯선 이질감은 제목이자 작품의 무대인 샌프란시스코의 태권도장 화랑관의 첫인상이기도 하다.

첫 화에서 회사를 땡땡이치고 정처 없이 걷던 주인공 가야가 화랑관을 발견하고 “이런 곳에 태권도장이?”라며 호기심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어딘가 도시의 이방인 같은 존재다. 그 역시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한국인이자 이방인으로서, 향수에 시달리던 가야가 화랑관에 이끌린 건 그래서 흥미롭다.

이것은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화인 태권도에 대한 향수나 동질감에 이끌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릴 적 어머니의 반대로 태권도장을 다니지 못했던 가야에게 태권도라는 것은 자신과 화랑관을 이어주는 공통분모가 딱히 아니다. 그에게 태권도는 이 도시만큼 낯설다.

이 첫 만남엔 공통분모로 이어진 안정적인 동질감이 아닌, 이방인 대 이방인으로서, 지금 이곳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들끼리의 호기심이 함께 한다. 그리고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이 호기심이 풀려가는 과정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룬다.






아무 것도 모르는 흰 띠에서 출발하는 가야

이방인과 비이방인 이분법의 해체

검은 띠에 이르는 태권도 품새의 순서를 따라 다섯 번째 에피소드인 ‘태극일장’이 마지막 에피소드인 ‘태극팔장’에 이르는 것처럼,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가야가 흰 띠 초보자로 시작해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는 과정을 느릿한 리듬으로 그려낸다.

당장 기초 체력부터 부족했지만 어느새 점프 스핀킥까지 할 수 있게 된 그는, 마찬가지로 처음엔 영어 실력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회사에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업무에 녹아들며 새로 입사한 신입에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선배로 비치게 된다.

이처럼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가야를 중심으로 정석적으로 성장물의 장르적 문법을 따르지만, 이 성장은 이방인이자 초심자이던 가야가 조금씩 성장해 세상에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그 안에 편입되어 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가야의 생각과 달리,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 같던 화랑관의 여러 사람 역시 각각의 이방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결국엔 이방인과 비이방인의 이분법이 해체되어 가는 것에 가깝다.




가출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돌던 데일 보이어는 마스터 이바노바를 만나 태권도를 수련하기 시작한다
 

동질성의 균열, 삶이 가진 차이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의 설립자가 호신술을 익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미국에 온 이방인 마스터 이바노바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의 사부 역시 먼 러시아 땅에 온 한국인 마스터 리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름 유명한 경찰이고 시민에게도 사랑받았던 현 관장 데일 보이어만 본다면 미처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 이어져 온 화랑관의 계보는 이방인들의 역사였다.

심지어 이 사회에 원래부터 자기 자리를 잡고 어울리며 살던 것처럼 보이던 데일 조차 폴리네시아 혼혈로서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로부터 이질적인 취급을 받았고, 마우이에서 가출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땐 흔한 부랑아였다. 그런 그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사회의 일원으로 무리에 섞이게 해준 것이 이방인 이바노바라는 역설은 균일한 동질성으로 이뤄진 사회와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드러낸다.

조금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각 인물의 과거사에 분량을 할애하는 것을 단순히 인물 설명에 대한 욕심이나 캐릭터에 대한 애정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작가는 각각의 과거사를 통해 지금 비이방인으로 보이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이방인 취급을 당했는지 보여주며 비이방인의 동질적 사회라는 신화에 균열을 낸다.

사범인 지오 역시 바르셀로나에서 태권도를 수련하고 미국에 온 외국인이며, 화랑관의 킥복서 강사이자 태권도 수강생으로서 가야의 첫 수업에 짓궂은 장난을 치던 클라우디오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교회 집사인 아버지에게 의절 당했던 과거가 있다.

꼭 과거로 시간을 돌리지 않더라도 친절하고 걱정 없어 보이던 닥터 스완슨은 딸인 도나의 언어장애 때문에 고민한다. 각각의 삶이 가진 차이에 주목할 때 이방인과 비이방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균열을 일으킨다.

얼핏 이질적으로 보이던 샌프란시스코의 화랑관은 사실 이 세상의 다양한 색채를 이루는 일부이며, 이바노바를 비롯한 수많은 이방인, 그리고 가야 역시 마찬가지다.





점프 스핀킥을 성공하는 가야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과 그의 성장을 볼 수 있다

서로를 알아가며 공통적인 인간성의 공유
가야가 한 명의 무도인으로서 또 외국인 노동자로서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과정은 그래서 도장과 회사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온전히 자신으로 사는 법을 배워가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세상의 인정은 부수적인 것이다.

여기엔 누구에게나 흰 띠였던 시절이 있었으며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동질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함께 한다. 흰 띠가 검은 띠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다양한 색깔의 띠가 존재하며 그것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태권도를 소재로 한 이 성장 만화가 개인의 수련 이상으로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한 건 그래서다. 서로를 알아가며 다양한 차이를 인식하고 긍정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공통적인 인간성의 공유를 확인할 수 있다. 가야가 다른 이들의 삶을 알아가는 것처럼, ‘죽비원정대’ 에피소드에서 화랑관의 사람들도 가야가 성장한 문화를 보고 그를 한층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차이’야 말로 ‘본질’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일 수 있고 그렇게 나 자신이 된 사람들끼리 비로소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누구 하나 악인이 없고 사이좋은 화랑관의 풍경이 너무 낙관적이지 않나 싶으면서도 ‘다양한 삶의 형태를 긍정하는 방식으로만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작품의 관점엔 그래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성실한 성장물은 좋은 힐링물이 될 수밖에 없다. 가야의 마지막 태극팔장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이유다.






위근우 <드래곤볼>과 <북두신권>을 보면 문제아가 될 거라는 어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만화책을 보며 그럭저럭 멀쩡하게 성장했다. 동네 글 좀 쓰는 형으로 지내다가 웹매거진 <아이즈>(링크) 취재팀장으로 활동했다.
 

YOUR MANAⒸ위근우


네이버 완결 웹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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