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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큐> vs. 애니 <하이큐>

기고
 

만화 <하이큐> vs. 애니 <하이큐>
“중년 ‘애니충’이 되고 말았네.”
 

 

이영희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만화 <하이큐>

 
 
 
“중년 ‘애니충’이 되고 말았네.”

죄송, 농담이다. 이 ‘애니충’이란 표현은. 오랜만에 만나 후배가 “작년 말부터 뉴스랑 시사프로만 주구장창(표준어는 주야장천) 보고 있어. 박 모 대통령 덕분에 ‘시사충’이 되었네.”라며 웃기에 “어? 그럼 나는 요즘 애니충.”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사정을 말하자면 이렇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화책 vs 애니메이션’의 대결에서 늘 만화책 쪽에 한 표를 던져왔다. <슬램덩크>도 <원피스>도 애니메이션보단 종이 만화로 읽을 때가 더 재밌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만화를 보며 내가 상상했던 움직임과는 다른 모습이 애니메이션 속에서 펼쳐질 때, 묘한 이질감과 배신감을 극복하기 힘들었다고 할까.
 
 

왜 만화 ‘하이큐’보다 애니 ‘하이큐’ 쪽이 더 재밌게 느껴졌을까?
 
(지드래곤 씨는 아니지만) ‘그런 내가’ 애니메이션에 빠졌다. <하이큐>라는 작품 때문이다. 몇 년 전 대원씨아이에서 발간되기 시작한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만화를 읽었을 때 ‘음, 캐릭터가 생생하군. 그런데 난 배구에 별로 흥미가 없어서.’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런데 누군가 <하이큐> 애니판이 매우 훌륭하단 이야길 했고, 어느 한가한 주말 IPTV에서 제목을 검색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럴 수가, 너무 재밌잖아. 그리고는 1시즌 25편, 2시즌 25편, 3시즌 10편으로 구성된 애니 시리즈를 연초부터 지금까지 주구장창(다시, 표준어는 주야장천) 돌려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애니메이션 <하이큐> 

 
이 만화는 한때 전국대회 우승까지 노릴 정도의 강호였지만, 몇 년 사이 그저 그런 수준의 팀으로 전락해버린 일본 미야기 현의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 이야기다.

주인공인 1학년 히나타는 키가 164cm밖에 안 되지만, 초등학교 때 TV에서 본 카라스노 배구부의 에이스 ‘작은 거인’을 동경해 배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나간 현 대회에서 중학 배구부 최강인 키타가와 다이이치 중학교의 세터 카게야마를 만난다. 이 시합에서 무참히 패한 히나타는 설욕을 다짐하며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에 들어오는데 이게 웬일, 체육관에서 그 카게야마와 딱 마주친다.
 
<하이큐>는 스포츠 만화의 다양한 재미 요소를 알뜰하게 갖췄다. '선수가 공을 잡는 것도, 한 사람이 연속으로 두 번 공에 접촉하는 것도 반칙'인 배구라는 구기는 일단 팀워크를 강조하는 스토리에 적격이다. 개성이 뚜렷한 주인공은 물론이고, 소소하지만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는 주변 인물도 적절하게 배치돼 있다. 무엇보다 이 만화는 ‘도전’과 ‘성장’이란 뻔한 주제를 꽤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시즌 3에 이르는 동안 카라스노 배구부는 도전하고, 한계에 부딪히고, 문제점을 파악해 그것을 보완하고, 줄기찬 연습을 통해 극복해낸다. 혹은 그것을 이뤄내지 못한, 수년간 배구선수로 뛰었으면서도 예선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시합에서 패해 쓸쓸히 코트를 떠나야하는 아이들의 회한과 눈물까지 포근하게 보듬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내가 있으면 너는 완벽해져!” 등, 서른 넘어가면 좀처럼 듣기 힘든 오글오글한 대사들에 모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것도 사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왜 만화 <하이큐>보다 애니 <하이큐> 쪽이 더 재밌게 느껴졌을까 생각해본다. 그 ‘이야기’에 빠진 팬에게 애니가 더 많은 즐길 거리를 선물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배구라는 종목의 룰을 자세히 모르는 나 같은 독자의 경우, 애니 쪽이 훨씬 선수 하나하나의 움직임이나 경기의 흐름을 이해하기 쉬웠다. 예상치 못했던 재미도 있었다.

