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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어떻게 ‘나’를 드러냈을까?③

박인하의 만화스토리 히스토리③



만화는 어떻게 ‘나’를 드러냈을까?

자유주의적 이상을 지키는 영웅, 슈퍼맨

 

박인하






 

1938년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한 슈퍼맨은 초인적 능력을 자유주의적 이상을 가로막는 적들을 물리치는 데 사용했다.

 


 

만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장르가 발전해 정점에 오른 시점에서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작가들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나를 드러낼 때 만화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만화는 어떻게 ‘나’를 드러냈을까?

근대만화의 시작점에서 다시 살펴보고, 이후 만화역사를 따라 올라가 본다. <만화는 어떻게 ‘나’를 드러냈을까?’ 세 번째 이야기.  

 

 

필립 프랜시스 놀란(Philip Francis Nowlan)은 1928년 펄프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Amazing Stories)』에 첫 중편소설 <아마겟돈 서기2419년(Armageddon 2419 A.D.)>을 발표하고 다음 해 <한 에어로드(The Airloads of Han)>를 발표한다.

1929년 1월 펄프소설의 두 영웅이 만화로 데뷔했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가 1912년에 발표한 모험소설 <타잔(tarzan of the apes)>을 할 포스터(Hal Foster)가 만화로 그려 연재를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500년 뒤에 깨어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안토니 로저스다. 내셔널 뉴스페이퍼 서비스 신디케이트(National Newspaper Service syndicate)의 존 F. 딜(John F. Dille)은 미래 세계에서 광선 총을 들고 싸우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만화로 재탄생시키기로 했다.

자신의 회사에서 근무하는 리처드 딕 칼킨스(Richard Dick Calkins)에게 작화를 맡겨 1929년 1월 <벅 로저스(Buck Rogers)> 연재를 시작한다(이름만 앤서니 로저스에서 벅 로저스로 개명한다).


 

원숭이와 함께 자란 정글의 영웅 타잔, 500년 뒤 미래 우주에서 활약하는 벅 로저스를 시작으로 강한 남성 영웅들이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대거 길거리에 나왔다. 싸구려 만화책의 영웅들이 보여주는 액션과 모험은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펄프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온 모험 영웅들이 만화에 등장한 그 해 초여름부터 미국 경제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 증시가 폭락하고,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공장과 은행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미국인들은 일자리를 구하거나, 아니면 빵을 얻거나, 예금을 찾기 위해서라도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처참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노동자들을 위로한 건 가판에서 10센트에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영웅들의 모험담이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서 서서 기다리는 거 무료 배급식 줄인가요? 은행 줄인가요?”(January 1931, Chester Garde)

 

시카고의 갱들을 물리치는 ‘딕 트레이시’(1931),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우주 영웅 ‘플래시 고든’(1934), 작은 총 하나로 문제를 해결하는 ‘비밀 요원 X-9’(1934), 마술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마술사 맨드레이크’(1934), 보물 지도를 들고 중국으로 모험을 떠나는 ‘테리’(1934)와 같은 영웅들이 대거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악을 소탕하는 속 시원한 액션과 이국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모험은 빵을 얻거나, 문을 닫은 은행에 맡겨 놓은 돈을 찾기 위해 줄을 서야 했던 미국인들의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저렴한 위안이었다.

1932년 12월에 새로 선출된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망가진 금융체계를 재편하는 일에 먼저 나섰고 뉴딜정책이 시작된다. 루즈벨트 정부는 1933년 3월부터 적극적으로 경기부양정책에 나선다. 나라의 간섭이 없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이전 정부의 보수주의적 정책과 완전히 상반된 자유주의 정책이었다.

