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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아레테(ἀρετή) <아 지갑놓고나왔다>를 우회하여

기고
 
 

비평과 아레테(ἀρετή)
<아 지갑놓고나왔다>를 우회하여

 
 

문er

 
 

아레테가 있는 만화?
 
웹툰 <아 지갑놓고나왔다>(이하 <아지갑>)의 유어마나 필진 평점을 보자. 별 세 개(6점)를 준 필진이 네 명, 별 세 개 반(7점)을 준 필진이 두 명이다. 평균 6.33.

이 점수는 작품의 무엇에 대한 평가일까? 별점과 짝을 이룬 100자평을 보면 대략을 추측할 수 있다. 표현(력), 서사, 작화, 전형성 등의 어휘와 함께 ‘좋음’, ‘장점’, ‘아쉬움’, ‘한계’, ‘돋보임’ 등을 논한다. 이를 작품 전체와 부분의 탁월성에 대한 평가라 요약한다면, 무척 고전적인 그리스어 개념을 하나 떠올릴 수 있다.
 
‘아레테(ἀρετή)’는 흔히 덕(德)으로 번역되는 말이지만, 한자문화권의 ‘덕’ 개념과는 적용 범주에서 차이가 있다. ‘덕’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나 ‘아레테’는 사물에게도 쓰인다. 덕이 인간에게 적용되는 윤리적·도덕적 함의를 지닌다면, 아레테는 사물에게 적용되는 윤리적·도덕적 함의(가장 옳은 것)를 지닌다. 이는 곧 그 사물의 본질(적 기능)과 관련된 미덕이다.
 
모든 것에는 그것의 고유한 아레테가 있어서, 굴뚝이든 황소든 사람이든 그 고유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어야만 인정받는다. 예를 들어 어느 악기가 정확하고 아름다운 음을 낸다면, 그것에는 아레테가 있다.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악사 역시도 아레테가 있는 악사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체의 아레테로 ‘건강’, ‘미’, ‘강함’, ‘크기’ 등을 들었으며, 운동 경기에서의 신체의 아레테는 더 세분해서 논했다(Aristotle, trans. by W. Rhys Roberts, Rhetoric I 의 제 5장을 참조. 아레테가 ‘excellence’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에 주의(링크)).

그렇다면 어떤 만화가 아레테가 있는 만화일까? 아니, 다시 묻자. 지금 ‘만화의 아레테’란 어떻게 말해지는가?
 
 

<아 지갑놓고 나왔다>의 아레테
 
만약 내게 <아지갑>이 지닌 만화로서의 아레테를 논하라 한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어 이 작품에 아레테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선 형식미. 오혁진을 비롯한 평자들이 잘 지적했듯 붓 선이나 타이포그래피는 이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를 썩 잘 드러낸다.

죽은 딸 노루와 살아 있는 엄마 노선희의 이야기(side)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방식도 매끄럽고 다채로운 전개를 만들어낸다. 더불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말풍선 형태다.

대한제국 시기의 만화 ‘삽화’(1909)(서은영도 이도영의 ‘삽화’와의 유사성을 짚으며, 이 작품의 말풍선에 대해 논한 바 있다. 선으로 처리한 말풍선이 동양화다운 화풍에 더 잘 어울린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서은영, ‘수묵화의 농담(濃淡)으로 빚어낸 낯섦의 미학 - <아 지갑놓고나왔다>’, 디지털만화규장각 파워 리뷰. 2016.11.04 (링크))와 사뭇 유사한 한 가닥 선으로 화자와 그의 말을 이어두고 있다.
 
<아지갑>은 그 쓰임을 진화시켰다고 할 만하다. 투 샷 대화를 교차된 선으로 처리할 수 있기에 한 칸의 공간 활용에서 구도의 제약이 줄어들며 주고받는 대화의 느낌도 더 선명하다. 또한 기존 말풍선의 다양한 형태를 활용하지 않고 대사와 생각만을 폰트 음영으로 구별하기 때문에 글과 표정을 통해 감정선을 읽어내야 하는 독자의 수고로움이 발생한다는 점도, 독자의 적극적 읽기를 끌어내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심리와 인격의 다면성을 적실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지갑>은 애정과 같은 심리를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애정은 증오로, 배려는 거리감으로, 관계 맺음의 노력은 폭력으로 곧잘 전화된다는 것이 이 작품이 줄곧 드러내는 이해다.
 
“걔 말고는 아무도 없어. 사랑하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없어. /제일 사랑하니까... 제일 씨발년이야.”(3부 9-2)나 “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밉고 짜증 나고 답답하거든. /바보 같고, 집착 덩어리고, 정신 나갔고, 나만 고생시키고!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3부 11-1<7>)과 같은 대사들은 보자.
 
대상에 대해 갖는 감정이 일의적일 수 없다는 진실을 적확하게 전달한다. 이는 한 인물의 인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두 주인공에게서 뿐만 아니라, 친족만을 아끼는 박제현이나 착해빠진 태공망의 인물됨이 자아내는 부정적 결과까지 조명하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적확한 인간 이해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레테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반대로 아레테가 없다거나 부족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작품 속 백조 머리 허상처럼, 등장인물과 작가의 인형 놀이처럼 보일 때가 있고, 풀어놓는 과도한 설명도 아쉽다”는 손지상의 100자평에는 나도 동의한다. 무엇보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명확하지 않게 편의적으로 채택되고 있어서 설명-서술이 누구의 것인지 파악하기 모호한 경우 특히 그렇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말투가 주어져야지 싶어요.”라는 DCDC의 100자평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으나 나옴 직한 평가다. <아지갑> 특유의 말풍선도 과도하게 많은 투 샷 연출의 단조로움과 함께 조명한다면 그 유용성이 한계로 드러나는 지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아레테의 있음과 없음에 대한 지적은 가감법으로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낳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 마치 작가의 인형 같은, ‘노루’의 어린이답지 않은 말투와 성격이야말로 <아지갑>만의 독특한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한 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비평이 작품의 탁월한 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며 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잘된 것에 몇 점, 못된 것에 몇 점을 부여하는 방식의 채점은 있을 수 없다. 필진 평점이 그런 식으로 나왔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평과 아레테와 평점
 
