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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의 계보를 잇는 웹툰'을 통해 본 여성의 욕망

'순정만화의 계보를 잇는 웹툰'을 통해 본 여성의 욕망
 



 

 정연


1. 순정웹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치즈 인 더 트랩>


90년대 한국 순정만화 주인공은 크게 영웅과 미친년으로 나뉜다. 가상 세계의 여성들은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거나 초능력을 이용해 행성 하나를 구했고, 새로운 기술을 전하겠다는 의지로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기도 했다.


현세의 여성들은 서로 얼마나 더 사이코인지를 뽐냈고, 노골적으로 부성(父性)과 남성 혈연을 부정했으며,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그 여자들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의 강렬한 자의식이 수그러든 것은 출판만화계에 닥쳐온 긴 침체기 탓이 크다. 눈을 번뜩이며 자신을 억압하는 것에 맞서 싸우고,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섰던 여성들은 불황 앞에 숨을 죽이게 되었다.


잡지사들은 발랄하고 가벼운 로맨스 위주의 일본 소녀만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국내 작가들에게도 어려 보이는 그림체, 자극적이고 가벼운 로맨스 위주의 스토리를 요구했다. 이 시기 아직 작가로서 기반을 쌓지 못했던 많은 신인-중견 작가들이 만화가의 꿈을 접었다.


활로는 지면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마련되었다. 2000년대 초반 포털 사이트들이 ‘웹툰’이라는 이름을 걸고 독자적인 무료 만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 웹툰은 출판만화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장르를 흡수했으며 순정만화도 예외는 아니다.


순정만화의 계보를 이은 웹툰들은 각 포털 사이트와 유료 웹툰 사이트에서 활발히 연재되고 있다. 대표적 작품으로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치즈 인 더 트랩>을 꼽을 수 있다. 연재가 길어지며 지금은 인기 순위가 뒤로 밀려났지만 한때는 붙박이로 목요 웹툰 1위를 차지하며 웹툰에서도 순정만화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홍설은 대학생이다. 개강 후 첫 술자리에서 홍설은 유정이라는 선배를 만난다. 잘생겼고 성적도 우수하며 배경도 훌륭하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그 남자의 ‘본질’을 홍설은 눈치 채고, 눈치 채인 것이 불쾌했던 유정은 홍설의 신경을 계속 건드리며 그녀 주변을 맴돌고 견제한다.

 

이 웹툰이 초반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두 사람의 신경전이 빚어내는, 일견 스릴러적 불온함을 연상케 하던 독특한 분위기 덕분이 크다. 유정은 일본 만화 <그와 그녀의 사정>(彼氏彼女の事情)의 주인공 아리마 소우이치로를 떠오르게도 한다.

 

모두에게 인기 있는 좋은 사람이 알고 보면 비뚤어지고 그늘진 남자라는 설정이 그렇다. 이 만화에서 아리마는 또 다른 주인공 유키노와 싸우고 충돌하며 사랑하고 성장한다.
 



 

이 웹툰의 명장면인 서류 신. 순정만화 남주인공으로서 유정의 독특함이 빛을 발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홍설은 유정과 싸우지 않는다. 홍설은 누구와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 홍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장학금과 무사평탄이다. 유정이 두려워 한 번 더 휴학할지를 고민하고,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자신을 사람들이 들쑤시는 것을 피곤해할 뿐이다. 이는 인물의 성장이나 변화 전을 조명하기 위한 모습이 아니라 홍설이란 캐릭터의 불변하는 성향이다.


이 만화 안에서 홍설에게 주어지는 미션은 주로 조별 과제, 같은 과 학생들의 이간질이나 텃세, 시험, 자신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따라하는 친구에 의한 기분 나쁨 등이다. 홍설은 이런 갈등 앞에서 ‘기분 탓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려 하거나 무책임한 동료들 앞에서 ‘내 이럴 줄 알았다.’며 일을 스스로 떠맡는 희생자 포지션을 맡는다.


집에서는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저항하거나 뚜렷한 불평을 하지도 않는다.




주인공 홍설을 괴롭히는 일들은 대체로 이런 종류이다.