농산물과 제조업의 과잉생산을 규제했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행해 일자리를 제공했다. 또한, 노동자의 단결권과 임금교섭권을 보장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New Deal Liberalism)’ 정책은 구렁텅이에 빠진 미국 경제를 조금씩 살려내기 시작했다. 정책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GNP가 대공황 이전으로 회복되었고, 60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


 

리 포크(Lee Falk)의 스토리를, 레이 무어(Ray Moore)가 작화를 담당한  <팬텀>.
 

 

경제가 눈에 띄게 회복된 1937년 2월 17일 타이트한 전신 의상을 처음으로 입은 영웅 팬텀(The Phantom)이 등장했다.

초인적인 힘은 없었지만, 아프리카의 가상 국가 방갈라(Bangalla)를 지키는 팬텀이 보여준 독특한 설정은 이후 등장할 영웅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근육질 몸매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의상과 신분을 감추는 여러 장치, 비밀스러운 조력자들과 정의를 수호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분위기까지 말이다.
 
1935년 2월 말콤 윌러 니콜슨(Malcolm Wheeler-Nicholson)이 설립한 내셔널 앨라이드 출판사(National Allied Publications, 현 DC코믹스의 전신)에서 연재만화를 모은 만화책이 아닌 새로운 만화를 수록한 만화잡지 <뉴 펀 #1(New Fun: The Big Comic Magazine #1)>을 최초로 출간한다.
 
그리고 1937년 3월 <탐정만화 #1(Detective Comics #1)>를 출간하고, 1938년 6월 <액션 만화 #1(Action Comics #1)>를 출간한다. <액션 만화> 1호에는 제리 시절(Jerry Siegel)과 조 슈스터(Joe Shuster)의 <슈퍼맨(Superman)>이 <탐정 만화 #27>(1939년 5월)에는 밥 케인(Bob Kane)의 <배트맨(Batman)>이 연재된다.


 

내셔널 앨라이드 출판사(DC의 전신)는 1938년 6월 새로운 만화잡지 <액션 만화 #1>를 출간한다. 이 만화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영웅 ‘슈퍼맨’이 등장한다. <탐정 만화 #27>에는 <슈퍼맨>에 대항할 어둠의 기사 <배트맨>이 등장한다.

 

 

1938년 등장한 새로운 영웅 슈퍼맨은 이전 영웅들을 계승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마술사 맨드레이크가 차를 들어 올리는 건 최면 효과에 의한 것이었지만, 슈퍼맨이 차를 들어 올리는 건 속임수가 아니었다.
 
젊은 작가 제리와 조는 루즈벨트가 보여준 미국을 구원한 자유주의적 이상과 정의를 만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슈퍼맨>을 영화로 본 사람들은 슈퍼맨이 주로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들과 싸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이상이 지배할 1938년에는 가정 폭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 탐욕스러운 자본가들, 부패한 공무원들, 사회정의를 가로막는 도박사를 응징했다. 많은 대중의 마음에 자유주의의 이상을 수호할 믿음직한 캐릭터가 되었다.
 
반면, 1939년 등장한 배트맨은 어둠에 숨어 범죄자들과 맞서 싸우는 자경단이었다. 슈퍼맨처럼 자유주의 이상을 수호할 생각이 없었다. 부모가 물려준 저택에서 살며, 다양한 신기술 무기를 활용한 배트맨은 단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범죄자들과 싸운다. 슈퍼맨은 황량한 서부의 도시에 몰려든 악당들과 맞서 싸운 ‘카우보이’에 가까웠고, 배트맨은 ‘어둠의 기사’에 가까웠다.


 

만화잡지 <탐정 만화> #27에 처음 등장한 <배트맨>. 초인적 능력을 지닌 슈퍼맨과 달리 자신을 단련해 악당들과 싸운다. 