<아지갑>과 아레테를 논했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아레테의 유무로 작품을 비평할 뿐만 아니라 점수까지 매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지갑>에 주어진 6.33이라는 점수는, 각 사물의 이데아(ἰδέα)야말로 최고선의 아레테를 지닌 것이라는 플라톤적 이해에 따라 10점 만점에서 출발해 개별 작품을 조망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물론 앞서 말했듯 아레테란 해당 사물이 응당 그러해야 할 무엇, 즉 본질적 기능의 문제에 집중하는 개념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한 신체의 아레테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그 당시의 시대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의밋값을 지니는 가치다.
 
지금 이 시기 만화의 아레테를 규정하는 일만 해도 논쟁적일 것이며, 그런 만큼 평자마다 생각하는 ‘만화의 본질적 기능에 따른 탁월성’도 편차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필진 평점 시스템은 사물에 내재한 아레테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취향과 호오를 편파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 편파성이 명시적으로 강조된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나, ‘만화비평 전문웹진’이라는 ‘비평’의 이름으로 작품에 대한 ‘좋음’, ‘장점’, ‘아쉬움’, ‘한계’, ‘돋보임’을 점수와 함께 논할 때 의미는 사뭇 다르다. 마치 만화의 아레테가 자명하게 존재하며 이데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셀프 객관화하는 체제로서, 자기 시각을 보편화하는 시도로써 필진 평점은 존재하는 것만 같다. 달리 보면 만화에 점수를 매기는 존재로 비평가를 위치 짓는 것이기도 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논점을 짚자. 나는 비평의 이데아를 믿지 않는다.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있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싫어하는 작품이 있는 것처럼, 비평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주 동의하는 비평부터 썩 동의하기 어려운 비평까지,
 
배울 것이 많은 비평부터 적은 비평까지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개별 비평은 존재한다. 나는 오혁진의 <아지갑>에 대한 비평 ‘어머니라는 욕망, 딸이라는 욕망’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 역시 있다. 그러니 7점.
 
 
 
 
한편, <아지갑>을 여성주의의 시선에서 잘 짚어낸 조경숙의 글(조경숙, <만화로 본 세상> ‘아 지갑놓고나왔다’-사회적 편견과 자책으로부터 내 자신 찾기. <주간경향> (링크)) 덕에 이 글이 여성주의적 해석을 또 한 번 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 글은 8점. 이렇게 점수를 매긴다면? 아무리 구체적인 근거를 댄다 하더라도, 이 점수를 매개로 두 비평은 비교 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리고 우열이 생겨난다.
 
만약 개별 만화에 대해 비교와 우열이 생겨나길 바라는 것이라면, 가장 선의로 이해할 때 그것은 더 ‘좋은 작품’들이 더 널리 인정받기를 바라는 욕망과 관계있을 것이다.
반대로 더 ‘나쁜 작품’들이 덜 읽히길 바라는 욕망이기도 할 테고. ‘좋은 작품’을 ‘내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나쁜 작품’을 ‘내가 싫어하는 작품’으로 치환한다면 내게도 같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욕망은 자기애의 확장일지 모른다는 경계심 역시 있다. 오히려 타인의 비평을 통해 내 감상/평가가 바뀌고 깊어지는 것을 더욱 욕망하며, 또 여러 날카로운 비평/의견들에 의해 작가들이 다음 작품에 더 많은 고민을 쏟아주길 욕망한다. 그런 만큼 내게 있는 가장 큰 욕망은, 독자이자 ((비)전문적) 비평가로서의 ‘나’와 ‘우리’의 아레테(이를 ‘지금-여기’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논하는 데는 다른 글 한 편이 더 필요할 것이다.)를 함양하는 것이다.
 
그런 내 욕망으로부터 바라볼 때 유어마나의 긴 글과 기고문, 인터뷰는 모두 그 아레테의 함양에 도움이 된다. 작품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그 평가를 가능하게 하고 독자와 작품의 만남을 더 풍요롭게 하는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로서만이 아닌 만화를 둘러싼 문화의 끊임없는 지양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유어마나는 그에 값하는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필진 평점만 빼고. 그것은 <아지갑>의 대사를 빌어 말하자면, 비평이라기보다는 자기애에 가까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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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part2(제42수)의 일반적인 말풍선과 투 샷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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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갑놓고나왔다>(1부 3-1)의 독특한 말풍선과 투 샷 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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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갑놓고나왔다>(2부 8-1)의 말풍선과 투 샷 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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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사랑)와 가위(증오)가 중첩되어 표현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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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감정도 대상도 일의적이지 않다.



 

문er(조익상) 국문과 대학원생, 조교, 시간강사, 고양이 집사 등등의 정체성을 오가는 일개 닝겐. 2010년에 ‘만화로 사회를 논해보고 싶다’며 (지금은 사라진) 만화잡지 에서 문er라는 필명으로 만화 비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만화평론가’ 타이틀도 걸고 산다. 이런저런 잡지 및 만화 매체에 가물에 콩 나듯 글을 기고해 왔고, 2015년부터는 <주간경향> '만화로 본 세상'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금과옥조로 삼는 말은 “Keep calm and do your Magalm.”

 

YOUR MANAⒸ문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