다테공고라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숙적 학교가 있는데 이 팀의 응원 구호를 한번 들은 순간, 계속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고고! 레츠 고! 레츠 고! 다테고!” 오, 마성의 외침이로다. 급기야는 시즌 3에서 카라스노와 대결하는 미야기현 배구 최강 시라토리자와 고등학교의 교가까지 외워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웅장한 센다이성, 영광의 시라토리자와 학원~.”
 




<하이큐>는 스포츠 만화의 다양한 재미요소를 알뜰하게 갖췄다. 만화 <하이큐>의 한 장면.
 


 

‘이야기’에 빠진 팬에게 애니는 더 많은 즐길 거리를 선물한다. 애니 <하이큐>의 장면들.
 


 

고독한 행위인 만화 ‘읽기’에서 함께 ‘노는’ 애니의 세계로
 
이번 경험을 통해 그동안 잘 몰랐던 애니메이션 ‘응원 관람’ 문화에도 눈을 뜨게 됐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이나 극중 삽입곡을 따라 부르며 애니를 즐기는 것. 3년 전 개봉한 디즈니의 <겨울왕국>은 주제곡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관객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며 영화를 보는 ‘싱어롱(sing a long)’ 상영회를 따로 열었다.
 
노래만으론 심심한가. 피겨스케이팅 아이돌 그룹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애니메이션 <꿈의 라이브 프리즘스톤>의 극장판 <킹 오브 프리즘> 개봉 당시엔 야광봉 응원이 화제가 됐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상영 당시 팬들이 야광봉을 하나씩 들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유튜브에서 당시 영상을 확인해보니 관객들은 실제 아이돌 그룹의 공연장에 온 것처럼 야광봉을 흔들고 괴성을 지르며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자,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라는 화면 속 주인공의 느끼한 대사에 관객들이 한목소리로 화답한다. “뭔데~?”
 
올해 초 한국에서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상영 당시, 주제곡을 따라 부르거나 대사를 큰 소리로 외쳐 주변 관객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열성팬들이 발견되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혼모노(本物, '진짜' 라는 뜻의 일본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물론 ‘진짜 희한한 애들이네’라는 비아냥이 담긴 단어다.
 
그러나 ‘혼모노’ 현상은 한 작품에 깊이 빠져든 이들이 오감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신선한 문화라고 옹호하고프다. 필자가 <하이큐>에 ‘입덕’하기 직전인 지난 1월, <하이큐> 극장판이 한국에서 개봉했다. 당시 ‘응원 상영’ 행사에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팀별로 나눠 앉아 실제 배구 경기를 보듯 소리 높여 환호하며 영화를 봤다고 한다. 오,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만으로도 뿌듯하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인 만화 ‘읽기’에서 몸과 맘을 함께 불사르며 ‘노는’ 애니의 세계로 이제 막 들어선 이의 바람은 이제 한국 만화로 옮겨간다. 웹툰이라는 시대에 적합한 형식을 입은 한국 만화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놀랍게 커 나가는 중이다. 인기 있는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는 일은 이제 뉴스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해졌는데, 그 중간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이나 소수의 열성 팬들만 좋아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공고하고, 여러 이유들로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으며, 그렇다 할 성공사례도 없다는 것이 이유로 꼽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도 <신의 탑>도 <좋아하면 울리는>도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다. 모니터로 원작 만화를 볼 땐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재미를 애니메이션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더 다채롭게 즐기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글이 길어졌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일까. <하이큐> 재밌어요. 혹시 애니메이션을 안 본 분이 있다면 꼭 챙겨보시길. 그리고 다음엔 함께 응원가를 부르며 만나도록 해요.

 
 

 

 

이영희
만화애호가. 중앙선데이에서 문화 관련 기사를 쓴다.
만화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아 《어쩌다 어른》이란 에세이집을 냈다.
 
 

  
YOUR MANAⓒ이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