 

대공황기에는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호쾌한 모험에 나서거나, 도시의 갱들을 소탕하던 영웅들은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애국주의 영웅으로 변신한다. 애국주의 영웅이 노린 독자들은 어린이들이었다(만화를 볼 젊은 남자들은 참전하거나 공장에서 일했다). 애국주의 영웅은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로 대표되는 악당들과 맞서며 유치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주인공은 1941년 타임리 코믹스에서 펴낸 조 사이먼(Joe Simon)과 잭 커비(Jack Kirby)의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다. 미군이 전쟁에 참전한 후 등장한 이 영웅은 이름부터 ‘아메리카’였고, 옷에도 성조기 문양이 선명했다.

그냥 보기에도 애국심으로 무장한 ‘캡틴 아메리카’는 첫 등장부터 적이 쏘는 총알을 방패로 막으며, 히틀러의 턱에 주먹을 꽂았다. (<캡틴 아메리카> 창간호 표지)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새로운 영웅은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성조기를 휘날렸다. 


 

<캡틴 아메리카 #1> 표지

 
 

전쟁이 끝나고 어른들이 돌아왔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들은 타이트한 의상을 입고 망토를 휘날리거나, 트렌치코트를 입고 범죄자들과 싸우는 영웅의 활약에 환호할 수 없었다.

그들은 참혹한 고통을, 죽음을 아는 몸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어른들은 가난을 위로해 주던 영웅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1950년대 대표 출판사인 EC에서 출간된 공포만화들

 
 

1940년대 후반 어른들이 더 이상 만화를 안 보게 되자 출판사들은 1930년대 연재만화에 ‘모험’과 ‘영웅’이란 새로운 자양분을 준 펄프소설에 눈을 돌렸다. 웨스턴, 추리, 하드보일드, 전쟁, SF, 호러처럼 펄프소설에서 인기를 끈 장르들을 만화로 제작했다.

여러 장르 중에서 잔혹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트라우마를 입은 독자들을 가학적으로 위로한 범죄/호러 장르가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트루 크라임 코믹스(True Crime Comics)>(매거진 빌리지, 1947)나 <머더 인코퍼레이티드(Murder Incorporated)>(폭스, 1948) 같은 만화잡지는 제목처럼 범죄와 살해 장면을 주저 없이 묘사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며 호러 만화는 더욱 잔인해졌다. 뇌를 꺼내고, 목을 베고, 내장을 꺼내고, 눈알을 파내는 섬뜩한 장면이 묘사되었다.

전쟁에서 생긴 트라우마는 정신을 옭아맨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 그러니까 참혹한 비극을 목격한 이들이 지닌 정신적 상처는 고백하거나, 회피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다. 전쟁 후 미국에서 등장해 큰 인기를 끈 과격한 호러 만화도 아마 전쟁의 트라우마를 지우는 방식 중 하나였을 터이다.


 

전미만화잡지협회(CMAA)의 수장이 된 뉴욕시 판사 찰스 F. 머피(Charles F. Murphy)와 심의규약은 코믹스 코드가 적용되기 이전과 후.
 
 

하지만 1950년대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의 미국 사회는 새로운 공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1950년대 호러 만화는 시대와 마주한 예술가들의 고민과 함께 자극적인 상업화 요인들이 공존했다.

결국, 만화는 1954년 이후 청소년들을 타락시킨 주범이 되어 검열이라는 속죄의 재단에 올라야 했다. 만화는 20세기 50년 동안 바보와 악동에서 부르주아 영웅으로, 다양한 모험 영웅에서 자유주의적 이상을 수호하는 영웅과 자경단을 거쳐 마침내 전쟁영웅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가장 처참한 트라우마를 지닌 이들을 위로하다가 결국 시대의 번제로 재단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 빈 자리에 새로운 싹이 텄다. 1960년대 만화는 새로운 싹으로 ‘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인하 20년간 만화를 연구해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만화 평론가이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이다. 저서로 <만화를 위한 책>, <누가 캔디를 모함 했나>, <박인하의 즐거운 만화가게>, <박인하의 아니메 미학에세이>, <골방에서 만난 천국>, <만화공화국> 등이 있다.

 

YOUR MANAⓒ박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