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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울리는>, 진화하는 로맨스

기고

좋아하면 울리는
진화하는 로맨스



 

 이진

 
순정 만화의 힘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평범한 여자가 자신보다 지체가 높거나 반대로 낮거나 여하간 원만한 연인 사이를 이룰 수 없는 핸디캡을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멋진 남자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다. 이런 순정 만화의 장르 공식은 근간에는 ‘로맨스’로 불리며 매체를 넘나드는 유구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로맨스이되 이성애 로맨스로 한정한다는 점, 남성을 통한 여성의 신분 상승이 장르 공식의 주요 소재라는 점을 보자. 21세기에 맞지 않는 이런 불공정한 요소들을 비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개별 작품을 장르 내부 시점을 포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인 본 칼럼에서는 미루어 둔다.

인기 창작물은 당대 사회 인식 수준의 또렷한 반영이다. 그러니 세계 최고 성차별 지수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로맨스물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히트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천계영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은 순정 만화(이하 로맨스) 장르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천애 고아 여주인공이 엄친아 나쁜 남자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어린 시절부터 엄친아를 보좌해 온 착한 남자는 주인공을 몰래 짝사랑한다. 여기에 주인공을 질투하고 방해하는 못된 여자가 숙명의 악역으로 가세한다. 가족 관계에 얽힌 어두운 비밀, 한 여자를 놓고 대결하는 남자들 등 히트 로맨스의 클리셰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수없이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운명적인 첫 만남.

 
 
 

‘밀당’이 없는 로맨스, ‘장애물’이 일절 없는 로맨스에서 어떤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울리는’은 계급 차나 출생의 비밀과 같은 정통 로맨스 소재들을 ‘좋알람 어플리케이션’이라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로맨스 장르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은 불공정하게도, 불공정함 그 자체다. 계급 낙차로 대변되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권력 차는 로맨스가 제공하는 장르적 쾌감의 핵심이다.


데이팅 어플의 최종 진화 프로그램인 ‘좋알람’은 <좋아하면 울리는>의 스토리의 핵심을 이루는 소재다. 10미터 반경을 드나드는 이용자의 감정을 측정해 나에게 마음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익명으로 알려 준다.

로맨스 서사의 동력원이 좋알람 어플이라는 비인격 매체로 대체된 덕분에, <좋아하면 울리는>의 주인공들은 로맨스 클리셰 너머로 진화해 나갈 여유를 얻는다.

 


주변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어플 '좋알람'. 오해와 로맨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설정은 지극히 전형적이지만 그들의 전형성은 세밀한 표현과 대사로, 설정 안에서 납작해지지 않는 생명력을 얻는다. 천애 고아에 가난한 친척 집에 얹혀살며 구박을 받는다는 캔디형 설정의 여주인공 조조는 불행하지만 착하고, 당차며 똑똑하기까지 하다.

그런 한 편 조조의 ‘착함’은 더부살이 특유의 눈치이며, ‘당참’은 자존심 혹은 자격지심이다. ‘똑똑함’은 소위 여자의 지혜로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중 내내 조조의 행보는 정치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치밀하다.

조조의 가장 큰 자질은 똑똑함의 연장선상에 있는,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다. 역사물이나 판타지 등 문자 그대로의 정치적 책략이나 궁중 암투, 복수극 등이 전면적으로 나오는 작품이 아닌, 현대 배경의 로맨스물에서 조조만큼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여주인공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성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전형적인' 주인공, 조조.

 
 

조조의 감정 통제력은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며 ‘사랑에 몸을 던지는’ 여성 캐릭터 클리셰를 돌파한다. 동시에 로맨스 장르 내부에서도 훌륭한 도구로 작용한다. 사랑하되 사랑하는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모든 비극적 로맨스의 핵심이다.

조조는 사랑을 감추고 살아가는 비극에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주인공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시즌 4부터, 남자 주인공 역할은 선오에서 혜영으로 넘어간다. 혜영은 고교 시절 짝사랑했던 조조를 선오에게 양보하는 조역에서 조조와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주역으로 성장한다. 고용인 신분으로 나고 자란 선오의 집에서 독립해 나오며 선오와 대등한 구도를 형성한다.

