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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 파워 인플레이션의 후폭풍

기고

<덴마>, 파워 인플레이션의 후폭풍

 
 
 

위근우
 


“지금 기분 같아선 나 혼자서 백경대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지난 8월, <덴마> ‘The Knight’ 97화에 나온 롯의 대사다. 이 말은 해당 에피소드에서 조금씩 기미를 보이던 파워 인플레이션을 양영순 작가가 스스로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백경대 안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꼽히던 롯이 평의회 소속 요원인 샵의 능력으로 전사체가 증폭돼 갑절의 힘을 얻게 되어서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덴마>의 세계관은 제8 우주 삼국지처럼 됐다. 현 8 우주의 주인인 고산 백작의 경호부대이자 실질적 군대인 백경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주 최강의 화력이다. 백경대 백 명이서 아오리카 행성 전체를 쓸어버렸던 ‘아오리카 사태’ 이후 하이퍼 전투 퀑 시장은 활성화되었다. 태모신교 종단의 백사회, 패왕의 자음 경호대 등 백경대를 모델로 삼은 퀑 부대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꿈의 연봉이 확보되는 백경대로 가게 된다는 것이 공식적인 설정이다. <덴마> 안에서 백경대는 <원피스>에서의 해군 삼대장, <사조삼부곡> 시리즈에서의 오절(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처럼 세계관 내 최강자의 상한선을 그어주는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앞에서의 대사처럼, 그 기준점이 무너져버렸다.

 

 
 
 

실력만큼 허세도 심한 롯이지만 백경대를 혼자 상대하겠다는 발언의 무게는 단순히 허세로 넘기기 어렵다.

 


현재 연재 중인 ‘The Knight’는 수차례에 걸쳐 백경대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귀족에게 소속된 하이퍼 전투 퀑에 맞설 수 있는 블랭크 집단이 등장하고, 그런 블랭크에 의탁 중인 8 우주 최강의 퀑이자 롯의 스승인 공자가 등장했다. 또 그런 공자와 비등한 실력을 지닌 가우스, 그런 최강의 퀑조차 피해 다닐 수밖에 없는 평의회 소속 ‘헬맨’이 등장했고, 지하클리닉을 통해 능력을 강화한 패왕의 숨겨진 경호대가 등장했다. 
공자와 가우스까진 예외적인 강자로 둘 수 있지만, 백경대 에이스였던 롯이 단지 수술만으로 강해진 퀑에게 맥없이 두들겨 맞는 장면은 파워 인플레이션이 세계관 붕괴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인공 덴마의 전신이자 ‘무혈사신’인 다이크가 사실은 하도 맞아서 피가 없어져 ‘무혈사신’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끗발 있어 보이던 종단 3대 광견 발락이 ‘3대 거품’으로 불리게 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
콴의 냉장고’ 에피소드에서 고산과 엘은 우주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이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백경대가 근본도 없는 퀑에게 얻어맞는다면, 전까진 최강자 후보였던 롯이 본인의 노력이 아닌 ‘헬맨’의 도움으로 전사체를 증폭해 훨씬 강한 힘을 얻는다면, 이제 우주의 권력 지형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강화 퀑, 그리고 전사체를 증폭한 롯, 공자, 가우스는 이제껏 <덴마>가 쌓아온 세계의 법칙을 뒤흔드는 황소개구리다. 생태계는 무너졌다.
 

 
 
 
 

파워 인플레이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공자의 등장.

 
 
 
 
 