 

그런 홍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유정의 존재다. 홍설이 유정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았듯 유정도 홍설의 안에서 동질성을 찾아내 둘은 가까워진다.


유정은 자신이 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홍설과 연인이 되고, 홍설은 계속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꺼림칙함을 지속해서 표현하지만 결국 특별한 해결 지점 없이 흐지부지된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표현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홍설은 ‘자신을 알아봐 준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이 세계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으며 독자들의 판타지를 만족시켜 준다. 바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나의 특별함과 가치를 알아봐주고 사랑해줄 것이라는 판타지다.

 


2. 약해진 자의식, 강해진 수동성


<치즈 인 더 트랩>뿐 아니다. 같은 포털의 <내 ID는 강남미인>, <당신만 몰라!>, <영수의 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되었던 <순정바로미터> 등 많은 순정 웹툰이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내 ID는 강남미인>은 현재 네이버 웹툰 순정 분야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성형수술을 통해 원하던 예쁜 얼굴을 얻었지만 못생겼던 과거 때문에 늘 주눅 들어 있는 주인공 강미래와 그런 주인공을 의도적으로 견제하는 ‘천연 미인’(일단은) 캐릭터인 수아가 등장한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무엇 하나 눈치를 채지조차 못한다.

 



 

주인공을 돌려 까는 예쁜 쌍년을  대신 공격해주는 남주인공 도경석. 좀 더 스트레이트한 사이다를 제공한다.





 

20화 가까이에 이르도록 예쁜 쌍년의 은근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공격받는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강미래. 그녀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남주인공인 도경석에 의해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비슷한 소재로 인기를 끌었던 만화 <미녀는 못 말려>의 주인공이 성형수술 후 과잉된 자의식을 뽐내고 다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순정바로미터>의 경우 캐릭터 성향의 차이가 있지만 주변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맞서지 않는 여성과 그런 여성을 선택하는 남성 주인공의 관계가 유사성을 가진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가장 우수한 남성에게 선택 받는다.


이 선택 자체가 읽는 이들에게는 ‘사이다’로 기능하며, 독자들은 이 무행동성을 어떤 고난 극복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주인공을 음해하는 주변 인물. 주인공의 대응뿐 아니라 적의를 가진 인물들의 공격 방식 역시 수동적이다.
 

 


주인공에게 가장 큰 악의를 품고 있던 캐릭터의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 주인공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지만 작품 내에서 가장 우수한 남자의 선택을 받고, 또 다른 우수한 여성의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당신만 몰라!>나 <영수의 봄> 류의 만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주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덜 노골적일 뿐 수동성은 여전하다. 여성이 철저히 감춘 진짜 모습이나 욕망을 알아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유지하는 남성의 존재가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욕망은 숨겨야 하는 것, 또는 그 존재감이 흐려 누군가가 알아봐주기 전에는 이 세계에 인지조차 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일코를 하는 여성 오타쿠가 주인공이었던 <영수의 봄>. 서로 이해하거나 편견을 극복해서라기보다는 영수의 이양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이양의 욕망은 영수에게 수용된다.
 

 

 


모험은 어디로 갔을까? 극복해야 할 시련이나 싸움과 성장은? 극도로 평평해진 세계관에서 젊은 여성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조별 과제나 가상의 쌍년의 적의가 되었고, 그 미션 앞에서 이들은 자신의 무해성을 어필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택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노라면 자신의 본질이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고결함을 드높여 준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원하는 마음이야 일반적인 욕망이라지만 독자로서 이입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물상이라는 점에서 의아함이 앞선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로맨스를 이야기의 원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순정만화의 뿌리는 서양의 공주 설화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주들조차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시련과 모험을 거쳐야만 했다.


21세기에 웹툰을 소비하는 여성 독자들의 욕망이 '무해하고 동정 받을 만한 피해자 되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 나를 알아봐주기'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돌적으로 원하는 것을 좇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류였던 때로부터 약 20년이 지났다. 여성들의 만화는 지면에서 인터넷으로 무사히 옮겨온 듯하지만 한 번 쪼그라든 세계는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정연 이런저런 책을 만들거나 글을 씁니다. 에이코믹스 필진으로 활동했습니다.

 

YOUR MANAⒸ정연