조조는 굴미의 방해에 못 이겨(또한 굴미네 집에서의 생존을 위해) 첫사랑 선오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차 버린다. 조조는 두 번째 연인으로 혜영을 선택하고 좋알람 방패 기능을 없애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조조의 감정 통제력은 그녀의 자질인 동시에 외부에서 씌워진 숙명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좋알람 어플의 ‘방패’ 기능. 이 기능은 좋알람을 켜 놓더라도 자신의 감정이 노출되지 않도록 가려 주는 특수 방화벽 시스템이다. 방패 기능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좋알람 개발자 천덕구, 혹은 브라이언 천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조조만을 위해 선사한 선물이자, 조조가 자기감정 앞에 떳떳할 수 없게 하는 족쇄다.

 

 

'좋알람'과 함께 관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또 하나의 외부적 요인, TV 쇼 '짝!짝!짝!'.




조조가 무사히 방패 기능을 해제하고 혜영과 해피엔딩을 이룰지, 좋아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이별했던 첫사랑 선오와 다시 한 번 운명적 사랑에 빠질지, 작품은 서서히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시즌 5(<좋아하면 울리는>은 전체 7시즌으로 예정)는 서사의 기승전결에서 아마도 절정 부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는 ‘짝!짝!짝!’이라는 리얼리티 짝짓기 TV 쇼를 주인공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의 심판장으로 집어넣었다. ‘짝!짝!짝!’이 한창 진행 중인 현재, <좋아하면 울리는>의 독자들은 선오 파와 혜영 파로 나뉘어 최종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로맨스 장르에는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개인의 의지로 쉽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지배자가 반드시 등장한다. 대부분의 로맨스 작품들은 이 운명의 지배자가 신이나 악마, 황제나 술탄, 재벌이나 시부모, 혹은 더럽게 꼬인 핏줄 등을 제시한다. 하지만 <좋아하면 울리는>의 운명의 지배자는 '좋알람 어플리케이션'과 ‘짝!짝!짝!’ 쇼다.

조조의 방패를 없애기 위한 여정은 신이나 황제나 재벌의 방해라는 로맨스적 ‘고난’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조조의 고난이 비극의 내면 드라마로 환원되는 것을 좋알람과 ‘짝!짝!짝!’이라는 참신한 설정이 차단한다.


작가는 작중 내내 방패를 가동 시킨 것도, 좋아하는 선오를 찬 것도,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음에도 혜영을 선택한 것도 전부 조조 자신의 선택임을 분명히 한다. 보통 사람처럼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고 상처도 입지만 조조는 슬퍼하거나 원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스스로 상황을 돌파한다.

 
 
 

 
조조가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은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상황 극복을 위해 조조가 발휘하는 치밀한 이성과 자기 통제 능력은 비정하게까지 보인다(조조의 독한 면모를 지적하며 굴미 같은 성격이 다루기 쉽고 진솔하다는 독자 후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주인공이 면한 고난을 주변 인물들이 대신 해결하거나 분노하는 동안 주인공 본인은 변함없이 착한, 혹은 무력한 피해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으로 독자의 연민을 유도하는 일련의 ‘사이다’ 서사와는 정반대의 관점이다.


천계영의 작품들이 늘 그래 왔듯이 자립심 넘치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은 적극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들의 강인함은 로맨스 서사의 쾌락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좋아하면 울리는에 등장하는 애정 묘사들은 여느 순정 만화에 뒤지지 않게 낭만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불합리성을 이야기하는 조조와 선오와 혜영과 굴미의 대사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쉬우면서도 위악적이거나 허술한 은유 없이 솔직하다. 이토록 명료한 이성적 언어로 낭만을 해설하면서도 낭만 또한 넘치도록 제공하는 순정만화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로맨스는 다른 모든 장르들처럼 진화하고 있다.
 



천계영은 간결하고 솔직한 대사들로 낭만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좌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조, 굴미, 선오, 혜영.

 
 



 


이진 소설가. 장편 소설 <원더랜드 대모험>, <아르주만드 뷰티 살롱>을 썼고, 단편집 <상처투성이의 로라>를 발간할 예정이다. 

 
 
 
 

YOUR MANAⒸ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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