종(스케일)으로, 횡(서사)으로 지금껏 본 적 없는 탄탄한 세계관을 구축해오던 <덴마>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궁금한 건 그래서다. 사실 끊임없이 스케일을 키우는 능력자 배틀 장르(<덴마>는 아니지만)에서 파워 인플레이션은 흔한 일이다. 우주 최강이라던 초사이어인이 흔해져 버린 <드래곤볼>이 그렇고, 천재들만 가능하다는 ‘만해’가 더는 아무 변별점이 되지 못한 <블리치>가 그러하며, 최근 여러 신화의 신들이 등장하며 세계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는 <갓 오브 하이스쿨>이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 삼대장이라는 상한선으로 파워 인플레이션을 오랜 시간 효과적으로 억누르던 <원피스> 역시 이 함정을 벗어나진 못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쩌리’가 된 야무치를 버리고 마음껏 스케일을 키우고 놀 것인가, 다시 주섬주섬 세계관을 보수할 것인가. 
<덴마>는 좀 더 파격적이다. 예언가인 데바림이 롯, 가우스 등과 함께 우주 최강의 방패가 될 멤버 중 하나는 일반 퀑이라 말하자, 독자들 사이에서 그 후보로 주인공 덴마가 거론됐다. 조연으로 밀려나다 못해 최근 몇 개월 동안은 아예 얼굴도 보이지 않던 그 덴마. 이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떡밥이다.
 

 
 
 
 

하이퍼가 아닌 예언의 퀑은 과연 누구일까?

 

 

 
 

독자들의 가정일 뿐이지만, 데바림의 한마디 말이 가져오는 효과는 명확하다.

덕분에 과거에 깔아놓고 회수하지 않았던 <덴마>의 떡밥들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덴마의 뒤통수에 달린 소켓이 왠지 헬맨의 그것과도 흡사해 보인다. 또 아주 오래된 에피소드에서 고산에게 쳐들어와 하이퍼를 방금 하나 치우고 오는 길이라던 다이크의 자신만만한 표정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전부터 양영순 작가는 덴마를 비롯한 일반 퀑들과 백경대 사이의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정하기 위해 "퀑 싸움은 선빵."이라거나, 기술의 가짓수보다는 숙련도가 중요하며 숙련도가 높은 일반 퀑의 팀워크라면 하이퍼 퀑에도 대적할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을 추가해왔다.  
최근 화에선 퀑 전문 조련사이자 딜러인 주완의 입을 통해 지하클리닉 강화 퀑의 불안정성에 대한 설정을 추가했다. 일반 퀑이 하이퍼 퀑의 끝판왕인 백경대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나왔다. 이러한 복선의 상호 작용은 퀑에 대한 세계관을 더 넓혀준다. 즉 이번의 파워 인플레이션은 약했던 퀑을 더 약자로 만들기보다는 약자와 강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처럼 보인다. 추가된 설정은 백경대 때문에 ‘쩌리’가 됐던 캐릭터들이 다시 무대의 중심으로 귀환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2015년 10월 이후 출연하지 못하고 있는 덴마는 과연 주인공답게 복귀할 수 있을까?

 

 
 


 
사실 백경대의 등장과 함께 <덴마>에서 다양한 퀑 능력은 신기한 무엇이 아닌 수치화된 화력이 되어버렸다. 이 줄 세우기에서 저 끝에 있는 덴마가 완전히 엑스트라 취급을 받기 시작한 건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 파워 인플레이션을 통해 <덴마>는 엑스트라 된 덴마가 추가 설정들과 함께 더 큰 그림 안에서 어떻게 한 자리를 차지할지를 이야기의 새 동력으로 삼았다. 급작스러운 생태계의 붕괴조차 과거의 에피소들 안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던 것이며, 처음부터 계획된 퍼즐의 조각으로 인과에 맞게 조립된다면, 세계관은 무너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재구성된다. 그래서 이번 파워 인플레이션은 <덴마>도 피하지 못한 함정이라기보다는, <덴마>이기에 새롭게 활용 가능한 서사적 장치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경우 파워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때마다 이야기는 처음 설정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지만, 오히려 이번엔 독자들의 예측 안에서 이야기가 원을 그리며 처음 그곳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덴마가 있던 곳으로.
 

 
 
 
 
 

위근우 <드래곤볼>과 <북두신권>을 보면 문제아가 될 거라는 어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만화책을 보며 그럭저럭 멀쩡하게 성장했다. 동네 글 좀 쓰는 형으로 지내다가 현재 웹매거진 <아이즈>(링크) 취재팀장으로 재직 중.

 
 
 

YOUR MANAⒸ위근우
  


<덴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